알지 못하는 것들

장은정



유희경의 『오늘 아침 단어』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것은 가장 개별적인 차원의 시적 감정에 관한 시들일 것이다. 가령 티셔츠에 목을 넣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그 순간은 어느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가장 개별적인 시간이다. 그야말로 화자만이 겪는, 완전히 밀폐된 순간. 이런 순간을 시로 쓴다는 것은 예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더라도, 시를 당장 ‘여기 지금’으로 만들어 놓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개별적인 것이라 해도 1인칭의 그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감정이라는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꽃처럼 시시각각 모양이 달라지는 것이어서 스스로에게 차오르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1인칭 내부에 북적이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감정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속으로 내리는」은 바로 이 이질적 감정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순간을 잘 보여주는 시편이다. “원망하는 시간”과 “그만 갔으면 좋겠다가도 멈출까 봐 두려운 시간”, “너인 시간”이며 “네가 아닌 시간”인 동시에 “너를 생각하는 나도 아닌 시간”이 모두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시집에서 풀어놓는 마음의 결을 세세하게 엿듣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가만히 짐작해보고 있는 이 시간이 어째서 도래하게 된 것인지를 생각하는 편이 더욱 흥미로운 것 같다. 「K」는 그 과정을 역추적할 수 있게 도와주는 시편이다. 백발의 K는 창가에 서 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물러서거나 시선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창밖에는 바람이 앞에서 뒤로, 쓰러질 것처럼 불고 있었다.” 창을 사이에 두고 K와 나는 서로 다른 공간에 있다는 점에서 분리된 동시에 서로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볼 수 없는 것과도 같다. “K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게 나를 미치게 만든다.” 그를 바라볼수록 알 수 있는 것이라곤 지금 자신이 바라보는 것은 “K를 생각하는 태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타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반응의 바깥”에 위치해 있다. “그는 수천의 나비가 만들어낸 사람”인 것. 그렇게 타자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 수 없는 ‘우리’를 만들어낸다.

 

「K」가 닿을 수 없는 ‘너’에 관한 시였다면, 「내일, 내일」은 ‘우리’에 관한 시다. 둘은 “잘못 배달된 도시락처럼 말없이,” 마주 앉아 있다. 그들은 “서로의 눈썹을 향하여 손가락을, 이마를, 흐트러져 뚜렷해지지 않는 그림자를, 나란히 놓아둔 채 흐르는” 중이다. “오른쪽에 왼손을 대고 싶어져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궤적」 역시 “나와 다른 한 명이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둘은 어떤 대화를 나누었지만 사실 “각각 무슨 말을 했는데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야말로 “어쩌면 구름은, 그냥 보이는 것이”니까. 곧 다른 한명이 나무의자에서 떠나고 나만 홀로 남아 있는 것으로 시는 끝난다. 이 우리에 관한 시편들의 방향은 모두 동일하다. 타자로 향한 마음들은 창가처럼 단단한 유리에 부딪히고 그 유리가 유리 너머를 더욱 상상하게 만든다. 그 상상하는 마음들은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결국 끝없이 자기 자신으로 환원되는 것. 여기에는 어떤 깊은 무기력이 존재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무기력이 북적이던 모든 감정을 의심하는 순간에 다다르게 한다는 것이다. 「深情」이 대표적이다. 누군가가 “나를 물속으로 던졌다”는 진술 뒤에 의심이 따라붙는다. 어쩌면 그가 나를 물속에 던진 것이 아닐 것이라는 의심이 아니라, “물은 우리의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나는 물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감정에 대한 비유로 읽히는 ‘물’에 대한 의심이 인상적인 것은 이것이 그의 시 전반에 대한 의심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3연을 보자. “나는 물 아래로 흘러갔다/그때 나는 얼굴이 없었다/얼굴이 없어 눈물도 없었다/표정은 우리의 오해일지도 모른다”. 물에 대한 의심은 얼굴과 눈물, 표정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의심은 모든 감정을 흘러가게 하고 굳어가는 자세만을 남겨놓는다. “파쇄된 리듬처럼 굳어버”리게 되는 것. 

 

물론 이러한 슬픔들, 무기력들, 의심은 관계의 불가능성에서 기인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근원적인 기원을 따라가자면, 어쩌면 이 시집에 실린 모든 시가 ‘일어난 일’들이기 때문은 아닐까. “없어진 나날보다/있었던 나날이 더 슬”픈 것(「텅 빈 액자」)이다. 그의 시는 “택시에서 내려 문을 닫고 오늘 닫은 몇 번째 문인지 곰곰이 생각”하는 것에 가깝다. “문 뒤에는 또 문이 있고 문 뒤의 당신은 아직도 깜깜”한 것(「부드러운 그늘」)이다. 그렇게 일어난 일들의 문을 열어보고, 또 열어보면 또 다른 문이 나온다. 마지막 문은 「면목동」이다. 아내와 남편이 있다. 아내는 소주를 마시고 내내 울고 있고, 남편은 아내를 업고 대문을 나선다. 남편은 아내가 왜 울었는지 모른다. 유희경 시가 대부분 타자에 대해 그저 짐작만 하듯, 남편 역시 “미끄러지는 아내를 추스르며 빈 병이 되었다”. 이 연인 사이에서 조용히 ‘나’가 등장한다. “거기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건 남편과 아내 뿐이었다 마음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유희경 시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 시편까지 읽고 나면 이 시집이 일렁이는 마음들이 처음 생겨난 기원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내 안에서 흔들리는 마음조차 알 수 없는 이유는 가장 최초부터 우리의 존재는 아무도 모르는 순간 생겨났던 것. 시는 그 모르는 것들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_《시와 사상》 2011년 여름호 발표. 

 

 

시선의 공간에서 형성되는 ‘우리’의 비밀

장은정

 


김성대 시에서 시적공간은 대부분 동일한 시간을 반복하고 있다. 그것은 특정한 행동의 반복으로 기인하는 것이다. 가령 「둘째 주에 온 사람」에서 “우리”는 둘째 주마다 찾아오는 “그”를 둘러싸고 토끼들과 함께 도는 것을 반복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그가 사라져도 빙글빙글 도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이 반복되는 행동으로 인해 시의 모든 시간은 둘째 주가 된다. 또한 「1950년의 창고」에서의 시간적 배경인 1950년에는 몇십 년 후의 창문이나 테니스 공, 줄넘기 등이 1950년에 공존하고 있다. 1950년부터 몇십 년 후 사이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김성대의 시에서는 특정한 시간대의 “모든 것이 리플레이되고 있”거나(「우주선의 추억」) “여러 날 같은 컷이 반복되고 있다”(「만화에 빠진 윤사월」). 도대체 이 시공간의 반복은 김성대의 시에서 어떤 의미일까. 이것이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던져져야 할 질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시간적 반복에도 처음과 끝이 섬세하게 구분되고, 그 시간 내에서 시적 주어의 이동이 발생함을 알 수 있다. 가령 앞서 언급했던 「둘째 주에 온 사람」의 첫 행은 “그는 슬로 모션으로 왔다”이고, 마지막 행은 “둘째 주가 되면 우리는 상세해졌다”이다. 즉 시는 ‘그’가 왔다는 것에서 사실의 제시로부터 출발하여 그로 인해 영향을 받은 ‘우리’에게 도착한다. 대상을 진술하는 시선으로서만 존재하던 화자가 불쑥 얼굴을 내밀면서 대상을 시야의 중심에서 밀어내게 되는 것인데, 바로 그때 반복되는 시간이 발생한다. 시적 주어의 이동은 단순히 대상에서 주체로의 이동이 아니다. 그때 밀려난 대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화자가 바라보는 대상’으로서 남아있고 새롭게 등장한 시적 주체는 ‘대상을 바라보는 자’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김성대의 이 독특한 시공간은 타자와 주체 사이의 팽팽한 시선의 구조로 구축되어 있다. “목맨 사람의 집”에서 우리가 고요한 점심을 차릴 때, 그곳에는 우리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목맨 사람의 집」). 


그러니 김성대의 이 독특한 시공간에서 단독자로 존재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시선의 공간이기에 온갖 이질적인 요소들이 함께 공존하기 때문이다. 제 2부 <마임의 방>에 속한 시 대부분이 바로 이 수많은 타자들과 그 타자들의 눈에 의해 무한히 분해된 ‘나’들로 들끓는 공간을 묘사하고 있다. “노인이 아이와 일치하는 시간”이거나(「만화에 빠진 윤사월」) “불 켜진 돼지” 안을 열고 들어간 “남자”들이 북적이는 “봄”이거나(「돼지 (안)에서」) “큰 형의 재를 곱게 빻아 콜라에 타” 먹은 막내의 이야기인 것이다(「삼형제」).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무한히 분화된 주체 자체는 이미 경험한 적이 있다. 2000년대 시들의 시적 주체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김성대의 시는 분화된 주체 자체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의 시는 타자와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시선의 구조’를 전면에 내세우며, 그 구조를 프리즘으로 삼아 타자와 주체가 뒤섞이는 현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분명 낯선 시적 관점이다.

 

김성대의 시적공간은 시선의 구조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분화된 주체 자체를 상실의 표지로도 해방의 표지로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다만 시선의 공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극대화시키고자 한다. 「진찰」은 그 가능성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시편이다. 이 시에서는 ‘나’라거나 ‘우리’와 같이 명명할 수 있는 화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시적 주체는 “꼭 피를 나눠야 한다면”이라는 전제 하에 자신의 눈에 다른 “동물들의 눈”을 넣어보거나 “몸 안의 동물들이 숨는 그늘”을 널어본다. 이 행동은 필시 타자와 주체가 뒤섞이는 공간에 자발적으로 들어서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뜻밖에도 그는 그런 행동으로 인해 그동안 감춰져있던 우리의 비밀이 밝혀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있다(“우물 앞에서는 비밀이 없다고 했으니까/오늘 우리가 밝혀질지 몰라”). 그 비밀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심장이 몸에 꼭 맞”는 잔인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성대의 시는 ‘나’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섞여 있는 공간으로 걸어 들어가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결론적으로 ‘너’의 비밀 역시 ‘나’를 통해 알려질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있으리라. 2000년대 시들이 수많은 주체들이 자기 고유의 목소리를 내는 다채로운 공간을 경험하게 해주었다면, 김성대의 시는 그 주체들 사이에 거미줄 같은 시선의 그물망을 촘촘한 시적 공간으로 구축함으로써 서로가 함께 있을 때에만 생겨나는 ‘우리’의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김성대의 시가 보여주는 “오늘을 꼭 기억하자”.

 

_《창작과비평》 2011년 여름호 발표.

 

 

 

안부 개인전, 〔관사적 관계〕

레인보우큐브 갤러리(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91-27)

2019. 10. 11 ~ 10. 20

 

안부 작가의 작업에서 주된 대상은 ‘아버지’이다. 내가 안부 작가의 작업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남성이 남성을 대할 때 가부장제의 재생산에 기여하지 않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작업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들에서 작가는 유의미한 성취를 내놓기도, 때론 나이브한 전략에 그치기도 하면서, 그 가능성과 한계가 뒤섞인 결과물을 내 놓았다. 우리는 안부 작가의 이번 전시를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사유할 수 있다. 남성창작자는 페미니즘적 작업을 할 수 있을까? 이때의 페미니즘적 작업이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할까? 남성과 남성 간의 차이를 페미니즘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런 고민 속에서 흥미롭게 작업을 지켜보던 도중 전시의 서문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평소 전시를 다니는 입장에서 어떤 전시 서문들 중엔 의아한 경우가 많았다. 작품 해석 자체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지만, 어느 정도 해석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그 해석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차단하는 경우도 답답했다. 비평은 어떤 역할을 해야할까? 창작자와 향유자 사이에 어떤 비평적 개입을 해야할까? 전시 서문을 쓸 기회가 생겨서 더욱 이 문제를 곱씹게 되었고, 일반적인 서문 형식을 버리고 지령과 질문을 서른 개 정도 작성하여 ‘매뉴얼-비평’을 작성했다. 이 생소한 형태를 택한 것은 안부 작가의 작업이 갖는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다.

 

안부 작가는 회화와 사진, 비디오 작업을 넘나들면서 본인의 문제의식을 중첩시켜 나간다. 하나의 장르에 한 가지 작품이 귀속되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영상으로 찍고, 그 영상에 자막을 입힐 때는 유투브 브이로그의 형식을 차용한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을 전시할 때의 맥락에 의해 관객은 단지 ‘회화 그 자체’라는 전통적 접근 방식으로 그림을 감상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인스타그램 해시태그가 작동하는 방식을 차용하는 사진 찍기 방식을 택하되 그 사진을 인쇄하고 전시할 때는 전통적인 사진전이 갖는 형식을 차용할 때, 사진전에서 ‘사진을 본다’고 여기던 행위는 인스타그램에서 ‘사진을 보는’ 행위와 구분되는 간극 자체를 작업의 한 요소로 다룬다. 

 

이 같은 장르적 중첩성은 하나의 작품이 단 하나의 장르 문법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고 작가의 문제의식에 맞춰 여러 장르와 매체들이 ‘활용’되는 수행성을 지닌다. 즉 안부 작가의 작품에서 아버지가 어떻게 다뤄지는지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그가 여러 장르들이 갖는 차이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비평 역시 그 간극을 경험하게 만들어야하지 않을까? 안부 작가가 여러 장르들의 특수성을 하나의 작업 대상으로 삼았듯, 비평 역시 작품과 관객 사이에 성립하는 여러 구분들 자체를 비평해야 하지 않을까? “매뉴얼-비평”은 안부 작가의 작업에 대한 나의 첫번째 비평적 응답이다. 

 

 

매뉴얼-비평

*전시를 함께 즐기는 매뉴얼과 질문을 제공합니다.
*동행이 있다면 아래의 질문들을 함께 이야기 나눠보세요.

A관 (1~7번 작품)
1. A관으로 입장하여 7번부터 오른쪽으로 돌아 3번, 4번, 5번, 6번 순서로 관람한다.
2. 인스타그램에 접속하여 #ootd 해시태그를 검색어로 넣는다. 검색되어 나온 사진들과 3번~7번 작품들을 비교해본다. 비슷한 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일까?
3. 피사체가 들고 있는 물건이 있는지, 그 물건이 무엇인지 기억해둔다.
4. 7번 작품 오른편의 작은 a방으로 들어가서 1번 작품을 관람한 후, 3~7번까지의 작품과 1번이 어떤 점이 다른지 비교해본다.
5. 피사체가 왜 어떤 물건들을 손에 쥐고 있었는지, 2번 작품에서 그 맥락을 찾아본다.
6. 2번 작품은 왜 ‘원고지’에 ‘손글씨’로 작성되었을까?
7. 3~7번 피사체 코디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색 계열이 있는가? 어떤 색 계열의 선호도가 나타나는가?

B관 (8~10번 작품)
8. B관으로 이동하여 8~10번 작품을 관람한다.
9. 셋 중 어느 그림이 가장 좋은가?
10. 그 이유는 무엇인가?
11. 셋 중 어느 그림이 가장 ‘잘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 하는가?
12. 9번 질문과 11번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일치했는가?
13. 만일 불일치했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그림과 ‘잘 그린’ 그림의 기준은 어떻게 다른가?

C관 (11번 작품)
14. C방으로 이동하여 영상을 관람한다.
15. 안부 작가에게 그림을 가르쳐주는 세 명의 선생님들은 안부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가?
16. 세 명은 모두 같은 것을 가르치는가? 만약 다른 것을 가르친다면 어떤 차이가 있는가?
17. 그림을 배워서 그리는 과정을 비디오로 찍어서 보는 것이 당신에게 재밌었는가? 재미가 없었다면 왜 재미가 없었는지, 재밌었다면 어떤 지점이 재밌었는가?
18. 안부 작가가 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그림을 배우는 과정을 우리가 함께 관람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9. tmi와 11번 작품의 차이는 무엇일까?
20. 무엇보다, 안부 작가는 ‘굳이 왜’ 그림 그리기를 배우려고 하는 것일까?

D관 (12번 작품)
21. D관으로 이동하여 12번 영상을 관람한다.
22. 안부 작가는 왜 아버지를 그리는 것일까?
23. 아버지를 그리는 과정에서 비디오에 찍힌 모습과 다르게 그린 점은 무엇이며, 다르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24. 그림을 그리는 도중 나누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에서 당신에게 인상 깊었던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B관 (8~10번 작품)
25. B관으로 ‘다시’ 이동하여 8~10번 그림을 ‘다시’ 관람한다.
26. 영상들을 관람한 후에 이 그림들이 다르게 보인 지점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왜 다르게 보였을까?
27. 그림이 제작된 모든 과정을 보고 나서 세 그림 중 가장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그림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나가며
28. 만약 안부 작가가 여성이었다면 이 전시에서 결정적으로 달라졌을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29. 검색창에 ‘관사’를 검색하여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고, 이 전시 제목이 왜 ‘관사적 관계’인지 추측해본다.
30. 만일 당신이 이 전시의 제목을 짓는다면 뭐라고 지을 것인가? 그렇게 제목을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지령 및 질문 작성자_ 장은정(비평가)
창작자와 향유자 사이에 비평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트위터 @and_so_0n

 

매뉴얼_비평.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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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읽기'는 행동일까, 아닐까? 책상 앞에 앉아 한 권의 책을 읽으며 하루를 통째로 보낸 한 사람을 상상해본다. 그 사람이 책을 읽는 동안 세계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만일 그 사람이 책을 읽는 대신 집을 짓는 것에 하루를 할애했다면, 저곳에 있던 몇 개의 벽돌들이 이곳으로 가지런하게 옮겨지고, 여러 나무 판자들이 일정한 모양으로 잘리고 배치되고 연결되는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이때 그 사람이 한 행동이 세계에 일으킨 변화는 명확해보인다. 어떤 사건이 명백히 발생했고 그것은 미세하게나마 세계를 다르게 변형시킨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벽돌과 나무판자들을 어떤 목적에 맞춰 변형시키는 대신, 책을 읽었다. 그렇다면 이 세계엔 하루동안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그건 어떤 건축물을 쌓아올리는 일과는 분명 다른 종류의 일이다.

하루에 시집을 다섯 권씩 읽던 시기가 있었다. 대학을 다니던 시절이었고, 당시 집이 학교에서 멀어서 학교에 가려면 한 시간 반 정도를 이동해야 했다. 왕복으로 대략 세 시간은 걸리는 그 시간은 언제나 시집을 읽는 시간이 되었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수업과 수업 사이의 공강 시간, 학생으로서 의무적으로 해내야 하는 과제와 같은 일들이 끝난 이후의 남는 시간은 모두 시집을 읽는 시간이었다. 그건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고, 그걸로 무언가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기'에는 시를 이루는 단어, 문장, 심지어 조사 하나, 문장 부호까지도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와닿았다. 

 

늘 어려운 수수께끼처럼 느껴지던 시들이 갑자기 무슨 뜻인지 명료하게 독해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시를 어려운 장르로만 여기던 시절에도 시는 모호했고, 하루에 다섯권씩 읽어치우던 '그 시기'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그 모호함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에서 불편함이나 거부감보다는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비밀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읽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는 문장으로 글을 처음 열었지만, 여러 종류의 글 중에서도 시를 읽는 것이 특히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지식을 전달하거나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명료함들에 저항하는 모호함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시라는 장르의 특수성 때문이다. 지식의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읽기 행위는 '배움'이라고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하루종일 시를 읽은 자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배움'이 없던 무언가가 새로이 생겨나는, 즉 더해지는 사건이라면 시 읽기는 오히려 반대의 일, 덜어내는 사건에 가까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쉽게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모호함 앞에서 읽는 자는 무언가 배우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한 질문을 듣게 된다. 가령 이런 시는 어떤가.    

 

우리 둘이는 서로 손을 맞잡고

어디서나 마음속 깊이 서로를 믿는다

 

아늑한 나무 아래 어두운 하늘 아래

모든 지붕 아래 난롯가에서

태양이 내리쬐는 빈 거리에서

민중의 망막한 눈동자 속에서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들 곁에서라도

어린아이들이나 어른들 틈에서라도

사랑은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우리들은 그것의 확실한 증거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음속 깊이 서로를 믿는다.


_폴 엘뤼아르, 「우리 둘이는」 전문

 


두 사람이 있다. 그 중 한 사람의 목소리로, 시는 우리 두 사람이 “어디서나” 서로를 믿고 있다고 말해준다. 이때의 '어디서나'라고 하는 것은 “아늑한 나무 아래 어두운 하늘 아래"가 되기도 하고, "모든 지붕 아래 난롯가"이거나 "태양이 내리쬐는 빈 거리"이기도 하다. 이때 나열된 것들은 구체적인 '장소'들이지만 "민중의 망막한 눈동자 속"이나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들 곁” 혹은 “어린아이들이나 어른들 틈"처럼 상대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이 시는 일견 추상적인 것으로 이해되기 쉬운 '사랑'이라는 가치가 서로를 깊이 믿는 두 사람을 통해 그 관념성을 벗어던지고 실재하는 것으로 명확하게 존재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증언한다. 

그렇다면 이 시에 모호성이란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이 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믿으며, 그 믿음이야말로 사랑이라는 것. 이렇게 요약하고 보면 참으로 명료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서로를 믿게 된 것일까? 그 믿음이란 그토록 '어디서나’ 존재할 수 있을 만큼 견고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 무엇보다 믿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시는 이처럼 시가 다루고 있는 대상인 '믿음'의 기원과 경로, 의미에 대해 그 무엇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 시의 모호성은 바로 여기서 비롯하며 동시에 이 시의 강렬함 역시 그 과정을 대담하게 건너뛰고, 그럼에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증언함으로서 발생하는 것이다.

어떤 시들은 읽는 자의 마음을 완전히 부서버린다. 자고 일어났더니 친구가 핸드폰으로 이 시를 보내놓았다. 잠결이라 아무런 대비없이 이 시를 읽고서는 나는 내 마음이 완전히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믿음과 사랑, 그리고 그러한 믿음과 사랑을 통해 살아가는 두 사람에 대한 이 시는 정말 아름다운데, 어째서 내 마음을 산산조각 내버렸을까? 아마 그건 내가 그토록 강인하고 완벽한 믿음과 사랑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을 절절히 깨닫게 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시 속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끝내 누군가를 믿지 못했던, 그리하여 끝내 도달하지 못했던, 불완전한 나의 사랑과 나의 한계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잊어야만 했던, 고통스러웠던 기억들 모두가 이 시를 통해 생생하게 이끌려 나왔다. 덕분에 이 시를 읽었던 하루종일 나는 슬픔에 잠긴 채로 무겁게 가라앉은 채로 하루를 보냈다. 그날 나에게는, 그리고 세계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2017년 8월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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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들은 상처를 요구한다

장은정
 


멍들고 살갗이 찢어져 피를 흘리며 울고 있는 아이에게 지나가던 한 어른이 다정하게 일러준다. 간절히 바라기만 한다면, 신은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준단다. 그날 밤, 아이는 불 꺼진 교회를 조용히 숨어든다.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보는 기도는 이것이다. 그들을 모두 죽여주세요. 아이에게는 살인만이 유일하게 간절한 바람이었으리라. 최치언의 두 번째 시집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는 이러한 최초의 기도를 닮아 있다. 그러니 가까스로 도달하는 화해나 위안이 주는 온기와 같은 것은 이 시집과 거리가 멀다. 

 

이 시들은 아이의 기도처럼 세계의 비참과 폭력에 ‘대응’하고자 한다. 화자는 “발길에 차이면서” “엄마, 제가 죽여드릴게요. 다 죽여드릴게요.”(「매장된 아이」)라고 거듭해서 다짐하거나, “봄나물 같은 여자아이들이 나팔랑거리며/줄넘기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 여자아이들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 하나만/새겨줄 수 있다면”(「일생에 단 한번」)라고 중얼거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최초의 기도 내부에서는 여전히 이런 문장들이 통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은밀한 살인이 아니면 진실은 창틀 위에서 썩는다.”(「떡갈나무아래」). 이 시들은 분노와 증오의 근원적인 형태를 시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내가 너희들을 견디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너희가 내 뒤통수에 낯익은 얼굴처럼 붙어 울고 웃고 춤추는 것을
내가 견디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견딜 수 없다면 내가 나를 죽여 너희도 죽여야 하는가.

한순간, 극렬한 감정들이 눈동자에 고인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뒤표지 글 중

 


이토록 단호할 수 있는가. “내가 너희들을 견디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라니. 여기에는 타자의 눈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하여 바라보는 ‘타자로의 우회’라고 할 만한 모든 가능성이 완전하게 차단되어 있다. ‘나’ 역시 ‘너희들’의 입장에선 ‘너희’일 수 있을, 그 모든 가능성 말이다. 이 문장들에겐 어떤 잠재적인 형태로도 ‘너희들의 관점’이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이 시들이 스스로도 누군가에겐 폭력일 수 있는 가능성이 배제되어 있는 ‘반성 이전’의 세계이며, ‘사유와 교육 이전’의 세계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목소리는 완벽한 일인칭, 밀폐된 일인칭의 것이다. 그러니 이 문장들이 이토록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호함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문장을 읽는 우리가 스스로를 타자의 눈으로 대상화시켜 바라보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세계는 완벽한 일인칭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내 뒷통수”에는 끔찍하게도 “너희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낯익은 얼굴처럼 붙어 울고 웃고 춤”춘다. 그러니 위 문장들은 ‘나’라는 존재에 불순물처럼 섞여드는 ‘타자’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최초의 폭력과 억압에 맞서 내지른 최초의 분노이다. 너희를 죽이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죽”이는 방법 밖에 없을 만큼 ‘나’가 ‘너희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아이는 이제 알게 되었다. 그들을 모두 죽여주세요. 하지만 당연하게도, 아무리 간절히 원한다고 해도, 이 최초의 기도는 실현되지 않는다. 그제야 마지막 문장이 가능하다. 

 

“한순간, 극렬한 감정들이 눈동자에 고인다.” 여기서 ‘극렬한’이라는 형용사에는 분노와 울분, 슬픔이 이상하고 빠르게 혼합된 최치언만의 시적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밀폐된 일인칭과 그러한 일인칭을 무화시키려는 세계와의 충돌, 그 속에서 이 낯선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넘칠 것만 같은 잔처럼 감정적이고, 때로는 깨어져버릴 듯 위태로우며, 머뭇거리지 않고 눈알을 그어버릴 듯 공격적이다. 이처럼 이 시집의 많은 시들이 다양한 종류의 폭력과 억압에 대항하여 이 낯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데 이 낯선 목소리가 투명한 분노들을 통과하여 가장 ‘극렬한’ 지점에 가닿을 때,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극렬함’만으로 시를 쓴다면, 시가 이토록 차가워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모두 우측으로 걷고 있었다. 그때 좌측에서 소리가 들렸다
듣지 마라
소리는 계속해서 우리들의 귓전을 때렸다
귓속에서 시뻘건 태양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좌측은 연필의 힘을 믿는다
나무의 치졸함을 믿고
의사당의 순결을 믿는다
좌측은 형제들의 오만을 믿는다
그러므로 좌측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우리가 늙는다는 것도
너희들이 여자이었다가 남자가 되고 그리고 여자로 사랑하는 나약한 방식을 믿는다

귀를 도려내라

그리고 우리는 귀 없이 계속 걸었다. 그때 좌측에서 움직였다
보지 마라
움직임은 계속해서 우리들의 눈꼬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담장의 덩굴이 눈알을 휘감아 낚아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

좌측은 우리들 반대쪽으로 기울어 있다
높은 담장을 드리우고 좌측은 아무것도 치료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좌측의 말이
칼처럼 우리 몸을 찌르고 들어왔을 때 우리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많이 순진해졌다
우리가 더 이상
선한 꿈을 꾸지 못한다는 건 좌측에게 우리들의 악몽을 맡겼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 있을 때

눈알을 파라

눈알 없이 우리들은 우측으로 걷는다
좌측이 우측이 될 때까지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우리는 우측하고만 싸웠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
이것이 좌측이 준 선물이다

 

ㅡ 최치언,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전문

 


이 시를 주도하는 것은 단연 ‘걸음’일 것이다. 다소 정지된 느낌을 주는 좌측에 대한 진술들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걷고 있었다”, “계속 걸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라는 구절들이 중간 중간 삽입됨으로써 시는 계속해서 걷고 있는 느낌을 준다. 이것이 이 시를 지탱하고 있는 굵은 선이라면, 우측의 걸음을 소리로, 시선으로, 자꾸만 잡아당기는 좌측은 이 굵은 선의 두께와 걸음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고 깊어지게 만든다. 이 시에서 좌측과 우측은 일견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읽히지만, 사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구분’되어 있을 뿐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측에서 걷고 있어도 좌측의 소리들을 들을 수 있고 좌측의 움직임들을 볼 수 있다. 오히려 너무나 주도면밀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도려내고, 보지 않기 위해 눈알을 파는 것이다. 그러니 좌측과 우측 사이의 복합적인 애증 관계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좌측이 믿고 있는 것들은 모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무용해서 이상적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이다. “연필의 힘”이라거나, “나무의 치졸함”, “의사당의 순결”, “형제들의 오만”과 같은 것들. 이것은 현실세계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존재해야할 것들에 가깝기에 이 좌측의 믿음을 우측이 가진다는 것은 현실적인 우측의 세계와 충돌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섬뜩할 만큼 단호한 이 명령들, “듣지 마라”, “귀를 도려내라”, “움직일 수 있을 때//눈알을 파라”와 같은 구절들은 너무나 깊고 잔인한 애정에서 나온 것들이다. 좌측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꿈꾸게 하지만, 그 꿈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고 있기에 좌측 자신으로부터 우측을 보호하고자 한다. 심지어 귀를 도려내거나 눈알을 파서라도. 그래서일까, 다음의 구절이 이 시에서 가장 깊은 감정을 건드린다. “사랑한다는 좌측의 말이/칼처럼 우리 몸을 찌르고 들어왔을 때 우리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많이 순진해졌다”.

 

그렇다, ‘믿는다’는 것은 많은 것을 가져가지만 아무것도 치료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랑이란 칼처럼 찌르는 것, 꿈꾸게 하지만 그 대가로 귀와 눈알을 가져가야만 하는 것.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측이 걷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귀와 눈알이 없어지더라도 우측은 계속 걸으면서, 모든 것을 잘라내면서, 좌측의 존재를 계속해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좌측이 우측이 될 때까지”. 그렇게 해서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모두 죽는 일 밖에 없다. 어떤 보상도, 치료도 주어지지 않는다. 시는 담담하게 마지막 행을 마무리 짓는다. “이것이 좌측이 준 선물이다”. 그렇게 제목은 이제야 우리를 최종적으로 이해시킨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놀랍지 않은가. 많은 다른 시들이 내 뒤통수에 붙은 ‘너희들’에 대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것과 다르게, 여기서 우측은 좌측과 공존할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내어주면서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 냉정하고 잔인한 극렬함이 “내 뒷통수에 낯익은 얼굴처럼 붙어 울고 웃고 춤추는 것”을 ‘감내’함으로서 생겨난다니. 이 시집을 읽으며 가장 깊은 분노와 가장 완벽한 꿈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완벽한 꿈과 불가능성이 공존하며 만들어내는 비장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물’하는 이 시집은 아름다움의 결론이 언제나 공허하고 허탈한 죽음으로만 귀결된다는 ‘피’의 진실을 요구한다. 그렇다. 어떤 시들은 상처를 요구한다.

 

_《문장웹진》 2010년 11월호 발표. 

 

 


탁자의 아래

장은정



얼마 전에야 우리는 알게 되었다. 사소한 어떤 순간에게서 포착되는 느낌이 얼마나 시적일 수 있는지. 가령 높은 선반 위로 손을 뻗느라 발꿈치를 약간 들어 올리는 것은 모두가 경험해 본 적 있는 사소한 순간이다. 하지만 바닥으로부터 발꿈치 사이, 몇 센티미터의 높이로 팽팽해지는 그런 사이 공간에게서 시적인 유일함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것은 온전히, 김행숙의 시를 통해서였다. 

 

이 시적 효과를 낯설게 누리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시의 영역이 확대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 어떤 이념이나 관념으로도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이 시적 순간에 대한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새로운 시를 읽음으로써 새로운 감각을 우리가 얻을 수 있었다면, 그 감각에 대해 열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물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행숙의 세 번째 시집, 『타인의 의미』는 그 제목부터 이 질문에 대한 암시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관념으로도 남김없이 설명될 수 없는 시적 효과를 통해 낯선 시를 구축했던 김행숙이 ‘의미’라는 단어를 새 시집의 얼굴에 전면적으로 배치한 것은 주목되어야 한다. 「머리카락이란 무엇인가」는 이러한 변화를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시편이다. 총 3연으로 구성된 이 시에서 첫 번째 연은 “머리카락이 자라는 순간”을 제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눈이 가장 밝은 사람도” 본 적 없는 이 순간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가 김행숙의 이전 시들을 통해 경험해 본적 있는 낯선 시적 순간이다. 

 

그런데 이 시는 그 순간을 이전처럼 문득 비어버리는 공간으로 만들지 않는다. “눈이 어두운 우리에게 머리카락은 한 달 후에 자라는 것”임을 지적하면서, 머리카락이 다 자란 후에야 자라는 순간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그래서 두 번째 연은 “나는 머리카락에 대하여 의문을 품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세 번째 연은 “왜 머리카락은 끝없이 자라는가.”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즉 이 시편에서 중요한 것은 낯선 시적 순간의 포착이 아니라, 이 낯설게 비어버리는 순간의 비밀에 스며있는 의혹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머리의 반쪽은 비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 머리카락은 시간처럼 시간처럼 끝없이 자라는가. 왜 머리카락은 정치적인가. 마침내 누가 머리카락을 해석하는가”.

 

이 낯선 순간들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는 것. 그것은 이 낯선 순간에게 현실과의 관계를 묻는 작업이기도 하다. 비교해보자. 『이별의 능력』은 “마치 파혼선언처럼 플래시가 터질 거야/새가 날아가는 풍경화처럼/허공에서 정지한//사진을 둘러보며/분리감을 느끼는거야”(「놀이의 발견」)와 같이 ‘정지’와 ‘분리’를 통해 낯선 시적 자유를 찾아냈다. 그러나 “펜이 바닥에 떨어졌어요. 별 뜻도 없이 딴 뜻도 없이 굴러가는 저것을 어떡해.” 라는 외침에 대해 『타인의 의미』의 의미심장한 대답. “주우세요! 애타게 찾으세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탁자 밑으로 들어가는 일은 간첩의 신분처럼 위험한 것입니다. 엿듣고 싶으세요. 탁자 밑에서 영원히 나오지 마세요. 입도 뻥긋하지 마세요. 침도 삼키지 마세요.”(「탁자의 유령들」).

 

만약 이전의 시들이라면, 별 뜻 없이 굴러가는 펜이 주는 시적인 느낌을 매혹적으로 써냈을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시는 충분히 아름다웠을 것이다. 하지만 김행숙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탁자 밑으로 들어가서 애타게 찾고 영원히 나오지 말라고 단호하게 명령하는 것이다. 낯선 시적 순간을 찾아내고 그 순간에 대한 해석들과 의미들을 애타게 찾으라는 것. “우리에겐 동의해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부정해야 할 것이 똑같이 높은 산”이다. “밤을 새워도 끝나지 않고 밤을 새우지 않아도 끝나지 않”겠지만 이 결론이 나지 않을 행위를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어떤 결론도 나지 않을 것이기에 낯선 시적 순간을 그 자체로 보호할 수 있으면서도 이 시적 순간을 현실로부터 고립시키지 않을 수 있다.

 

비밀로 가득 차 있는 시적 순간이 스스로 해석과 의미의 영역으로 자발적으로 들어선다는 것, 물론 그것은 비평이 시를 마주하고 시도하는 해석의 작업과는 다른 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터. 이번 시집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잠과 꿈에 대한 숱한 진술들과 질문들은 바로 이런 시적인 의미화 작업으로 간주될 수 있다. 어째서 잠과 꿈인가? 잠들어 있는 시간은 우리가 의식의 연속성으로부터 잠시 벗어나는 시간으로 우리가 시적인 것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잠」이라는 제목의 시가 직접적으로 묘사하듯이 “어디에도 닿지 않은 채//그곳에 속하는” 시간인 것이다.

 

자기 완결성을 지니고 있는 이 시간은 현실에선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들이 달콤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일 수도 있고 비명소리와 식은땀으로 가득한 악몽의 공간일 수도 있다. 이 시공간성은 꿈을 통해 획득된다. 그러니 꿈은 잠의 현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잠과 꿈을 시적차원에서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꿈(잠)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사유이기도 하고 시적 순간에 대한 시적 사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시적 순간은 그 자체로 시적 사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 시집에서는 그것을 구분함으로써 해석과 의미의 영역으로 걸어들어 간다.

 


물에 빠진 사람
드디어 총체적이 된다
나는 꿈속에서 열 번 경험했다
내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딱 한번 
나는 행복하였다
떠오르지 않는 꿈처럼
순종적이었다
나머지는 몽땅 악몽이었다
현실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어렸을 때
바닷가에서 보았던 익사체가 기억난다
갑자기!

그녀에게 닥친 현실을 깨닫자 뒷걸음질치는 저 여인
얼마나 멀어졌을까
어디서 무섭게 구역질을 하고 있을까
이제 보이지도 않는데
왜 그녀는 내게 이토록 친밀한가
우리 마을 사람도 아닌데
처음 본 얼굴인데

그것은 나의 현실도 아니었는데
왜 완벽한가
어떤 꿈들은
어떻게 내 것이 돼 버렸는가


―「누군가의 호흡」전문

 


이 시에서 가장 강조되어야 할 것은 리듬감이다. 이것은 글자의 소리가 반복되면서 생겨나지 않고 내용적인 것에서 생겨난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누군가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가 물 위로 떠오르기를 반복하고 있다. 물과 공기라는 두 세계를 교차로 드나들며 호흡은 멈출 듯 간신히 터지고 삼킬 듯 들이마신다. 이 리드미컬한 이미지는 그 자체로 시의 구조를 형성하면서 반복된다. 행복하였다가 몽땅 악몽이 되었다가, 시체에게 마구 키스를 퍼붓다가 무섭게 구역질을 하였다가, 보이지도 않는 그녀가  친밀하게 느껴지고, 나의 현실도 아닌데 이토록 완벽한, 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리듬감. 전혀 이질적인 두 세계를 절박하게 드나드는 어떤 순간들의 느낌은 김행숙의 시에서만 읽을 수 있는 시적인 순간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시에 대해 이렇게 매듭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시에는 풍부한 상징적 암시들이 출렁거리고 있다. 이 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두 가지의 단어, 현실과 꿈은 어떤 관계일까? 그것은 물과 공기처럼 선명하게 나뉘지 않는다. 2연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공기의 세계는 숨을 쉴 수 있는 달콤한 꿈이라는 현실이고 물의 세계는 숨을 쉴 수 없는 악몽의 현실이다. 그러니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누군가는 물과 공기 사이를 오가고 있을 뿐 아니라,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달콤함과 끔찍함 사이를 오가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의 차원에서는 물과 공기는 분리되어 있는데, 관념적인 시어들인 꿈과 현실은 물과 공기라는 이미지에 각각 대응되지 않는다. 이미지는 분리시키고 관념어들은 통합시킨다. 이 기묘한 균열 속에서 흘러나오는 이상한 절망감에 어리둥절해질 때, 물에 빠진 누군가의 숨이 끝내 끊어지고 만 것과 같은 마지막 연. “그것은 나의 현실도 아니었는데/왜 완벽한가/어떤 꿈들은/어떻게 내 것이 돼 버렸는가”. 

 

그 어떤 감각어도 동반하지 않은 관념적 진술들이 날카롭게 구분되어 있는 흑색과 백색처럼 선명한 시적 감정을 동반하는 것은 놀랍다. 구분되어 있으나 분리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으나 구별해야 하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이 시는 진동한다. 이렇게 시적 순간과 시적 사유가 균열되면서 “드디어 총체적이 된다”. 그러니 『타인의 의미』에서 ‘의미’란 결코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이 빈자리를 삭제해선 안 될 것이다. “우리들이 똑같은 모양으로 입술을 벌릴 때/입안에 담은 것과/입술 바깥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모순을 일으킬 때/어느 쪽에도 진실의 발톱은 달려 있”기(「합창단」) 때문이다. 어둠을 가리고 있는 식탁보를 걷고 식탁 밑으로 기어 들어가자. 별 뜻도 딴 뜻도 없이 굴러가는 펜이 앞으로 쓸 글자들을 찾으러. 그 글자들이 존재한 적도, 존재할 리도 없다고 하더라도.

 

_《창비문학블로그》 2010년 11월 발표.

 

 

 

 

 

그늘진 소리들의 세계

장은정

 


시적 언어는 일종의 주문과도 같아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불러들이고 사로잡아서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물리적인 세계에서 시는 종이에 인쇄된 글자들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가 시를 이루는 단어와 문장들을 구체적으로 믿기 시작할 때 이 연약한 글자들은 행과 연을 따라 난 길을 통과하면서 실제보다 더욱 풍부하고 구체적인 상상적 세계를 불러들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시라는 장르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 중 하나라고 생각해 왔다. 한데 시적 언어의 이러한 상상적 가능성에서 시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보다는 시적 언어의 한계까지 스스로를 밀어내면서 경계의 떨림으로 시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시가 있다. 이제니의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에서는 상상적 가능성이 지닌 자유가 도리어 고립으로 간주되고 비극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감지되고 있는 듯하다. 


시집을 여는 첫 시이자 시인의 등단작인 「페루」가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을 살펴보자.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시는 우선 여러 색들을 나열하고 색들의 주체에 대해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는 문장은 모두가 양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양을 가지고 있다는 또 다른 암시를 숨겨두는 방식으로 양의 존재를 감춤으로써 드러낸다. 양은 ‘없을’ 때에만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 시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스스로에게서 한 발자국씩 물러나 있다. 가령,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와 같은 구절은 우리가 이 이미지들의 세계에 몰입하며 완전히 들어서려는 순간, 우리의 발목을 단단히 움켜쥐면서 이 이미지들이 그저 상상으로 지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그러니 연이어 들려오는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는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하는 화자의 상상 속에서 들리는 것이다. 이렇게 이 시는 양갈래의 머리칼들을 교차로 땋아 가는 것처럼 이미지와 이미지의 기원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 자체로 자기 완결성을 지닌 상상력의 세계를 완성할 수도, 상상하는 행위를 중단할 수도 없는 이 틈새 사이에서 진동하는 일이 “반복되는 실패”로, “저주”로 여겨지는 것은. 그러므로 이 시는 “간신히 생각하고 간신히 말한다.”라고 ‘간신히’ 쓴다. “적어도 꽃은 아름답다.”고 쓰는 것으로 멈추지 못하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덧붙이고 마는 것이다. 

 

어째서일까. 무엇이 이 시들을 자꾸만 자기 자신으로부터 물러서게 만드는 것일까. 이 시집에 수록된 많은 시들은 시의 언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요롱이는 말한다」는 바로 그러한 불가능한 영역들을 고스란히 반영함으로써 시적인 효과를 내는 시들 중 하나이다. 제목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듯 이 시의 중심화자는 “요롱이”이다. 한데 이 요롱이가 바라는 것이 의아하다. “나는 정말 요롱이가 되고 싶어요.” 이 바람은 요롱이가 자신이 요롱이로서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이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요롱이’는 오로지 ‘언어로서만’ 존재하고 있으며, 당연하게도 이 언어는 요롱이의 개별적인 존재론적 속성이 남김없이 제거된 벌거벗은 언어다. 그러니 요롱이는 반드시 요롱이일 필요가 없다. 

 

하나의 단어는 다른 단어로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다. “단 한번도 내리지 않은 비처럼 비가 내린다. 눈이 내린다고 써도 무방하다.” 비가 눈으로 바뀐다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 그에 대응하는 변화 또한 발생하진 않는 것이다. 이처럼 벌거벗은 언어에 대한 인식은 많은 시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풍선 풍선 풍선은 이름이 바뀌었는데도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 서운했다.”(「분홍 설탕 코끼리」). “나는 나 자신과도 공통점을 갖지 못한다.” (「편지광 유우」). “어쩌다 우리는 소멸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지상에 집을 짓지 못하고 허공에 매달린 채로 이곳과 저곳 사이에서만 몸을 누이는. 블랭크 블랭크.” (「블랭크 하치」). 이 구절들은 표면적으로 ‘나’라는 자아에 대한 정체성과 관련된 문장들 같지만 그보다는 본질적으로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언어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아프리카』는 오로지 언어로서만 존재하는 슬픔으로, 그럼에도 언어를 벗어던질 수 없는 슬픔으로 글썽거린다. 이 슬픔은 이 시집의 도처에서 발견되는데, 놀라운 것은 이 슬픔이 바로 이제니 시의 언어가 가진 가능성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앞서 언급했던 「요롱이는 말한다」는 굳이 소리 내어 읽지 않고 눈으로만 따라 읽어도 어떤 리듬감을 감지할 수 있다. ‘요롱’이라는 글자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롱이에게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이 벌거벗은 언어를 반복하는 것뿐이다. 그것이 리듬을 만들어낸다.

 

다음의 문장들을 따라 읽어보자. “요롱이는 말한다. 나는 정말 요롱이가 되고 싶어요. 요롱요롱한 어투로 요롱요롱하게.”, “그건 단지 요롱요롱한 세상의 요롱요롱한 틈새를 발견한 요롱요롱한 손가락의 요롱요롱한 피로.”, “가슴속 모음이 가슴에서 눈으로, 눈에서 입으로, 입에서 울음으로 옮겨가는 일을 보는 일은 요롱요롱하다.” 몇 문장만을 옮겨 적었을 뿐인데도 우리는 금방 요롱요롱해진다. 요롱이라는 고유명사가 형용사와 부사로 번져나가면서, ‘요롱이’라는 이름이 종국에는 ‘소리’가 되고 소리는 ‘리듬’이 되는 것이다. 리듬이 환기시키는 요롱요롱한 기분이 무엇인지 콕 짚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귀여운 어감에도 불구하고 그렁그렁한 눈물방울을 연상시키는 리듬이다. 표제시 「아마도 아프리카」는 이 발랄하고도 슬픈 리듬이 가장 시적인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는 시편이다. 

 


코끼리 사자 기린 얼룩말 호랑이
멀리 있는 것들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부를 때
나는 슬픈가 나는 위안이 필요한가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아주 조금
 
호랑이, 그것은 나만의 것
따뜻하고 보드랍고 발톱이 없는 것

살고 있나요 묻는다면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나는 아주 조금 살고 있어요


―「아마도 아프리카」부분

 


물론 시 속에서의 아프리카가 ‘실제’ 아프리카를 지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곳에 살고 있는 “호랑이”는 “따뜻하고 보드랍고 발톱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호명되는 “코끼리 사자 기린 얼룩말 호랑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따뜻한 위로들, 오직 우리를 위한 것이다. 오로지 언어로서만 존재하는 상상적 기표들을 조용히 마음속으로 불러내다가 화자는 금방 알아차린다. “나는 슬픈가 나는 위안이 필요한가”. 조심스레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이어지는 사려 깊은 리듬이 물결처럼 번져나간다.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아주 조금”. 모음 ‘ㅏ’의 소리들이 조용하게 반복되면서 슬픔을, 위안을, 아마도 아주 조금, 아름답게 만든다. 이 시에서 시적 언어들은 ‘의미’보다는 ‘소리’로 존재하면서 세계로부터의 분리가 가져다준 슬픔을 그 자체로 시적인 것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시적 언어의 상상적 가능성에게서 시적 효과를 발견하는 시들은 궁극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것들을 실재하는 것보다 우위에 놓음으로써 시적인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하였다. 하지만 역으로 시적 언어의 한계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하는 이제니의 『아마도 아프리카』는 스스로의 언어를 기어이 실재하는 것 아래에 놓음으로써, 뛰어난 구체성을 획득한 상상적 세계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시적 언어의 슬픔과 외로움을 있는 그대로 감당하고자 한다. 그러니 이 소리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섣불리 환호해서는 안 된다. 이는 세계에 직접적으로 가닿지 못하고 마는 실패의 소리, 고아의 울음소리, 축축하게 그늘진 소리들이기 때문이다. 이 시들에게 소리의 아름다움이란 쉽게 환호하기엔 너무 절박한 존재방식이고 시적 언어가 세계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윤리적 자세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늘의 바깥에서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보다는,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아주 조금, 함께 우는 것. 그것이 이 그늘진 소리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_《창비문학블로그》 2010년 10월호 발표.

 

 

 

자세한 경청

 

장은정

 

 

어떤 시들에게 ‘쓴다’는 것이란 말하는 행위가 아니라 철저히 ‘듣는’ 행위일 수 있음을, 이기인의 두 번째 시집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를 읽으며 알게 되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 흔들리는 눈빛 하나 놓치지 않는 이 섬세한 청각들은 오로지 ‘당신’을 향해 열려 있으니, “혼자서, 납작하게 살아온 당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줄까요”(「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내내 궁리하는 이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함께 ‘당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행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데 이 ‘당신’들은 누구인가? 과일장수, 청소부, 철거민, 외국인 노동자…… 이들을 망설임 없이 사회적 약자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의 통증과 신음소리는 언제나 사회적으로 ‘묵음화’되기에 그들은 과연 “납작하게” 살아온 자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기인의 시들은 “젖은 시집 속으로 부끄러운 몸으로 들어”온 그들을 ‘사회적 약자들’이라고 쿵쿵 소리 나게 못질하며 명명하지 않는다. 소리 없이 “납작하게 살아온” 그들의 진짜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더 작은 발걸음으로, 더 낮게 귀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시집의 조용한 발화들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 한 편의 시가 있다. 

 


먼지를 닦는 청소부의 중얼거림은 두 짝
앞으로 걸어간 걸음은 책상 위에 펼쳐진 의료용 기구를 정리하며 말없이 아프다
뒤쪽으로 돌아간 걸음은 환자들이 떨어뜨린 먼지를 조용히 줍는다
조용히 닳아 없어진 삶의 유혹 때문에 청소부는 매월 삼십 만원을 받으며
책상 위에서 시들어가는 장미의 불안을 본다
매일매일 닦아주는 실내에서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실내화의 슬픔에 발목을 넣는다
청소부는 청진기가 놓인 책상 아래 원장님의 실내화가 정박해 있는 곳으로 떠내려간다
먼지는 그곳으로 와서 매일매일 살림을 차린다
청소부는 나란히 앉아 있는 실내화의 정적이 느릿느릿 다가오는 것이 느릇느릿 무섭다
몸을 숙여서 끌고 가는 실내화의 아픈 발끝으로 그의 새벽 미열이 내려와서 뜨겁다


―「실내화」전문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시가 청소부에 대한 시가 아니라는 점이다. 제목이 잘 일러주고 있듯이 시는 청소부의 실내화에 그 중심을 맞추고 있는데, 특히 실내화의 동선을 그대로 포착하려는 것에 모든 긴장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래서 시의 시점은 언제나 걸음의 위치인 ‘아래’다. 가령 첫 행에서 우리는 “중얼거림”이라는 입술의 위치를 먼저 떠올리지만, 곧이어 그 이미지는 “두 짝”이라는 걸음의 위치로 급하게 하강한다. 그 후부터 시를 주도하는 주어는 “걸음”이기에 “책상 위에 펼쳐진 의료용 기구”에 대해 언급할 때에도 우리는 시의 시점을 따라 책상을 ‘올려다’ 보게 된다. 이 시점은 청소부의 삶이 몸의 위치와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매월 삼십 만원”을 받기 위해 “실내에서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실내화”를 신고 청소부가 가야하는 곳은 바로, “먼지”들이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청소부는 매번 “원장님의 실내화”가 놓여있는 “책상 아래”로 “떠내려”가고, 환자들이 떨어뜨린 “먼지를 조용히 줍”느라 허리를 숙인다. 이 구체적인 시점이 해내는 역할은 사소해보이지만 대단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점을 따라갈 때 우리는 시를 읽으며 ‘청소부’를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청소부가 ‘바라보는 것’을 함께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청소부를 슬픔과 같은 ‘상징’으로 동일시하지 않도록 막아준다. 우리는 시를 따라 스스로 낮게 이동함으로써 “청진기가 놓인 책상”과는 달리 느리고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에도 동참하게 되고, 장미의 아름다움보다는 “시들어가는 장미의 불안”을 느낄 수 있게 되며, 결국은 “실내화의 정적이 느릿느릿 다가오는 것”에 스며있는 두려움까지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시는 이기인의 묘사가 ‘바라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따라 움직이는 것’에 핵심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중얼거림”이라는 목소리가 아니라 바로 “실내화”의 움직임에서 청소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들을 수 있다고 보는 것과 같이 이기인의 많은 시들은 대상 자체보다는 대상과 가장 밀접한 사물에 더 큰 초점을 맞춤으로서 그들을 시적으로 형상화시킨다. 가령 공사장 인부에 대해 쓰기보다는 “공사장 흙먼지 아래로 떨어지는 저 검은 발자국 한 켤레,”에 집중한다거나 철거민들 그 자체보다는 “송곳으로 뚫어서 묶어놓은 명단의 이름”을 바라본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쓰기 보다는 “그 까만 몸이” 손바닥에 낀 “초록색 때수건”에 대해 발화하는 것이다. 역시, 그렇지 않은가. “납작하게 살아온 당신”에 대해 듣기 위해서는 당신을 납작하게 누르고 있는 것부터 써야하는 것이다. 당신을 누르는 힘들은 당신이 사물들의 목적 연관 체계 속에서만 움직이기를 강요하고, 모든 욕망과 발언과 통증들을 억누르면서 스스로를 사물화 시키길 강요한다.  

 

이 시집을 이루는 많은 시편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바로 “싶다”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빈집 앞 아침부터 계속 한자리에 앉아 있던 노인은 의자를 들고 담벼락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공가(空家)」중), “물살 아래로 아래로 퐁당 떨어지고 싶다”(「돌다리」중), “무릎이 다 닳은 빗자루는 그의 육친처럼 벽에 기대고 싶었다/벽에 기대어 마당 쪽으로 툭 쓰러지고 싶었다”(「빗자루 이력서」중), “토란잎 줄기는 휘어져서 땅으로 내려와 쉬고 싶어 죽겠다”(「줄기가 자라는 시간」중) 등등. 이 많은 ‘―싶은’ 마음들은 대부분 ‘휴식’과 연관되어 있고, 그 휴식은 대체로 ‘차라리’ 죽음을 원하는 것에 가까울 만큼 지쳐있다. 

 

한데 이 구절들은 대체로 하나의 시편 안에서 강하게 힘이 실리도록 배치된 것이 아니라, 무심히 놓여있어서 조금만 집중력을 놓치면 스쳐 지나가기 일쑤다. 그것은 이 ‘―싶은’ 마음들이 희미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런 마음마저 억누르는 그 힘이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기인의 시들은 당신을 자꾸만 움켜쥐는 사물들을 쓰면서, 그 사물들의 배후에 억눌린 당신을 듣는다. 이 새로운 시점은 대상을 다르게 보기위해, 새롭게 보기 위해 시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느끼는 그대로 더 자세히 듣기 위해 이동하는 것이 저절로 새로운 시점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한데 놀라운 것은 이 시집 중 가장 아름다운 시들 중 한 편은 상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자신의 몸을 먼저 낮추려는 마음 자체로 이루어진 시라는 점이다. 다음의 시를 전문으로 인용하며 리뷰를 마무리한다.

 

균형을 잃어버린 내가 당신의 어깨를 본다
내일은 소리없이 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나는 초조를 잃어버리고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더 좋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
첫눈이 쌓여서 가는 길이 환하고 넓어질 것 같다
소처럼 미안하게 걸어다니는 일이 이어지지만 끝까지 정든 집으로 몸을 끌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닮아가는 구두짝을 우스꽝스럽게 벗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밤늦게 지붕을 걸어다니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가만히 껴안아줄 수 있을 것 같다
벽에 걸어놓은 옷에서 흘러내리는 주름 같은 말을 알아듣고
벗어놓은 양말에 뭉쳐진 검은 언어를 잘 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매트리스에서 튀어나오지 않은 삐걱삐걱 고백을 오늘밤에는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요구하지 않았지만 당신의 어깨는 초라한 편지를 쓰는 불빛을 걱정하다가
아득한 절벽에 놓인 방의 열쇠를 나에게 주었다
자기중심을 잃어버린 별들이 옥상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본다
뒤척이는 불빛이 나비처럼 긴 밤을 간다


―「어깨 위로 떨어지는 사소한 편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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