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약속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직장인의 리듬을 기준 삼아 판단한다면 이 공연은 다음날을 위해 충분히 휴식하는 시간에 열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관람객은 흔히 ‘나인 투 식스’ 생활에서 귀가를 준비하는 시간에 반대로 외출을 준비한다. 이때 관람객과 퍼포머의 활동은 잠들 때에야 시작되는 노동자들의 일과를 닮았다. 저녁에 교대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늦은 밤 ‘콜’을 기다리는 대리운전 기사, 아침까지 물류창고에 도착해서 물품을 배달해야 하는 트럭운전 기사, 잠에서 깨어나 현관문을 열어보면 도착해 있는 새벽배송 택배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나인 투 식스’ 리듬에 최적화된 소비자들에게 최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많은 이들이 예술을 하는 이들은 밤에 깨어 작업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런 경우는 많지만, 작업 시간이 아니라 공연 시간이 밤인 경우는 드물다. 당신이 새벽 3시에서 4시까지 상연되는 공연을 추천 받았다면, 이 공연 관람을 쉽게 결정할 수 있을까?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대중교통이 다니지 않는 시간이니까. 사는 곳이 공연 장소로부터 가깝지 않다면 스스로 운전을 하거나 택시를 이용해야겠지만 이를 선택하기 어렵다면 대중교통으로 미리 이동하여 공연 시간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즉 이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굉장히 큰 품이 든다. 그럼에도 이 공연의 관람을 마친 이들은 총 54장의 기록을 남겨주었다. 이 글은 나 역시 이 공연을 위해 근처 호텔을 예약하고 택시를 통해 오가며 한 시간의 공연을 보기 위해 거의 하루를 할애하여 겪은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잠들지 않기

 

공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강북구 인수봉로 301에 위치한 공간은 꿈 세계와 현실 세계의 교차점으로 설정된다. 퍼포머는 이곳에서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약속 시간과 장소에 맞춰 도착한 관객은 어두운 밤 골목에 통유리 안으로 흰 침대가 마련된 하나의 하얀 방을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된다. 그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채널헤드’로 명명된다. 채널헤드에게 공연의 규칙을 알려주는 안내문들이 있고 채널헤드는 그 규칙에 동참하면서 공연을 관람 및 생성해 나간다. 퍼포머는 공연을 진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을  일관되게 이행하지만, 공연이 있는 날의 날씨나 시간, 채널헤드의 적극성 정도에 따라 공연은 매번 다른 사건일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무대 위에서 엄격히 통제되는 반복성과는 달리 ‘강북구 인수봉로 301’의 주변을 걸으면서 상연 및 구성되는 공연은 그 가변성과 우연성이 깊게 관여하며 퍼포머는 그 요소들을 마음껏 활용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이 공연의 중요한 키워드들은 대체로 밤과 꿈, 잠을 테마로 삼지만 이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반대로 생생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퍼포머의 빠른 이동 속도를 놓치지 않고 잘 좇아가야 하며, 본 공연에서 제시된 여러 원칙들을 빠르게 이해하고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하며, 헤드폰을 통해 들리는 소리들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하고, 불쑥불쑥 예기치 못하게 생겨나는 사건들에 대해서도 초연해야 한다. 나의 경우, 심한 비바람이 몰아쳐서 잠시 옆에 세워둔 우산이 뒤집어지고 굴러다녀도 웃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즉 이 공연이 주요하게 다루는 밤과 꿈, 잠이라는 키워드가 공연 속에서 상연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고도의 의식 상태, ‘이것은 공연이다’라는 메타 인지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 낙차부터 짚어야겠다. 꿈꾸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깨어있기. 

 


‘들리는’ 것과 ‘듣는’ 것


문학은 흔히 ‘읽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의 문학 작품이 ‘책’이라는 매체에 인쇄된 경우, 책을 읽는 자세는 일정한 제약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걷거나 뛰면서 책을 읽는 것은 일종의 훈련이 필요하다. 책이라는 매체 자체가 글자를 인쇄한 종이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묶은 것이기에 그 중심점을 기준으로 페이지들을 펼치거나 넘기는 행위를 요구한다. 그런 이유로 비장애인이 페이지를 펼치거나 넘기기에 훨씬 수월한 자세는 대체로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기대는 등의 정적인 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이인환각연쇄고리에서 텍스트란 ‘읽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 이때 ‘듣는’ 것은 ‘들리는’ 것들과 뒤섞인다. 미술관에서 헤드폰을 쓰고 작품에 결합되어 있는 소리를 듣는 것과 다른 점이 그것이다. 전시공간에서 사운드란 그것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다른 소리들을 적극적으로 배제하도록 모든 조건이 최적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인환각연쇄고리는 헤드폰으로 미리 마련된 사운드를 듣는다고 한들, 헤드폰이 막아줄 수 없는 외부의 소리들이 스며들도록 내버려둔다.


전시공간이 아니라 공연이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장소를 거점으로 그 주변의 생활공간에게서 발생하는 소리들이 이미 디자인된 소리들과 뒤섞이는 것. 이는 관람객에게 ‘들리는’ 것과 ‘듣는’ 것을 쉽게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러니 이 공연에서 귀를 통해 듣게 되는 소리들의 의미를 중요하게 분석하는 일이 사건의 핵심은 아닐 것이다. 작가들이 각자의 이름으로 한편의 글(그것을 시 혹은 에세이, 소설 무엇으로 불러도 무관하다)을 작성한다. 그리고 작가들이 자신이 쓴 것을 읽은 후에 그 읽는 소리를 녹음한다. 사운드 디자이너는 그 소리를 다시 자신의 방식으로 수정한다. 때로는 잡음이 들어가고 효과음들이 배치되기도 하며 의도적으로 발음을 뭉개어서 소리들이 의미화 되는 것에 저항하기도 하면서 재구성된다. 그렇게 녹음된 소리들은 시디에 담기고 소형 냉장고에 보관되며, 채널헤드들은 그 냉장고에서 자신이 무엇을 들을지 고른다. 퍼포머는 그 시디에 담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특정한 장소로 관객을 안내한다. 관객은 그곳에서 헤드폰으로 자신이 고른 시디에 녹음된 것을 듣는다. 그리고 처음의 장소로 되돌아오면서 공연은 끝난다.

 


듣는 자세


공연의 동선을 위와 같이 간략히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듣기 위해서 동원되는 준비 행위는 짐짓 경건하기까지 하다. 냉장고에 담긴 시디는 소리들이 마치 식품처럼 쉽게 상할 수 있는 것을 특별히 차갑게 보존하는 듯하고, 그것을 바로 꺼내서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반드시 정해진 특정한 장소에서만 들을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다. 즉, 이인환각연쇄고리의 핵심은 무언가를 듣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조건과 장치들을 배치하고 마침내 관객에게 무언가를 들려준 후에 그것을 제자리에 놓는 행위까지를 모두 포괄한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공들여서 들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도 대중교통이 모두 끊어진 시간, 혹은 나인투식스의 노동자들이 곤히 잠든/잠들어야 시간, 반드시 그 시간에 ‘강북구 인수봉로 301’의 정해진 장소들을 돌면서 이 소리들을 왜 들어야 하는가? 


사실 작가들이 쓴 것을 ‘듣는’ 행위 자체는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이미 수많은 연대현장에서 문학은 오랜 시간, 소리 내어 읽고 듣는 낭독의 기본적인 대본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젠트리피케이션 현장에서 임차인이 처한 부당함을 알리고자 작가들은 모여서 쓴 것을 읽거나 듣기를 반복해왔다. 그리고 바로 그 장소, 그 시간에서만 텍스트가 발휘하는 잠재성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에 의해 목숨을 잃은 이들을 기억하는 취지로 진행 중인 304 낭독회는 코로나 시대를 맞이해 각자 가진 기기를 통해 줌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전시공간에서 사운드가 적극적인 재료로 활용됨에 따라 텍스트를 사진으로 쉽게 가져갈 수 없도록 직접 필사하거나 소리 내어 녹음해서만 작품을 소유할 수 있도록 기획된 재미공작소의 전시가 거듭된 지도 몇 해가 되었다. 그러니 이 모든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어째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들어야만 하는가?

 


대답 없이


단순하게 말한다면 이인환각연쇄고리는 연대 현장으로서의 낭독회와 전시의 재료로서의 사운드를 생활공간으로 더욱 확장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공연은 금방 철거될 위험을 가진 약자의 거주권을 지키기 위한 장소도 아니고, 어디서나 들고 다니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의 활동범위를 한 번에 압축하는 전시 공간도 아니다. 이 소리들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상연된다. 우리가 길을 걸으며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을 때 곁을 무심히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차의 경적 소리 속에서도 묵묵히 음악에 집중할 수 있듯이 말이다. 다만 차이점은 반드시 퍼포머가 있어야 한다는 점과 그 소리를 들을 때만큼은 걷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듣기 위해서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경청해야만 한다. 서 있는 채로의 정지 상태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생활공간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상한 모습이다. 이것은 ‘목격’된다.


실제로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한 주민이 뭐하는 것이냐고 항의를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퍼포머와 관객은 항의에 응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은 공연 중이니까 말이다. 예술이 상연되도록 허락된 공간에서는 ‘관람’과 ‘낭독’이라는 행위는 그 공간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합의한 규범에 따르고 있어서 매우 자연스러운 행동이지만,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생활공간에서 같은 행동을 재현하면 그것은 너무나 의심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만약 벤치에 앉아서 듣는다면 그건 그렇게 수상해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건 생활공간의 규범에 수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 알 수 없는 두 사람이 특정한 장소에 특정한 시간에 규칙적으로 반복하여 등장해서 가만히 서 있다가 사라진다면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게다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는다. 즉 그 장소의 주민들에겐 관객에게 일어나는 것과 정반대의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

 


연기하는 자

 

요컨대 이 공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퍼포머가 설계한 동선을 이 장소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관점에서 완전히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쉽게 오지 않는 저수지 같은 곳은 오히려 진부하다. 그곳은 이미 생활공간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전시 공간 혹은 철거가 예정된 투쟁의 공간과 유사하다. 그러나 주택들이 밀집한 어느 골목길의 가로등 아래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가만히 있는 행동을 반복한다면 그것은 매우 이상한 일처럼 보인다. 관객은 물론 공연에 참여하고 있다. 관객은 자신에게 주어진 규칙을 따르고 있으며 성실하게 공연을 관람/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것은 낯선 모습이다. 


이때 관객은 배우가 된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퍼포먼스의 규약을 따르는 일이 낯선 이들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견디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향유자가 퍼포머와 구분되지 않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예술가와 향유자의 관계가 아니라 그 관계가 빚어내는 견고한 신뢰 관계가 다시 누군가에게 목격된다. 즉 이웃 주민들의 의구심 어린 관심이야말로 이 공연의 핵심이다. 우연히 발견한 이들을 유심히 ‘보는’ 순간, 자신에게 보이는 것이 규칙적으로 ‘출현’한다는 것을 깨달은 그 장소의 거주인은 이 공연의 초대하지 않은 관객이 된다. 이것이 공연인지 모르는 관객, 동시에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것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관객이다. 그러나 퍼포머도 관객도 이러한 노력에 응답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지금은 공연 중’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의문

 

나는 이 글을 퍼포머의 관점에서도, 향유자의 관점에서도 쓰지 않았다. 그 장소에서 거주하고 있는 자들의 관점에서 다루고자 했다. 그 장소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이 공연은 가볍게는 이상한 것, 진지하게는 공포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게다가 채널헤드는 자신이 이상하고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다. 왜일까? 나 역시 비바람이 몰아치는 우산 속에서 헤드폰을 쓰고 디자인된 사운드를 듣고 있을 때, 비옷을 입은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견주가 우리를 낯선 눈으로 쳐다봐도 어떤 설명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헤드폰으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사실상 이 공연에서 채널헤드는 낯선 이를 만났을 때 그들이 이 공연의 설계에 해당하는 요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그것에 대한 반응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것은 우리가 향유하는 예술이 우리의 사회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채널헤드는 집중한다. 작가들이 책상에서 쓰고, 직접 읽어서 녹음되었으며, 사운드 디자이너에 의해 정교하게 다시 만들어진 작품을 헤드폰을 통해 향유하고 있으며, 이 향유를 위해 평소에 잘 이동하지 않는 시간에 큰 에너지를 들여 공연에 몰입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깨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관객은 그 순간에 선택할 수 있다. 나에게는 공연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이상해보일 뿐 아니라 심지어 공포스러운 것으로 보이는 이 상황에 대해 누군가 용기를 내어 질문하는 상황이 펼쳐진다면 이것은 위험한 것이 아니니 안심해도 된다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예술의 규약에 ‘훈련된’ 향유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술에 익숙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는 이인환각연쇄고리의 관람을 마치고 나를 수상하게 바라보는 한 거주인의 눈빛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그 눈빛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예술을 향해 보여주는 익숙한 표정이 아닌지, 그리고 그 표정에 대해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음으로서 하나의 의문이 되고, 그 의문에 대해 무엇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는 관객들의 선택이야말로 현재 우리의 예술이 아닌지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이것의 옳고 그름에 대해 논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다만 이 ‘응답 없음’의 상태가 무엇을 뜻하는지 같이 고민해보고 싶을 뿐이다. 모든 이동이 끝나고 ‘강북구 인수봉로 301’로 돌아왔을 때, 어째서 내게 주어진 질문지에 ‘자물쇠’라고 적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정교하게 설계된 작품의 규약을 성실하게 따르는 것이 초대하지 않은 관객에게 수상한 의문이 되는 일이 갖는 가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지. 

 

2022.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