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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3.03.01
- 의문, 대답 없이1 2022.12.02
어떤 희망도 없는 사람이 글을 써도 될까? 이미 세상은 절망과 패배감으로 가득한데 이에 맞서기는커녕 동조하며 가담하는 글이 더 필요할까? 내게 주어진 청탁 주제가 ‘비평을 읽지 않는 시대’임에도 글쓰기의 자격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글을 시작한 이유는 설령 아무도 읽지 않는다 해도 쓰겠다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오래 곱씹어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비평을 읽는 것일까?’ 이처럼 쉬이 손에 잡히는 것이 없는 질문은 사람을 소진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나를 무한정 확장되는 세계에 막막히 내버려 두기 보다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으로나마 한정하기 위해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그 글은 무가치한 것일까?’ 쪽으로 어느 순간 미묘하게 질문의 방향을 틀었던 것 같다.
여기에는 경쟁시스템으로 모든 질서가 대체된 각자도생의 사회에 던져진 한 사람이 열악한 삶의 조건들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그 가치를 쉽게 폄하하지 않고 나의 언어로 직접 설명해 내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 유치하지만 비장하게 서려 있었다. 시를 읽는 마음이 그러했다. 비평만큼이나 누가 읽는지 알 수 없을 시를 읽고 있노라면 나라도 항변하지 않으면 끝내 어떤 가치가 소진되는 것만 같았고(물론 그건 착각이었지만) 적어도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도는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시 비평’의 독자는 언제나 ‘덤’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진정으로 믿는 것을 쓴다면 그것을 반드시 읽어주는/필요로 하는 독자는 있으리라고, 그것이 소수라고 한들 그 숫자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세상과 마찬가지로 함부로 폄하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시와 비평을 이어주던 확고한 끈이 끊어졌다. 내게 문학평론가란 비평적 대상이자 근거를 문학으로 여기는 사람을 뜻했고 나는 더 이상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읽은 문학평론가들은 네가 말하는 ‘문학’은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질문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문학평론가들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비평’을 규정할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나 2020년을 기점으로 나에게 중요한 질문의 주어는 더 이상 문학이 아니었고 그 자리를 ‘비평’이 대신했다. 이젠 문학이 무엇인지 답하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비평에 대해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타인에게 충분히 설명할 수 없었다.
문학평론가들은 말할 것이다. ‘문학’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하는 대상이므로 네가 문학을 무엇으로 간주하고 있더라도 그것을 고정된 것으로 사유하고 안과 밖의 경계를 기반으로 하는 한 이미 문학에 대한 질문/사유/실천이 아니라고. 나는 그러한 반문 자체가 문학평론가들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고 더 나아가 그런 질문이 그들 자신을 이루는 중요한 구성된 일부임을 이해한다. 그러나 적어도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문학평론가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주제들이 사실은 도무지 자신과 무슨 상관인지 그 실감을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사람도 존재하지 않은가?
*
바로 그 지점에서 내게 ‘비평’은 다르게 시작되었다. 문학을 전공하고 문학잡지에 평문을 싣고 문학 연구자로서 살아가며 이런 일에서 자기 삶이 갖는 가치를 경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 문학이란 존재는 학창 시절에 잠시 배웠던 까마득한 과목 중 하나인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비평을 읽지 않는 시대’라는 주제는 참으로 안성맞춤이다. 첫째, 도대체 누가 비평을 읽는지 되풀이해서 묻거나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한들 써나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곱씹는 일을 그만두고 둘째, 작은 규모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존속하고 있는 비평 제도의 한계나 의의를 규명하려는 일도 잠시 중단한 채 셋째, 삶을 살아가며 결국엔 얹게 되는 이런저런 말과 행동들이 비평적 행위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식의 (비평의) ‘말’ 역시 상대화하는 과정 속에서야 비로소 열리는 것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최근 나는 ‘연대 실패’라는 제목의 비평을 발표했다.(링크) 한국 사회의 발전주의는 가족 단위를 중심으로 복지 정책이 구성되었으므로 기본적인 최소한의 생계도 어려워 벼랑에 내몰린 사람들이나 끝내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 연대가 부족한 ‘연대 실패’의 사회이므로 지금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읽기와 쓰기에 앞서 ‘듣기’라는 주장을 담았다.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후마니타스, 2021)를 주된 텍스트로 삼은 이 글을 보고 문학평론가들은 이 책에 실린 쪽방촌 사람들의 ‘말’이 결코 ‘문학’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하리라. 그러나 나는 쪽방촌 사람들의 말을 ‘문학’이라는 단어와 다시 관계 맺기를 요구하는 일이 과연 누구에게 중요한 일인지 묻고 싶다.
언젠가부터 우리의 여가 시간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간으로 대치되었다. 각자의 관심사(?)로 수백만 갈래 찢어진 알고리즘의 시대에 보다 더 면밀하게 읽는 행위가 우리의 연결을 더 희박하게 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작품 속으로 완전히 침잠하여 그 안에서 타인이 미처 읽어내지 못한 무언가를 다르게 건져내려는 일을 경계하게 된 것은 그러한 몰입이야말로 콘텐츠 플랫폼을 작동시키는 근본 원리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 아닌지 질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학비평’이라는 단어에서 ‘문학’을 대신하여 건축, 만화, 무용, 미술, 사진, 연극, 영화, 음악(이 나열은 가나다순을 따른다)……을 넣는다고 한들 마찬가지다. 나에게 중요한 것이 나에게‘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괄호에 넣은 후에 작업을 시작한다면 내가 속한 알고리즘 배열 자체를 어떻게 비평적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나에게 중요한 것이 어떤 타인에게는 무가치한 것일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비평에서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관심사를 중심으로 두었을 때 어떤 접점도 없는 타인과 어떻게 만나야 할지 고민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때의 비평은 치밀한 논리를 꼼꼼히 쌓아가며 누군가를 설득하는 자기주장의 글쓰기가 아니라 우리의 다름을 기반으로 어떻게 타인에게 말을 걸 수 있는지 고민하는 일이 된다. 하지만 이런 논리라면 나의 비평적 정의 또한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콘텐츠 플랫폼의 알고리즘 시스템이 각자의 관심사 속에서 서로를 고립시킨다고 판단하고 작품을 경유하지 않은 비평을 상상하고 실천하려는 일은 마찬가지로 ‘나에게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이런 일은 혼자서 노력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
작년 연말에 한통의 메일을 받았다. 스스로를 ‘비평 콜렉티브’라고 소개하는 ‘누워있기 협동조합’으로부터 대안적 신춘문예로서 기획된 〈장판문예〉의 후기위원으로 함께 작업하길 원한다는 기획안과 후기 청탁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처음에 청탁 받을 때는 평론 분야를 의뢰받았으나 만화평론 한 편 이외에는 응모되지 않아서 시 분야로 옮기게 됐다. 최종적으로 〈장판문예〉에 자신이 쓴 시를 보낸 사람은 총 38명, 소설은 22명이었지만 평론 부문에서는 만화 평론 한 편이 전부였다는 사실, 즉 문학평론은 단 한편도 없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현재 문학비평을 쓰는 사람들에게 ‘대안적’ 신춘문예라는 기획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해도 될까?
사실상 〈장판문예〉에서 가장 핵심적인 기획이라 할 수 있을 ‘후기’ 코너는 신춘문예의 심사평에 대한 비평적 개입이다. ‘후기위원’이라는 호명은 ‘심사위원’의 대체이며, 이러한 기획은 후기위원들에게 심사평과 후기가 어떻게 다른가 하는 질문에 대해 각자 답하기를 요구한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후기를 맡은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자신이 맡은 작품을 쓴 작가를 수신인으로 명확히 설정하고 후기를 써내려갔다는 점이다. 마치 후기를 작가만이 볼 것처럼. 작가만이 유독 중요한 독자인 것처럼. 나는 〈장판문예〉를 통해 비평을 쓰는 이들에게도 비평 독자의 자리는 좀처럼 상상되기 어렵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작가 이외에 독자의 자리를 남겨두지 않는 비평을 과연 누가 읽을 것인가.
기존 제도에 대한 활발한 비판 속에서 ‘새로운’ 문예지라거나 문예지의 ‘혁신’을 외쳤던 시기가 과연 있었는지 아득할 정도로 여러 비평 매체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비평적 개입을 읽어내고 그 읽기에 어떤 말을 보탤 것인지 고민하는 이들이 점차 줄어든다고 느낀다. 안정된 지면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으니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평론가들이 금방 사라지기 일쑤다. 작품 한편 한편을 읽어내는 면밀함이 깊어지는 것만큼이나 작품과 비평을 둘러싼 진입 장벽과 한계 지점을 동시에 읽어내고 그에 다르게 응답할 수 있는 영역이 필요하지만, 다르게 발을 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도 날이 갈수록 무너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이것이 다만 비평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
적어도 어떤 시들에 대해서는 들을 만한 이야기를 내놓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비평을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누가 읽는지 알 수 없어져서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이 모든 일들이 무슨 뜻일까 묻기 시작했고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스스로 할 말이 생겼을 즈음, 누가 읽는지 모르는 글을 계속 써나가는 일이 스스로 의미가 있다고 믿는 일에 불과하다면 계속 써도 될지 확신할 수 없어졌다. 글을 열며 물었다. 어떤 희망도 없는 사람이 글을 써도 될까? 이미 세상은 절망과 패배감으로 가득한데 이에 맞서기는커녕 동조하며 가담하는 글이 더 필요할까? 내게 남은 질문들은 겨우 이런 것이다.
오래 일했던 탓인지 그만둔 후에도 종종 청탁 전화나 메일이 오곤 했다. 최근 첫 시집들의 경향을 짚어달라든지 팬데믹 이후 문학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야말로 ‘문학평론’의 작업이었고, 그때마다 “더 이상 문학평론을 쓰지 않습니다.”라고 또박또박 쓰거나 말하면서 회신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무슨 대단한 사명감 없이는 일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지만 생계를 위해 수많은 부업을 더 이상 동시에 감당할 육체적/정신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임을 덧붙여 두고 싶다. 지금 이 지면은 문학평론이 아니라 오롯이 ‘비평’을 위해 주어진 드물고 소중한 기회이기에 적게나마 남아있는 비평 독자들을 향해 쓴다.
최근 읽은 기사에 따르면 서울에서만 13만 명의 청년이 6개월 넘게 외출하지 않는다고 한다. 전국 기준으로는 61만 명가량이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들 중 10대부터 30대의 가장 높은 사망 원인은 자살이고, 지난해 우리 사회에서 산업재해로 사망한 사람은 2,223명이다. 매일 이런 기사를 읽고 보면서도 누군가를 보호하려는 변화의 움직임보다 경쟁만이 더 심화되는 ‘연대 실패’의 잔혹한 사회에서 비평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지금 우리의 사회는 읽고 쓰는 것보다 듣고 말하는 일이 더욱 절실하다고 쓴 적이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매일 삶을 그만두기로 결정하는 이들을 돌려세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저 너에게나 중요한 것에 혼자 파묻히지 않도록 더욱 귀 기울일 수밖에. 내 삶도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워 어쩔 줄 모르면서 말이다.
기획회의 2023년 6월호 수록
장은정 / 비평가. riyuni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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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부터 시작된 두통이 일요일까지 계속 괴롭혔다. 꼼짝없이 누워서 진통제를 종류별로 4시간 마다 먹어보았다. 어떤 약에서도 효과는 없었다. 그냥 죽은 것처럼 그렇게 그냥 가만히. 너무 괴로워서 결국 취침약을 두번 먹고서야 나가떨어졌다. 자고 일어나보니 비가 그쳤고 두통도 멎었다. 그 정도 두통은 보통 3-4일을 가는데 이번에는 그래도 짧게 겪은 셈이다. 제목에 '여름'이 들어간 시집들 챙겨서 작업하러 왔다. 오늘은 논문 아니고 원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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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절반이 지나갔다. 어제는 선행연구를 (원고지 기준) 25매 정도 썼는데, 읽은 내용은 그보다 많은데 왜 진도가 나가질 않는 것인지 고민하다가 글의 서두 구조 자체를 잘못 잡아서 그런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걸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6시간 가까이 작업한 상태여서 더 욕심내지 않고 오늘 챙겨야하는 자료들 리스트를 꾸린 후에 첫 운동을 하러 갔다.
킥복싱을 배우는 것은 처음이다. 글러브도 샌드백도 낯설다. 무엇보다 '위험'으로 감지되는 것이 '공격'이라는 것은 더욱 낯설다. 그동안 해왔던 스포츠들에게서 대체로 위험으로 인지되는 1순위는 '부상'이었다. 예를 들면 스노우보드를 타다가 넘어질 때 엉덩이 쪽으로 넘어져서 머리를 보호한다거나, 프리 다이빙을 할 때 내려가는 숨에 가진 숨을 다 써서는 안된다는 것, 해류에 휘말리거나 응급 상황에서 도와줄 버디와 함께 다이빙을 한다거나, 스케이트 보드를 탈 때 넘어지면 무릎이나 팔꿈치, 손바닥이 땅에 쓸리지 않도록 보호장비를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거나.
그런데 어제 첫 수업이라 복싱의 가장 기초적인 자세를 배울 때, 자세를 교정해주시면서 관장님이 말했다. "지금 자세는 얼굴이 공격에 완전히 노출됩니다. 아주 위험해요." 스포츠를 하면서 '부상' 때문이 아니라 '공격'이 가장 위험하다고 지도를 받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실내에서 하는 스포츠니까 야외스포츠보다 더 위험한 부상에 노출될 가능성은 낮다. 더 위험한 것은 상대의 공격이다. 배운대로 정자세를 취한 상태로 정면의 거울을 보니 글러브를 낀 양쪽 주먹 위로 내 눈만 빼꼼히 보였다. 내 주먹 뒤로 내가 숨는 느낌이라니. 역시 낯설다.
의외로 다른 동작들은 기존에 배웠던 스포츠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어떤 스포츠든 무릎과 허리 어깨가 함께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수업 내내 땀을 정말 많이 흘렸다. 얼굴에서 난 땀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내가 다니는 곳은 간단한 헬스기구들도 있어서 추가적으로 더 운동할 수 있었지만 처음 상담을 받았을 때 하루 체력의 매번 최고치를 다 채우려고 하지말고 운동 나오는 빈도를 올리는 것에 더 집중하자고 하셔서 수업만 받고 나왔다. 샤워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문득 한달에 두번 정도는 일일 수영을 추가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는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많이 뒤척이느라 필요시 약을 너무 많이 먹었다. 그러면서도 깊이 잠들진 못해서 계속 뒤척였고 잠을 잘 못 자서 그런지 아침에 일어나서도 두통이 남아있었다. 근육통은 전혀 없다. 어제 운동량은 무리한 상태는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잠을 왜 이렇게 못 잤지. 출근해서 커피를 마시며 일기를 쓴다. 오늘은 어제 쓰다만 부분부터 이어서 쓰고, 7월 말에 있을 발표를 준비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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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면 제일 먼저 일기를 쓰고 작업을 해보려고 한다. 오늘은 잠에서 깨고 보니 새벽 6시였다. 너무 배고파서 깬 것 같다. 어제 한끼 밖에 안 먹었고 저녁에도 당근 한개 먹은게 전부여서. 그런데 새벽에 깨고 나서도 별달리 간단히 먹을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아직 잠에 취한 상태였고 그대로 더 자고 싶어서 고민하다가 사놓고는 얼마 먹지 않고 방치중인 다이어트환? 같은 것을 한포 먹었다. 허기를 일시적으로 못 느끼게 해주지 않을까, 하고선 다시 잠이 들었다. 한숨 더 자고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가족들이 아침을 먹고 있어서 나도 뒤늦게 앉아서 아침을 먹었다. 그러고나니 다시 졸음이 밀려왔다. 침대에 쓰러져서 또 잠들었는데 온몸이 덜덜 떨리고 심각한 불안 상태로 깼다. 아침에 이런 경우는 거의 없는데.
어제는 잠들기 전 내가 복용 중인 약들을 찾아봤다. 파록스정. 쿠에타핀정. 스리반정. 졸피신정. 이상작용의 경우를 꼼꼼히 읽었다. 졸피신정의 이상작용.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에서의 다른 행위를 포함한 복합 수면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 환자는 복합 수면 행동 중에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다른 사람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다. 이러한 부상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다른 복합 수면 행동(예. 음식 준비 및 먹기, 전화하기, 성관계)이 보고되었다. 환자들은 이러한 사건을 대체로 기억하지 못한다." (경고) "환자가 복합 수면 행동을 경험하는 경우 이 약 투여를 즉시 중단한다."고 되어 있었다. 2년 가까이 복합 수면 행동을 경험 중이고 이걸 계속 말해왔는데도 왜 선생님은 계속 약을 주셨던 것일까?
버스를 타고 작업실로 나오는 길에서야 아침에 덜덜 떨렸던 것이 다이어트 환 때문이라는 것에 생각이 닿았다. 그 약의 초기 반응 중 하나가 불안이었던 것 같고 무심결에 또 먹지 않도록 그 환들은 모두 처분하기로. 오늘은 10편 가량의 소논문을 챙겨왔다. 이미 읽은 것들이다. 내 방식대로 요약할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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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2022년 4월 7일, 일본어로 번역된 「날짜-거점」이 수록된 《분게이》가 일본 전국의 서점에 배포된 후, 한국어로 된 원고를 읽고 싶다는 독자들의 요청을 받았다. 처음엔 포스타입과 같은 플랫폼을 통해 유료로 원고를 유통할 계획도 염두에 두었으나, 이 글이 일본의 문학잡지에 실려 일본에 거주 중인 독자들에게 우선 도달한 특수한 위치성을 한국 독자들에게도 유의미하게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 과정에서 현재 도쿄에서 거주하며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 중인 조혜수와의 협업을 구상하게 되었다. 협업을 요청하며 전송한 청탁서는 다음과 같다.
조혜수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인터뷰-비평 원고를 청탁 드립니다.
본 원고는 장은정 비평가의 「날짜-거점」에서 거론된 동일한 날짜에 조혜수 선생님의 사적/공적 시간이 어떻게 경험되었는지, 그리고 그 경험을 어떻게 언어화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구성되는 비평적 대화를 독자들에게 제안하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사각 출판은 비평적 행위를 ‘평문 쓰기’에 제한하여 사유하지 않고, 서로 다른 삶들이 갖는 차이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대화 공간을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본 인터뷰-비평 원고는 2022년 6월경 『침투』(사각, 2021)의 열세 번째 글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이에 다음의 내용을 청탁 드립니다.
원고명 조혜수, 「거점-이동」
마감날짜 5월 31일
원고료 50만원
고료 입금예정일 6월 1일
2022년 5월 6일
사각 출판사 드림
「날짜-거점」은 특정한 내용을 주장하는 글이라기보다는(만일 이 글이 주장하는 바가 있다면 단 하나, “우리는 다른 삶을 살아 왔다”는 문장이 전부일 것이다), 달력에 표기되는 ‘날짜’라는 조건을 임시적으로 ‘점거’하고 그 시간에 머물렀던 서로 다른 경험들에 대해 들려주기를 독자들에게 요청하는 ‘기획’에 가깝다. 어떻게 하면 글쓰기가 저자의 자기 주장이 아니라 사유 구조에 대한 제안이 될 수 있을까? 이는 내가 한반도 거주자로서, 일본에 거주 중인 독자들에게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아왔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글이 될 수 있도록 고민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다음의 대화는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분게이를 사러 가는 길
제작. 조혜수
「거점-이동」
묻는 이. 장은정
답하는 이. 조혜수
[허브]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 큐레이터 조혜수라고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써내지 못해서 원고로 쓰려던 것을 인터뷰로 대체하게 되었죠. 자기 소개를 한다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거점을 정하는 행위 아니겠어요.
《분게이》에 실린 「날짜, 거점」을 처음 완독하고 나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이 사실을 알고 계실지 모르겠는데 《분게이》에 발표된 글의 제목에는 ‘요미가나(読み仮名)’가 달려 있습니다. 일본어는 한자로 단어를 쓴 뒤 그 위에 그것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에 대한 표기인 요미가나를 달 수 있거든요. 요미가나의 재미있는 점은, 그 한자가 실제로 발음 되는 읽기 방식과 전혀 다른 단어를 붙여 그렇게 읽도록 유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예를 들어서 《분게이》에 발표된 글의 「거점」이라는 단어 위에는 ‘허브’라는 단어가 쓰여 있습니다. ‘거점’을 한자로 쓴 후, 그 위에 일본어의 고유 글자인 가타카나를 사용하여 ‘허브’라고 쓴 거죠.
활동이 되는 중심지라는 뜻이에요. 의미상으로는 거점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번역이지만, 한자와 영어를 동시에 두고 보았을 때는 반대의 이미지가 연상되죠. 거점拠点/據點이 ‘근거가 되는 점’이라는 의미인 반면, 허브는 ‘The central part of a wheel’, 즉 중심이 되는 바퀴 축이라는 의미입니다. 둘 다 고정되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후자는 하필이면 바퀴인 탓에 매우 동적으로 감각되지요. 거점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충분히 번역이 가능한데도 번역가는 왜 허브라는 읽기 방식을 제시했는가? 이것은 저와 마찬가지로 번역가도 글 안에서 드러나는 어떠한 움직임에 이끌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분게이》에 실린 기존의 글이 반점을 사용하고 있는 반면, 제 브이로그에서는 이 프로젝트가 「날짜―거점」으로 표기되고 있어요. 그것은 무수한 점과도 같은 날짜들로 이루어지는 연속성, 그리고 다른 땅에서 같은 제목으로 글을 쓰는 나의 위치성을 떠올리는 동안 정착하게 된 표기입니다. 그래서 번역가 선생님의 ‘허브’라는 (무)의식적 선택에서 저는 거점이라는 단어를 향한 우리의 연결감-대화를 감지합니다.
[스몰토크]
2022년 4월은 어떤 시간이었나요?
제게 올해 4월의 감각은 연장된 3월입니다. 한국의 대선이 끝나고 딱히 할 만한 거짓말이 없는 만우절을 지나면서 4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윤석열이 당선된 뒤로 일본에서 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떤 질문인가요?
가령 3월에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아트페어에 업무상 갈 일이 있었고, 그때도 제가 한국인이라는 걸 상대가 아는 순간에는 늘 질문을 받았죠. “한국 정권이 바뀌었는데, 앞으로의 미술시장에 어떤 영향이 있을까요?” 같은 질문이요. 그들 나름은 제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시작하는 ‘스몰토크’였지만 제게는 너무 거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스몰토크가 아니라 거대 담론인데요.
그렇지요. 그것은 저에게 단순히 문화예술의 지원이 얼마나 많아지고 적어지냐 정도의 문제는 아니지요. 한일 관계는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해석과 반응이 민감하게 달라질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이럴 때 저는 항상 섬세하게 단어를 고르게 됩니다. 하지만 짧은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질문은 연달아 이어집니다. 스몰토크에서 생기는 1초의 침묵은 매우 길다는 건 잘 아실 겁니다. 아주 잠깐 생각했을 뿐인데 또 다른 질문이 이어지죠. “바뀐 정권은 친일(新日)이던가요?” 라고 하더군요.
! 놀랍네요.
한국인 입장에서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질문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제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친일(新日)’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이 아시아 전역에서 모두 상이하다는 것입니다.
그 질문자는 어떤 의도로 ‘친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건가요?
그 사람이 사용한 거니 정확하게 제가 얘기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인 어떤 패턴으로 가정을 해본다면 단지 “일본을 좋아하느냐”는 나이브한 의미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일본에게 우호적이냐?”
네. 그러니 한 단어로도 의미가 매우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조금 전의 요미가나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서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 중국, 대만, 일본까지 모두 친일(新日) 혹은 반일(反日)이라는 단어를 같은 한자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같은 맥락을 가지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어떤 거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에 따라 같은 일본인이어도 이 단어들을 다른 의미로 사용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 경험을 미루어 보았을 때, 한국의 보수 정권이면 일본에 우호적이고 친일, 진보 정권이면 반일 성향,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와 같은 단어들을 사용할 때 저의 ‘동시 위치성’을 고려하게 되지요. 한국인으로서 한국 사회에 소속되어 있지만, 일시적으로 바깥에 나와 있는,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발 딛고 서 있는 곳과 또 다른 맥락 속에도 동시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무언가를 설명해야 합니다. 즉 제게 언어란 무엇을 거점으로 삼느냐의 문제이죠. 3월은 그런 것을 굉장히 많이 고민했던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공백]
그러면 다음 날짜로 넘어가보겠습니다. 2021년 12월은 어떤 시간이었나요?
제게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늘 어딘가에 거점을 두고 살아왔다고 생각했으나 이 원고를 쓰면서 그 거점이 확실한 것인지 잘 알 수 없게 되었어요. 질문하신 2021년 12월에 저는 일본에 있었고, 한국에서는 박근혜가 사면되었죠. 바다 건너 본국에서는 정치적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는데 저는 그와 동시에 매우 일상적인, 얼핏보면 그것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로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요? 저는 대답하지 못합니다. 이 기간에 대해 떠올리는 것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왜일까요? 오히려 가까워서?
네. 그리고 이 기간에 대해서 쓰는 것이 어떠한 죄책감을 느끼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궁금해요.
제가 가장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시점은 2016~2017년 즈음입니다. 문단 내 성폭력 사건에 대해 모두가 이야기할 때 저는 문예창작과 학생이었습니다.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저는 강남에 살고 있었지요. 이러한 위치적인 맥락도 있고, 그 시기에는 많은 시위를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020년 즈음부터는 거의 일본 사회를 중심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저에게 최근의 시간은, 말하자면 ‘한국 공백기’같은 겁니다. 2017년 즈음 한참 저와 함께 페미니즘 동아리 활동을 했던 친구가 작년엔가 전화를 해선 그러더군요. “언니, 나는 그때 언니들이 있어 너무 행복했어. 그런데 매일매일 까치발을 하고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어.” 끝없는 자기 검열이 극에 달았을 시기에 우리는 함께했고, 지금 그 친구는 한국에, 저는 일본에 살고 있지만, 둘 다 어쩐지 지난 시절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그 몇 년 전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것을 ‘퇴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도망친 것만 같은 느낌, 그런 특이한 감정들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존재했습니다.
저 역시 「날짜-거점」에서 2016년부터 2019년까지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 2022년의 위치에서 ‘멀어진’ 감각에 대해 썼어요. 그런데 제게 ‘오래된’ 느낌이 혜수에게는 ‘도망친’ 감각이었다는 것이 의아해요. 왜냐하면 외국인으로 살게 되면서 어려움이 더 가중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했거든요.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외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겹쳐질 때 또 다른 층위의 정치적 약자가 되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명확한 편견을 너무 쉽게 스스로의 것으로 취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저는 많은 것을 ‘모르는 척’하기도 했어요. 이것은 다른 사회에서 살아가는 자기 자신을 이용한 기만이죠. 하지만 그 ‘모르는 척할 수 있음’은 어떤 울타리처럼 제게 안전함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분게이》의 주제였던 ‘분노’에서 은정이 말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움직임에 어쩌면 나 자신이 속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혜수가 변화에 반대하면서 분노를 느끼는 건 아니잖아요?
아니죠. 아니지만 분노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조용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아,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의 자리에 대해 새로이 고민하게 되네요.
개인적인 경험에 비롯된 생각이지만, 사실 이러한 위치성이 일본 사회에서도 꽤나 발견될지도 모릅니다. 은정은 이 글에서 ‘승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지요. 하지만 현실의 정치 상황에 대해 묘사하며 싸움에서 이겨 환호하는 표현이 일본어로 쓰여 있는 것을 읽었을 때 저는 다소 낯선 감각을 느꼈습니다.
일본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인가요?
의미적으로는 당연히 사용될 수 있습니다. 낯설었던 건 아마 일본의 정치 구조가 한국처럼 치열한 양당 구도가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이 대결 구도 자체가 짬짜면이나 밸런스 게임 같은 거 아니겠어요.
확실히 한국 사람들은 정치를 스포츠로 대하는 태도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저는 한국의 시위(데모) 문화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야말로 어떤 종류의 집단적 플레이(Play)를 행하는 듯한 시위 방식에 대해서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놀이’가 아니라 ‘플레이’요. 음악을 틀 때도, 축구를 할 때도 플레이인 것처럼, 무언가 ‘특정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 플레이(Play)죠. 아까 말한 바퀴 축(허브) 같은 동사인 거잖아요. 역동적이지요.
[불출석]
혜수는 남북정상회담을 어떻게 받아들였나요?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제가 2016년에 문예창작과 합평 수업에서 썼던 소설 이야기를 간단히 먼저 하겠습니다. 제가 그때, ‘탈북민인 대학 동기와 룸메이트로서 함께 살면서 미묘한 연애 감정을 가지게 되는 퀴어 소설’을 학교에서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어떠한 정치적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기보다, 무언가를 대상화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이유는 합평 시간에 일어난 일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죠?
소설에 대한 합평 날짜가 하필이면 예비군 훈련일이었던 겁니다. 제가 남북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썼는데 정작 이 남한의 남성들은 전부 다 군대에 가서 그들의 의견을 들을 수 없었던 거에요. 올 필요 없으니까 제 소설도 안 읽었고요. 그날 수업에는 여학생밖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건 실화라고 하기엔 설정 과다인데요. (웃음)
저는요, 이 소설을 다시 쓴다면 이 예비군 훈련일 사건이 꼭 소설 속 내용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독이모』에서의 서독이모가 희곡을 썼던 것처럼, 남북에 대한 소설을 써내는 제가 실제로 현실에 존재했지만, 합평을 할 때 남학생들이 다 군대를 갔다고요.
박민정 소설가의 『서독이모』에서 서독이모가 “언젠가 꼭 남북 통일에 대해 써보았으면 좋겠구나”라고 권유하는 대목이 2009년으로 설정되어 있는데요, 혜수에게 이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요?
가라타니 고진이 2005년에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해 이야기할 당시 저는 초등학생이었고 학교에서는 〈북한 어린이들에게 편지 쓰기〉를 학급 활동 시간에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참여정부 시절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서독이모가 2009년에 “언젠가 꼭 남북 통일에 대해 써보았으면 좋겠구나”라고 조카에게 말했지만, 조혜수 어린이는 그 서독이모 나이대 사람들의 기획을 통하여 실제로 북한의 어린이들에게 (절대 보내지지 않을) 편지를 쓴 거죠. 담임 선생님께 검사도 받고요. 남북정상회담이 끝난 지금도 그 편지는 보내지지 않은 채 집에 보관되어 있네요.
84년생 장은정이 대학생 때 근대문학의 종언을 주장한 가라타니 고진에 대해 배우는 동안 93년생 조혜수 어린이는 학교에서 북한 어린이에게 편지를 썼다는 사실이 조금 얼얼합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발견했는데 지금도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통일 포스터’를 그리고 있었어요.
모두가 정치에 참여하고 있지만 사실은 늘 불출석 상태인 기이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네요.
[각주-이동]
《분게이》에 일본어로 실린 「날짜, 거점」을 읽는 것은 한국어로 인쇄된 글을 읽는 경험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분게이》에 실린 글엔 각주가 많아요. 저는 각주를 정말 즐겁게 읽었어요. 왜냐하면 그게 ‘우리’는 당연하게 아는 것들이었거든요. 광화문이 어디 있고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 장소이고, 박정희가 박근혜의 아버지라는 것, 그리고 사각 출판사의 의미와 시옷과 기역이 가진 각과 발음 같은 것이요. 이런 것들은 지식이라기보다는 신체에 각인된 어떤 풍경 같은 것이죠. 배경지식이라고 말하기도 참 애매해요. 내게는 너무 당연하지만 일본어가 되었을 땐 새로운 것들이요.
언어는 풍경인 것 같다고 했던 혜수의 브이로그 속 대사가 다시 한 번 떠오르네요.
랜드스케이프죠. 그런데 그 랜드스케이프가 「날짜, 거점」에서는 번역가 선생님에 의해 언어로써 번역되어 각주라는 형태로 달리게 된 거죠. 제가 일본에서 「날짜, 거점」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은, 지금의 나의 생활이 ‘이동하는 나와 나의 삶’이라는 거점에 계속해서 각주를 달고 있는 행위로 지속되고 있다는 거였어요. 인터뷰 초반에 말씀드린 “바뀐 정권은 친일이던가요” 같은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들처럼, 계속해서 나 스스로에게 각주를 달아야 한다는 것. 마치 내 존재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이요.
한국 독자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이 글이 처음부터 한국어로 만나는 글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설사 현재 한국어로 읽으신다고 하더라도, 마치 거울을 대고 거기에 비친 글자를 읽는 마음으로 읽어내는 것이 바른 읽기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조혜수 독립 큐레이터. cho.hyesu.0@gmail.com
나가며
이 소책자의 ‘들어가며’에서 「날짜-거점」이 “최근 7년간, 내가 분노하면서 사유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라고 소개했다. 저마다 자신이 가진 의견과 자기 표현조차 자본의 재료로서 경쟁 자원으로 삼는 관심경제의 시대에, 자신의 앎이 아니라 무지에 대해 질문하는 것, 더 나아가 무지를 대화의 거점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비평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소책자를 만들면서 나누었던, 조혜수 큐레이터와의 대화 역시 나를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다. 대화에서 요청한 날짜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2022년 4월
2021년 12월 박근혜 사면, 남아프리카 공화국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의 코로나 확진
2021년 4월
2020년 코로나 시작
2019년 박민정, 『서독이모』에서 화자의 진술. “그때쯤의 내겐, ‘남북 데탕트’라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 76차 유엔 총회
2018년 남북정상회담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탄핵 가결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출간, 박근혜 탄핵 시위
2009년 박민정, 『서독이모』에서 이모의 대사, “언젠가 꼭 남북통일에 대해 써보았으면 좋겠구나”
2005년 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언」 발표.
이 소책자를 손에 쥐고 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남김없이 읽어준 당신은 저 날짜에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우리가 같은 지구별에 살고 있더라도 각자의 삶을 저마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압도적인 개별성들에 서로 귀 기울이는 일, 그리고 내가 다 안다고 믿고 있던 과거의 시간을 당신의 관점으로 재구성하는 일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비평의 시간이 아닐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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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선언은 두려운 것이다. 선언한 내용의 달성 여부와 상관없이 선언 ‘이후’의 시간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2021년 4월, 첫 책을 내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비평을 쓴 지 올해로 13년 차에 접어들었다. 앞으로도 비평가로서의 글쓰기는 멈추지 않겠으나 앞으로 쓰이게 될 글은 그동안 써 온 글들과는 꽤 다른 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그 이후로 어떤 글을 써야 하는가에 대해 그다지 크게 고민하지 않고 지냈다. 글쓰기 이외에도 살아나가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은 너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에서 한국문학 번역가로 활동 중인 승미 선생님의 번역을 거친 한 통의 메일을 받게 된다.
안녕하세요.
저는 ‘가와에쇼보신샤河出書房新社’라는 출판사에서 문예지 ‘《분게이》文藝’의 편집을 맡고 있는 다케하나 스스무라고 합니다. 오늘은 저희 문예지 《분게이》에서 장은정 작가님께 집필을 부탁드리고 싶어 연락드립니다. 2022년 4월에 발행되는 《분게이》에서는 “분노”라는 주제로 특집 코너를 준비 중입니다. 일본뿐 아니라 해외 작가분의 글을 함께 게재할 예정으로, 소설, 에세이, 대담, 논고로 구성될 예정입니다. 이번 특집에서 장은정 작가님께 에세이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장은정 작가님께서는 한국에서 새로운 평론의 가능성과 출판의 가능성을 모색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과정에는 기존 사고법에 대한 분노가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또한 이는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감정이 아닐까 상상해보았습니다.
의뢰드리는 글의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1.게재: 《분게이》2022년 여름호(4월 7일 발매) 특집 ‘분노’
2.마감: 2022년 1월 31일(월요일)
3.분량: 200자 원고지 30매 정도(6000자 정도)
4.원고료: 5만 엔
모쪼록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가와데쇼보신샤 《분게이》 편집부
다케하나 스스무
나는 해외 매체의 첫 청탁을 기쁘게 수락했고 내게 주어진 주제인 ‘분노’에 충실하려고 했으나 원고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청탁서를 받았을 즈음 내가 가장 심각하게 여겼던 문제는 메일 내용에서 언급된 ‘새로운 평론과 출판의 가능성’보다 박근혜 전前 대통령의 사면소식이었고, 그건 내게 분노보다는 일종의 ‘위협’으로 경험되었기 때문이다. 속보 기사를 접한 후 나는 SNS 계정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은 문득 내가 너무 세상에 대해 정말 무지하고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근혜가 올해 사면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내가 세상에 대해 낙관적일 정도로 지나치게 무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하루 종일 떠나지 않네.”라고.
내게 분노란 ‘자기 정당성’이라는 (무)의식적 판단 과정을 거친 감정이다. 그러나 나 자신의 판단 능력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고 있는 시점에서 분노라는 감정을 ‘나의’ 것으로, ‘현재의’ 산물로 다룰 수가 없었다. 아마 이 주제가 2016년이나 2017년 즈음에 주어졌다면 나는 이 감정에 대해 쓰는 일에서 어떤 분열도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의 나는 잔뜩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는 2022년 1월이었고 낯선 해외 매체로부터 건네받은 ‘분노’라는 주제를 받아 들고 다음과 같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7년간, 내가 분노하면서 사유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날짜-거점」
2021년 12월 31일 0시, 대통령의 ‘특별사면’ 권리로 박근혜 전(前)대통령이 석방되었다. 판결 당시 징역 22년이 선고되었다. 그런데 석방이라니? 속보기사가 뜨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다. 누군가 가짜기사를 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몇 번의 검색 끝에 그것이 ‘진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눈앞이 깜깜해졌는데 나 자신에 의한 충격 때문이었다. 난 ‘나’라는 사람이 박근혜가 징역 22년을 모두 채울 것이라고 믿을 만큼 한국정치사에 무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풀려난다고 한들 정권이 바뀐 이후일 것이라고 짐작했지, 문재인 대통령의 ‘특별사면’의 권리로 석방될 것이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까맣게 잊었던 어떤 시간이 거짓말처럼 선명히 떠올랐다.
2019년 10월 26일 토요일, 나는 광화문 광장 근처에 있는 한 호텔의 1층 카페에서 문학평론을 함께 쓰는 동료들과 약속이 있어서 외출했다.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역에서 내려서 계단을 오르는데 쩌렁쩌렁한 소리들이 들렸다. 출구로 나오자마자 광장은 태극기와 성조기로 가득하고 경찰들이 서서 집회 주최 측 근처를 드문드문 에워싸고 있다.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야했는데 금방 빨간불로 바뀌는 바람에 다음 보행 신호가 들어올 때까지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초조하게 횡단보도를 얼른 건널 수 있기를 간절히 기다렸던 적이 있었나? 70대 정도로 보이는 한 남성이 확성기를 바짝 가까이 대고 반발과 욕설을 섞어 몹시 심하게 화를 내고 있었는데, 그는 길을 건너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서 있어야 하는 행인들 사이에 있었다.
그가 확성기에 대고 외치는 말은 대부분 욕설이었다. 함께 집회에 참여한 시위자들이 모인 곳에서 이탈해 횡단보도 앞, 즉 나처럼 길을 건너기 위해서는 잠시 머물러야 하는 행인들이 모인 곳으로 자리를 잡은 그는 당장에라도 어딘가 옮겨 붙기 위해 작정한 불씨처럼 보였다. 바람의 방향이 조금만 바뀌어도 내게 옮겨 붙을 것만 같아서 겁이 났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남성을 중심으로 시위자가 아닌 행인들이 일부러 몇 보폭 거리를 두면서도 동시에 그를 피한다는 느낌이 노골적으로 전달되지 않도록 애쓰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그와 행인들 사이엔 아주 미묘한 거리감이 형성되어 있었고, 신호가 바뀌자마자 다들 달아나듯이 그곳을 벗어났다. 나는 약속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동료들에게 물었다. “오면서 태극기부대 만났어요?”
그걸로 끝이었다. 우리는 최근 한국시가 소설에 비해 페미니즘 비평담론이 잘 형성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나눴고, 그 모임이 끝나고 광화문 광장으로 나왔을 때 그들은 해산하고 없었다. 사실 나는 박근혜 석방 결정이 나기 전까지도 그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는데, 나 역시 다른 방식으로 몹시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2016년 10월,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을 든 사람들이 광화문 광장에 주말마다 폭발적으로 모여들던 그 시점, 트위터에서는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달고 그동안 한국의 남성 작가들이 위계를 이용하여 저지른 성폭력에 대한 고발들이 쏟아졌다. 그 목소리가 쉽게 휘발되지 않도록 작가들이 모인 연대체들이 생겨났고, 나 역시 그에 참여했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서 가결되었다. 나와 친구들은 4~5개월째 수면부족에 시달릴 만큼 강도 높은 무리한 연대 활동에 점차 지쳐가고 있었으나, 탄핵이 결정된 것 역시 우리의 승리였으므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 그와 같은 결정이 누군가에게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부정의이자, 역사적 후퇴의 순간이었음을 여기에 새로 써 넣는다. 헌법재판소 앞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한 시위대는 헌재의 결정에 항의하며 경찰차를 부수고 차벽을 넘으려 했다. 그 과정에서 경찰차에 있던 스피커가 떨어져 시위자 중 세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들은 이번 석방 소식을 정의의 ‘승리’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나에게는 상상조차 못한 ‘석방’이 그들에게는 점차 누적된 활동에 대한 성취이자 승리가 아닐까?
*
세계적인 페미니즘 조류와 코비드19로 인한 팬데믹 시대 속에서 기존 사고방식에 대한 분노를 기반으로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게 되며, 이런 맥락 하에 이 감정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것이 내가 전달받은 이 지면의 기획의도였다. 그런데 내가 ‘분노’라는 키워드를 듣자마자 횡단보도 앞에 서서 확성기로 욕설을 퍼붓는 ‘타인’의 분노에 대해 떠올린 것은 새로운 사고방식보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유지하려는 이들이 가진 분노가 훨씬 강력하고 또 지속적이라고 체감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변화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역사적 위기이자 심지어 목숨을 걸고 막아야만 하는 불의라면, ‘새로운 것’과 ‘기존의 것’ 사이에서 어떻게 나의 분노가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 타인의 분노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할까?
이모는 내게 “언젠가 꼭 남북통일에 대해 써보았으면 좋겠구나”라고 말했다. 내가 대학원에 막 입학했을 때였다. 2009년의 나는 저런 무성의한 말이 어딨을까, 생각했다. 문학이란 게 뭔지, 소설이 뭔지 다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누가 요즘 ‘남북통일’ 같은 단어를 꺼낸다고. 오랜만에 만난 이모가 감 없는 꼰대처럼만 보였다. (박민정, 『서독이모』, 현대문학, 2019. p.10.)
집에서 3분 정도 거리에 있어서 자주 가는 카페에서 박민정 소설가의 신작 소설 『서독이모』(현대문학, 2019)를 펼쳐 읽다가 위의 대목에서 크게 웃었다. 사실 이 웃음엔 몇 가지 맥락이 섞여있다. 첫 번째는 문예창작학과 출신인 나 역시 저런 말을 ‘실제로’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즉 이런 뜻이다. “아, 맞아, 2009년 그 즈음에 문예창작학과를 다닌다고 하면, 꼭 어느 정도 ‘배운’ 어른들은 통일에 대해 쓰라고 했었지!” 두 번째 맥락은 이 말을 들은 화자의 반응, “2009년의 나는 저런 무성의한 말이 어딨을까, 생각했다.”는 말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나는 2004년에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한국문학 평론계에서는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을 두고 비평적 담론이 활발히 형성되던 시점이다.
90년대 한국문학 평론가들은 ‘문학이 윤리적이고 지적인 과제를 짊어지기에 영향력을 갖는 시대가 끝났으며 이제 문학은 만화처럼 오락에 불과하고 세계적인 상품을 만들어주기를 그러나 순수문학 작가가 더 이상 잘난 척하지는 말아 달라’는 고진의 일갈에 반박하는 비평들을 앞 다투어 내고 있었다. 하지만 84년에 태어난 나로서는 선배들의 반응이 어리둥절했는데, 에반게리온과 함께 성장하고 하루키를 읽으면서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입장에서 고진의 글과 당대 평론가들의 글은 그저 ‘공부하는’ 대상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런 나에게 통일로 소설을 쓰라니! 정말이지 무성의한 조언이 아닌가!
세 번째 맥락은 내가 2016년 페미니즘 리부트, 2018년 남북정상회담을 통과하면서 그들의 조언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무성의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다는 것. 『서독이모』에서도 내가 느낀 그 감각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이 소설은 다음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때쯤의 내겐, ‘남북 데탕트’라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 이때의 ‘그때’가 바로 소설이 출간된 2019년이니, 10년 전에 들은 권유의 진의에 대해 이 소설의 화자 역시 새삼 다르게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어른들은 왜 그때 우리에게 통일로 소설을 쓰라고 했을까? 즉 어떤 말은 듣는 이에게 실제로 도달하기까지 무려 10년이 걸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언어에는 한 사람의 삶이 축적되어 있고, 그 축적된 시간을 가늠하려는 노력 없이 대화란 그저 공허한 글자와 소리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2019년 5월 17일, 문학평론가로서 첫 책이 나왔다. 단독 저서는 아니었지만 공동 저서라는 것이 나에게는 사실상 더 큰 의미였다. 13명의 여성평론가가 『#문학은_위험하다』라는 제목으로 각자 발표한 열아홉 편의 글들을 모았다. 개인 작업으로 발표한 글들인데도 한권의 책으로 묶어놓으니 서로의 글을 참조하고 반박하고 인용하면서 담론이 생겨났다. ‘책’이라는 매체가 가진 비평적 가능성에 새삼 놀란 기억이 난다. 당시 자주 언급되는 텍스트는 단연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이다.
당시 한국문학 평론계에서는 2017년부터 본 작품이 정치적·윤리적 가치를 강조하느라 설득력 있는 플롯을 갖추지 못해 미학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적 평가가 등장했고, 이에 맞서 작품의 미학성을 평가하는 것만이 현재 문학평론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지 되묻는 비평적 담론이 활발히 일어났다. 2022년에 다시 이 책을 펼쳐 내가 발견한 것은,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시대를 막 맞이한 여성평론가들의 벅참과 들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척 오랜 과거처럼 느껴진다. 어째서일까?
나는 2020년 3월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문학평론가로서 ‘문학’의 가치를 규정하려는 작업을 그만 ‘졸업’하겠다고 선언했다. 2020년 4월, 비평전문 출판사 ‘사각’을 등록하고 10년 간 문학평론가로서 발표한 글들을 내 비평적 가치관을 담아 첫 단독 비평집 『침투』(사각, 2021)를 발간한 이후, 많은 이들로부터 ‘문학평론가’와 ‘비평가’의 차이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가 팬데믹 시대와 겹쳤다. 즉 나의 비평가로서 경력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 세계적인 유행과 함께 시작된 셈이다.
얼마 전 한 다큐에서 제76차 유엔 총회에 참석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시릴 라마포사의 연설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 다큐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 세계 백신 확보율이 82%이지만 저소득 국가는 1%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인류에 대한 고발입니다. 우리가 이를 다루지 않는다면 대유행은 더 지속되고 새로운 변이가 다시 나타나 퍼질 것입니다.” 이 총회 개최 시기를 찾아보니 2021년 9월이었다. 그리고 2021년 12월 13일,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이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에 의한 코로나 확진자 판정을 받았다는 기사를 발견한다.
고백하자면 지금의 나는 분노보다는 공포에 질려있다. 나의 투쟁이 승리가 되었던 결정들이 이전의 질서로 하나하나 다시 되돌아가는 것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지고 서울에서 살아가고 있는 1984년생 페미니스트 여성비평가로서 나의 분노는, 2015~16년 시점에 그 정점을 찍은 것 같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다루는 사건들이 발생한 날짜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또박또박 기입하고 이 날짜들을 볼드처리해서 강조되도록 했다. 왜냐하면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이 시간들은 다른 서사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 서사에 대해 질문하기 위해서다.
나에게 ‘분노’가 횡단보도 앞에서 확성기를 들고 욕설을 퍼붓던 70대 남성의 이미지로 가장 먼저 형상화되었다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분노’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상징적 이미지는 무엇인가? 내가 이 글에서 강조했던 날짜에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고 2022년 4월의 시점에서 그 시간들은 어떻게 회상되는가? 이런 차이들에 대해 대화하기 위한 필요한 최소한의 ‘거점’을 구성하는 것이 비평가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나는 그 거점을 달력에 표기된 특정한 날짜로 삼았다. 우리는 다른 삶을 살아왔다. 이 글이 서로 다른 삶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 (2022)
장은정 / 비평가. riyuni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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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16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은영 소설가의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문학동네, 2016)가 막 발간된 때였다. 이미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작가였기에 나 역시 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기다림이 이미 잡지로 발표된 작품들을 하나의 책으로 다시 묶어서 읽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대감 뿐만은 아니었다. 당시 시집이나 소설집의 신간에서 가장 먼저 펼쳐보는 것은 해설이었다. 첫 시집이거나 첫 소설집일 경우, 단행본의 단위에서 한 작가의 위치를 비평적으로 자리매김해주는 첫 지면이 해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받고 깜짝 놀랐다. 해설 도입부 부분이 작가가 이전에 받았던 문학상들에 대한 심사평, 그리고 문자 그대로의 ‘인상비평’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문학이라는 특정 장르에 있어서 ‘전통’이라는 개념이 갖는 위치성을 검토하기로 약속한 이 지면에서, 당시엔 배신감에 가까운 실망을 느꼈으나 점차 까맣게 잊어버렸던 그 해설이 다시 떠오른 것은 본문에 ‘전통적’이라는 표현이 쉬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글이 학술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엄밀히 공들인 글이었다면 전통에 대한 개념은 그런 방식으로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의미로 ‘힘을 빼고’ 썼기 때문에 가능했을 ‘전통’이라는 표현은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흥미로운 대목을 옮겨보자.
어떤 장르에서건 현대 예술에서 가장 으뜸가는 평가 기준은 참신함이다. 남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 자기만의 개성과 독창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그것이 전통적인 것과는 구별되는 현대적인 미의식이며, (…중략…)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쇼코의 미소」를 통해 최은영 작가가 만들어낸 앞서와 같은 반응들, 정통적이랄지 기교 없는 싱거움 같은 평가는 인상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평가를 받으면서도 그의 소설이 수상작이 되었다는 것, 그뿐 아니라 심지어는 감동적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는 점이라 해야 하겠다. 수사를 걷어내고 나쁜 쪽으로 말하자면, 정통적이다라는 것은 진부하다는 말이고, 기교가 없다는 것은 미숙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진부하고 미숙한데도 감동적이라고? 그건 참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어쩌면 감동이란 진부함과 미숙함을 통해서만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영채, 「순하고 맑은 서사의 힘」, 『쇼코의 미소』 해설 중, 문학동네, 2016. p.274~276.)
이천 년대 초반, 문학평론에서 바르트의 ‘저자’와 ‘텍스트’ 개념이 너무나 상식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서 각주를 따로 달아야 할 필요성이 없었던 시간마저 한참 지났으나, 2016년에 출간된 신인 소설가의 첫 소설집에서 등장하는 ‘감동’은 여전히 형식과 내용이라는 관습적인 이분법 하에서 이야기된다. 위 해설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최은영의 소설은 현대 예술이 요구하는 참신함이나 특별한 기교가 없음에도 읽는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점에서 몹시 특수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이 감동은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희미하고 조용한 성격과 그들이 ‘공감’으로 맺어지는 관계성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다.
그런데 최은영 소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어떻게 ‘전통’ 개념과 맞물리는가?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참고하자. “지적인 것이 아니라 정서적인 것을 통한 공감력이 포스트 계몽 시대에 유효한 새로운 계몽의 양식일 수 있으리라는 말은, 이 책을 다 읽은 독자들을 위한 사족으로 달아두고 글을 맺자.” 즉 참신함을 가장 뛰어난 요소로 삼는 현대 예술적 감각이란 사실상 계몽시대의 산물인 ‘지적’ 근대성이며, 이 소설이 가진 ‘정서적’ 감동은 포스트 계몽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형태의 정서작용이라는 주장이다. 인용한 부분과 함께 이해하자면 결국 전통적인 것이 가장 새롭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런데 이 논리는 얼마나 근대적인지!
*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피상적으로는 20세기 이전의 유산을 우선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끝없이 새로운 것이 다시금 요구되는 현대예술의 하위 장르로서의 문학적 ‘전통’은,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로 분류되는 2016년에도 기존 현대예술의 위반이자 대안으로 제시된다. 즉 만일 새롭게 다시 동원될 수만 있다면 ‘전통’의 시제는 언제든 현재화 된다. 이는 사실 한국문학의 비평에서만 반복되는 현상이 아니며 이미 콩파뇽이 그 역설을 적절히 지적했듯, “모더니티는 훗날의 자기 자신과 대립할지는 몰라도 더 이상 아무것과도 대립되지 않는다. 예술은 역사의 시간과 진보에 밀착되어버렸다.”(앙투안 콩파뇽, 이재룡 옮김, 『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 현대문학, 2008. p.33.)
한국문학의 ‘전통’을 다루는 이 지면에서 어쩌면 좀 더 학술적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전쟁과 분단을 경험하면서 한반도 거주자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뿌리 뽑힌’ 존재*로 이해하게 되는지에 대해, 이후 문지 그룹으로 성장하게 되는 ‘산문시대’와 ‘창비’ 그룹이 전통 단절론을 극복하기 위해 70년대에 한국근대문학사를 어떻게 썼는지, 그리고 이러한 작업이 어떻게 지금까지 작동하는 문학출판계 제도를 만들어 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2020년대 현재에도 활발히 활동 중인 최은영의 첫 소설집 해설에서 ‘전통’이라는 용어가 그토록 오래 축적된 문학사적 맥락을 일시에 소거하고 새로운 ‘일상 언어’로 (재)출현했다는 사실이야말로 문학평론이라는 장르가 신인 작가를 향한 찬사 문법의 반복이라는 층위에서 검토해보는 하나의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우려하고 있다. 이 글이 한국문학사에서 ‘전통’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전유해왔는지 나열하고 설명하는 행위를 통해 한국사(라고 상상된) 지식을 다시 한 번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재생산하는 것에 기여하게 되지 않을지. 나는 한국문학 연구자이고 한때는 한국문학 평론가라고 스스로를 소개했으나, 이제와 돌이켜보건대 연구자라거나 평론가라는 직업명보다 ‘한국’이라는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온통 알 수 없게 되었다.
*
내 육체적 나이는 늙었지만, 내 정신의 나이는 언제나 1960년의 18세에 멈춰 있다. 나는 거의 언제나 사일구 세대로서 사유하고 분석하고 해석한다. 내 나이는 1960년 이후 한 살도 더 먹지 않았다.(김현, 『전집7:분석과 해석/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 전망』, 문학과지성사, p.4.)
한국문학 연구자 중에 위 문장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 문장은 1988년, 막 마흔 여섯 살이 된 김현이 쓴 것이다. 한국문학사를 읽는 일은 수많은 선언의 순간들을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특정 시대의 가치를 규명하기 위해, 때로는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기 위해 ‘선언’의 형식은 수차례 활용된다. 자신의 사적 삶조차 4·19의 당시 나이인 열여덟 살에 멈춰있다고 말할 만큼의 가치 있는 사건이 있었던 시대를 산다는 것/살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처음 저 선언을 읽었을 때, 나는 첫 문장을 이렇게 비워서 읽었다. “내 육체적 나이는 늙었지만, 내 정신의 나이는 언제나 ( )에 멈춰 있다.” 어쩌면 내 삶에서도 어느 시간에 영원히 멈춰버릴 만큼 가치 있는 어떤 역사적 사건의 당사자가 될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나 역시 ‘한국인’이 아닌가?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부터 시작하고, 나 또한 이 헌법의 보호를 받고 있는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4·19가 나와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왜 나는 위의 인용에서 ‘1960년의 18세’를 괄호 처리하여 내 삶에 적용한 것일까?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사’는 주로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형성된 것으로, 한반도 거주자들이 식민지를 경험하고 한국전쟁과 분단까지 통과하면서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던 폭력에 의한 심각한 트라우마 및 열등의식에 대한 사상적 대응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한국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자기서사를 구성하기 위한 담론이었으며, 주로 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한국문학사’ 역시 4·19 이후 활발해진 민족주의의 흐름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이처럼 60~90년대에 이르는 특정 기간에 폭발적으로 생산된 지식 담론으로서의 한국사는 ‘주체성’과 ‘내재성’을 극히 강조하고 있어 직접적인 언급이 아니더라도 ‘단일민족’의 개념을 고취하기 쉽다. 이는 식민사관의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기존의 한국사와 한국문학사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나는 다음의 대목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옮겨 적고 싶다.
강요된 의존관계에 의해 식민체제, 부당한 국가, 착취적 결혼에 매여 있다면, 의존성을 극복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 것 같다. 그런 식의 예속화를 끊어내는 것은 해방과정의 한 단계, 평등과 자유에 대한 권리 주장의 한 단계다. 하지만 그럴 때 우리가 받아들이게 되는 평등은 어떤 버전의 평등인가? …중략… 우리가 자립을 통해 개인의 주권을 되찾거나 독립을 통해 국가의 주권을 되찾을 때 그 방식이 공거cohabitation에 대한 탈주권적 논의를 구상할 수 없게 만드는 방식이라면, 우리가 되찾은 주권은 끝없는 갈등을 함축하는 자족성에 불과하다. 어쨌든 지구상의 크고 작은 지역들 사이의 상호의존성 개념을 재고하고 쇄신하지 못한다면, 환경위협에 대한, 전 지구적 슬럼 문제에 대한, 구조적 인종차별에 대한, 전 지구적 공동 책임 하에 거주지를 찾아야 할 무국적자들의 처지에 관한, 그리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식민적 양태의 권력들을 좀더 철저하게 극복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없을 것이고, 사회적 연대나 비폭력에 대한 대안적 관점의 정식화 작업을 시작할 수도 없을 것이다.(주디스 버틀러, 김정아 옮김, 『비폭력의 힘』, 문학동네, 2021. p.68~69.)
60년대는 전쟁과 분단으로부터 비로소 얼마간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역사적 사건을 사유할 수 있는 조건이 비로소 확립된 시간으로 간주된다. 이때 한국사와 한국문학사는 과거의 강요된 의존관계로부터 그 의존성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그 주체성과 내재적 발전이라는 기획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았다. 이는 4·19가 열어젖힌 해방의 가능성 중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2020년대를 살아나가는 우리가 한국문학의 ‘전통’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의 목록이 특정 시대의 욕망이 투과된 상상적 산물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지나간 시간에 시작되었으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과거의 집적물들을 통틀어 ‘전통’이라고 호명하는 자는 누구이며 그 호명은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가? 그 욕망은 환경위협, 전 지구적 슬럼, 인종차별, 무국적자들이 겪는 고통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가?
글을 열며 최은영의 첫 소설집 해설에서, 이 소설들이 가진 미덕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전통’에 대해 이야기했다. 새로운 작가를 독자들에게 소개할 때 흔히 강조되는 ‘새로움’이라는 요소가 너무 오래 반복되다보니 이제는 가장 오래된 것일수록 새롭다는 역설에 이르렀다고도 말했다. 최은영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관계를 맺을 때 만들어내는 ‘공감’이라는 특성이 갖는 그 비평적 가치를 모더니티의 오랜 반복적 관습 속에 또 다시 위치시킬 필요가 있을까? 누군가는 최은영 소설가를 현재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명이라고 쉬이 소개하겠으나, 지금 비평은 최은영의 소설을 당연하게 ‘한국’문학이라는 개념으로 분류하는 그 관습에 대해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지구 생활자이자 한반도 거주자로서 문학에 필요한 비평일 것이다.
*“한국 문학은 선배 없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동시에 상당수의 작가·시인들이 월북하여 정치적으로 상대적인 위치에 서버림으로써, 30년대의 한국 문학의 문학적 결정들의 상당수가 일실되어, 유산 없는 시대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50년대의 한국 문학은 20년대의 한국 문학과 마찬가지의 혼란에 빠져버린다. 가장 표피적인 문제로는 그에게서 추천을 받고 싶은 선배 문인이 없어진 것이며, 가장 심각한 문제로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 없어진 것이다.”(김현, 「테러리즘의 문학」, 『현대 한국 문학의 이론/사회와 윤리』, 문학과지성사, 1991. p.248.
장은정 / 비평가. riyuni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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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약속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직장인의 리듬을 기준 삼아 판단한다면 이 공연은 다음날을 위해 충분히 휴식하는 시간에 열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관람객은 흔히 ‘나인 투 식스’ 생활에서 귀가를 준비하는 시간에 반대로 외출을 준비한다. 이때 관람객과 퍼포머의 활동은 잠들 때에야 시작되는 노동자들의 일과를 닮았다. 저녁에 교대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늦은 밤 ‘콜’을 기다리는 대리운전 기사, 아침까지 물류창고에 도착해서 물품을 배달해야 하는 트럭운전 기사, 잠에서 깨어나 현관문을 열어보면 도착해 있는 새벽배송 택배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나인 투 식스’ 리듬에 최적화된 소비자들에게 최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많은 이들이 예술을 하는 이들은 밤에 깨어 작업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런 경우는 많지만, 작업 시간이 아니라 공연 시간이 밤인 경우는 드물다. 당신이 새벽 3시에서 4시까지 상연되는 공연을 추천 받았다면, 이 공연 관람을 쉽게 결정할 수 있을까?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대중교통이 다니지 않는 시간이니까. 사는 곳이 공연 장소로부터 가깝지 않다면 스스로 운전을 하거나 택시를 이용해야겠지만 이를 선택하기 어렵다면 대중교통으로 미리 이동하여 공연 시간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즉 이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굉장히 큰 품이 든다. 그럼에도 이 공연의 관람을 마친 이들은 총 54장의 기록을 남겨주었다. 이 글은 나 역시 이 공연을 위해 근처 호텔을 예약하고 택시를 통해 오가며 한 시간의 공연을 보기 위해 거의 하루를 할애하여 겪은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잠들지 않기
공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강북구 인수봉로 301에 위치한 공간은 꿈 세계와 현실 세계의 교차점으로 설정된다. 퍼포머는 이곳에서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약속 시간과 장소에 맞춰 도착한 관객은 어두운 밤 골목에 통유리 안으로 흰 침대가 마련된 하나의 하얀 방을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된다. 그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채널헤드’로 명명된다. 채널헤드에게 공연의 규칙을 알려주는 안내문들이 있고 채널헤드는 그 규칙에 동참하면서 공연을 관람 및 생성해 나간다. 퍼포머는 공연을 진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을 일관되게 이행하지만, 공연이 있는 날의 날씨나 시간, 채널헤드의 적극성 정도에 따라 공연은 매번 다른 사건일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무대 위에서 엄격히 통제되는 반복성과는 달리 ‘강북구 인수봉로 301’의 주변을 걸으면서 상연 및 구성되는 공연은 그 가변성과 우연성이 깊게 관여하며 퍼포머는 그 요소들을 마음껏 활용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이 공연의 중요한 키워드들은 대체로 밤과 꿈, 잠을 테마로 삼지만 이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반대로 생생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퍼포머의 빠른 이동 속도를 놓치지 않고 잘 좇아가야 하며, 본 공연에서 제시된 여러 원칙들을 빠르게 이해하고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하며, 헤드폰을 통해 들리는 소리들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하고, 불쑥불쑥 예기치 못하게 생겨나는 사건들에 대해서도 초연해야 한다. 나의 경우, 심한 비바람이 몰아쳐서 잠시 옆에 세워둔 우산이 뒤집어지고 굴러다녀도 웃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즉 이 공연이 주요하게 다루는 밤과 꿈, 잠이라는 키워드가 공연 속에서 상연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고도의 의식 상태, ‘이것은 공연이다’라는 메타 인지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 낙차부터 짚어야겠다. 꿈꾸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깨어있기.
‘들리는’ 것과 ‘듣는’ 것
문학은 흔히 ‘읽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의 문학 작품이 ‘책’이라는 매체에 인쇄된 경우, 책을 읽는 자세는 일정한 제약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걷거나 뛰면서 책을 읽는 것은 일종의 훈련이 필요하다. 책이라는 매체 자체가 글자를 인쇄한 종이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묶은 것이기에 그 중심점을 기준으로 페이지들을 펼치거나 넘기는 행위를 요구한다. 그런 이유로 비장애인이 페이지를 펼치거나 넘기기에 훨씬 수월한 자세는 대체로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기대는 등의 정적인 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이인환각연쇄고리에서 텍스트란 ‘읽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 이때 ‘듣는’ 것은 ‘들리는’ 것들과 뒤섞인다. 미술관에서 헤드폰을 쓰고 작품에 결합되어 있는 소리를 듣는 것과 다른 점이 그것이다. 전시공간에서 사운드란 그것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다른 소리들을 적극적으로 배제하도록 모든 조건이 최적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인환각연쇄고리는 헤드폰으로 미리 마련된 사운드를 듣는다고 한들, 헤드폰이 막아줄 수 없는 외부의 소리들이 스며들도록 내버려둔다.
전시공간이 아니라 공연이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장소를 거점으로 그 주변의 생활공간에게서 발생하는 소리들이 이미 디자인된 소리들과 뒤섞이는 것. 이는 관람객에게 ‘들리는’ 것과 ‘듣는’ 것을 쉽게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러니 이 공연에서 귀를 통해 듣게 되는 소리들의 의미를 중요하게 분석하는 일이 사건의 핵심은 아닐 것이다. 작가들이 각자의 이름으로 한편의 글(그것을 시 혹은 에세이, 소설 무엇으로 불러도 무관하다)을 작성한다. 그리고 작가들이 자신이 쓴 것을 읽은 후에 그 읽는 소리를 녹음한다. 사운드 디자이너는 그 소리를 다시 자신의 방식으로 수정한다. 때로는 잡음이 들어가고 효과음들이 배치되기도 하며 의도적으로 발음을 뭉개어서 소리들이 의미화 되는 것에 저항하기도 하면서 재구성된다. 그렇게 녹음된 소리들은 시디에 담기고 소형 냉장고에 보관되며, 채널헤드들은 그 냉장고에서 자신이 무엇을 들을지 고른다. 퍼포머는 그 시디에 담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특정한 장소로 관객을 안내한다. 관객은 그곳에서 헤드폰으로 자신이 고른 시디에 녹음된 것을 듣는다. 그리고 처음의 장소로 되돌아오면서 공연은 끝난다.
듣는 자세
공연의 동선을 위와 같이 간략히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듣기 위해서 동원되는 준비 행위는 짐짓 경건하기까지 하다. 냉장고에 담긴 시디는 소리들이 마치 식품처럼 쉽게 상할 수 있는 것을 특별히 차갑게 보존하는 듯하고, 그것을 바로 꺼내서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반드시 정해진 특정한 장소에서만 들을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다. 즉, 이인환각연쇄고리의 핵심은 무언가를 듣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조건과 장치들을 배치하고 마침내 관객에게 무언가를 들려준 후에 그것을 제자리에 놓는 행위까지를 모두 포괄한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공들여서 들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도 대중교통이 모두 끊어진 시간, 혹은 나인투식스의 노동자들이 곤히 잠든/잠들어야 시간, 반드시 그 시간에 ‘강북구 인수봉로 301’의 정해진 장소들을 돌면서 이 소리들을 왜 들어야 하는가?
사실 작가들이 쓴 것을 ‘듣는’ 행위 자체는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이미 수많은 연대현장에서 문학은 오랜 시간, 소리 내어 읽고 듣는 낭독의 기본적인 대본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젠트리피케이션 현장에서 임차인이 처한 부당함을 알리고자 작가들은 모여서 쓴 것을 읽거나 듣기를 반복해왔다. 그리고 바로 그 장소, 그 시간에서만 텍스트가 발휘하는 잠재성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에 의해 목숨을 잃은 이들을 기억하는 취지로 진행 중인 304 낭독회는 코로나 시대를 맞이해 각자 가진 기기를 통해 줌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전시공간에서 사운드가 적극적인 재료로 활용됨에 따라 텍스트를 사진으로 쉽게 가져갈 수 없도록 직접 필사하거나 소리 내어 녹음해서만 작품을 소유할 수 있도록 기획된 재미공작소의 전시가 거듭된 지도 몇 해가 되었다. 그러니 이 모든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어째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들어야만 하는가?
대답 없이
단순하게 말한다면 이인환각연쇄고리는 연대 현장으로서의 낭독회와 전시의 재료로서의 사운드를 생활공간으로 더욱 확장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공연은 금방 철거될 위험을 가진 약자의 거주권을 지키기 위한 장소도 아니고, 어디서나 들고 다니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의 활동범위를 한 번에 압축하는 전시 공간도 아니다. 이 소리들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상연된다. 우리가 길을 걸으며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을 때 곁을 무심히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차의 경적 소리 속에서도 묵묵히 음악에 집중할 수 있듯이 말이다. 다만 차이점은 반드시 퍼포머가 있어야 한다는 점과 그 소리를 들을 때만큼은 걷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듣기 위해서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경청해야만 한다. 서 있는 채로의 정지 상태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생활공간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상한 모습이다. 이것은 ‘목격’된다.
실제로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한 주민이 뭐하는 것이냐고 항의를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퍼포머와 관객은 항의에 응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은 공연 중이니까 말이다. 예술이 상연되도록 허락된 공간에서는 ‘관람’과 ‘낭독’이라는 행위는 그 공간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합의한 규범에 따르고 있어서 매우 자연스러운 행동이지만,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생활공간에서 같은 행동을 재현하면 그것은 너무나 의심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만약 벤치에 앉아서 듣는다면 그건 그렇게 수상해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건 생활공간의 규범에 수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 알 수 없는 두 사람이 특정한 장소에 특정한 시간에 규칙적으로 반복하여 등장해서 가만히 서 있다가 사라진다면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게다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는다. 즉 그 장소의 주민들에겐 관객에게 일어나는 것과 정반대의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
연기하는 자
요컨대 이 공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퍼포머가 설계한 동선을 이 장소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관점에서 완전히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쉽게 오지 않는 저수지 같은 곳은 오히려 진부하다. 그곳은 이미 생활공간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전시 공간 혹은 철거가 예정된 투쟁의 공간과 유사하다. 그러나 주택들이 밀집한 어느 골목길의 가로등 아래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가만히 있는 행동을 반복한다면 그것은 매우 이상한 일처럼 보인다. 관객은 물론 공연에 참여하고 있다. 관객은 자신에게 주어진 규칙을 따르고 있으며 성실하게 공연을 관람/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것은 낯선 모습이다.
이때 관객은 배우가 된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퍼포먼스의 규약을 따르는 일이 낯선 이들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견디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향유자가 퍼포머와 구분되지 않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예술가와 향유자의 관계가 아니라 그 관계가 빚어내는 견고한 신뢰 관계가 다시 누군가에게 목격된다. 즉 이웃 주민들의 의구심 어린 관심이야말로 이 공연의 핵심이다. 우연히 발견한 이들을 유심히 ‘보는’ 순간, 자신에게 보이는 것이 규칙적으로 ‘출현’한다는 것을 깨달은 그 장소의 거주인은 이 공연의 초대하지 않은 관객이 된다. 이것이 공연인지 모르는 관객, 동시에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것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관객이다. 그러나 퍼포머도 관객도 이러한 노력에 응답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지금은 공연 중’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의문
나는 이 글을 퍼포머의 관점에서도, 향유자의 관점에서도 쓰지 않았다. 그 장소에서 거주하고 있는 자들의 관점에서 다루고자 했다. 그 장소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이 공연은 가볍게는 이상한 것, 진지하게는 공포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게다가 채널헤드는 자신이 이상하고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다. 왜일까? 나 역시 비바람이 몰아치는 우산 속에서 헤드폰을 쓰고 디자인된 사운드를 듣고 있을 때, 비옷을 입은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견주가 우리를 낯선 눈으로 쳐다봐도 어떤 설명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헤드폰으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사실상 이 공연에서 채널헤드는 낯선 이를 만났을 때 그들이 이 공연의 설계에 해당하는 요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그것에 대한 반응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것은 우리가 향유하는 예술이 우리의 사회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채널헤드는 집중한다. 작가들이 책상에서 쓰고, 직접 읽어서 녹음되었으며, 사운드 디자이너에 의해 정교하게 다시 만들어진 작품을 헤드폰을 통해 향유하고 있으며, 이 향유를 위해 평소에 잘 이동하지 않는 시간에 큰 에너지를 들여 공연에 몰입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깨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관객은 그 순간에 선택할 수 있다. 나에게는 공연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이상해보일 뿐 아니라 심지어 공포스러운 것으로 보이는 이 상황에 대해 누군가 용기를 내어 질문하는 상황이 펼쳐진다면 이것은 위험한 것이 아니니 안심해도 된다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예술의 규약에 ‘훈련된’ 향유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술에 익숙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는 이인환각연쇄고리의 관람을 마치고 나를 수상하게 바라보는 한 거주인의 눈빛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그 눈빛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예술을 향해 보여주는 익숙한 표정이 아닌지, 그리고 그 표정에 대해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음으로서 하나의 의문이 되고, 그 의문에 대해 무엇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는 관객들의 선택이야말로 현재 우리의 예술이 아닌지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이것의 옳고 그름에 대해 논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다만 이 ‘응답 없음’의 상태가 무엇을 뜻하는지 같이 고민해보고 싶을 뿐이다. 모든 이동이 끝나고 ‘강북구 인수봉로 301’로 돌아왔을 때, 어째서 내게 주어진 질문지에 ‘자물쇠’라고 적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정교하게 설계된 작품의 규약을 성실하게 따르는 것이 초대하지 않은 관객에게 수상한 의문이 되는 일이 갖는 가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지.
2022.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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