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

2022년 4월 7일, 일본어로 번역된 「날짜-거점」이 수록된 《분게이》가 일본 전국의 서점에 배포된 후, 한국어로 된 원고를 읽고 싶다는 독자들의 요청을 받았다. 처음엔 포스타입과 같은 플랫폼을 통해 유료로 원고를 유통할 계획도 염두에 두었으나, 이 글이 일본의 문학잡지에 실려 일본에 거주 중인 독자들에게 우선 도달한 특수한 위치성을 한국 독자들에게도 유의미하게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 과정에서 현재 도쿄에서 거주하며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 중인 조혜수와의 협업을 구상하게 되었다. 협업을 요청하며 전송한 청탁서는 다음과 같다. 

 

조혜수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인터뷰-비평 원고를 청탁 드립니다. 
본 원고는 장은정 비평가의 「날짜-거점」에서 거론된 동일한 날짜에 조혜수 선생님의 사적/공적 시간이 어떻게 경험되었는지, 그리고 그 경험을 어떻게 언어화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구성되는 비평적 대화를 독자들에게 제안하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사각 출판은 비평적 행위를 ‘평문 쓰기’에 제한하여 사유하지 않고, 서로 다른 삶들이 갖는 차이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대화 공간을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본 인터뷰-비평 원고는 2022년 6월경 『침투』(사각, 2021)의 열세 번째 글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이에 다음의 내용을 청탁 드립니다.

원고명 조혜수, 「거점-이동」
마감날짜 5월 31일
원고료 50만원
고료 입금예정일 6월 1일

2022년 5월 6일
사각 출판사 드림

 

「날짜-거점」은 특정한 내용을 주장하는 글이라기보다는(만일 이 글이 주장하는 바가 있다면 단 하나, “우리는 다른 삶을 살아 왔다”는 문장이 전부일 것이다), 달력에 표기되는 ‘날짜’라는 조건을 임시적으로 ‘점거’하고 그 시간에 머물렀던 서로 다른 경험들에 대해 들려주기를 독자들에게 요청하는 ‘기획’에 가깝다. 어떻게 하면 글쓰기가 저자의 자기 주장이 아니라 사유 구조에 대한 제안이 될 수 있을까? 이는 내가 한반도 거주자로서, 일본에 거주 중인 독자들에게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아왔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글이 될 수 있도록 고민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다음의 대화는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분게이를 사러 가는 길

제작. 조혜수

 

 


「거점-이동」

묻는 이. 장은정

답하는 이. 조혜수

 



[허브]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 큐레이터 조혜수라고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써내지 못해서 원고로 쓰려던 것을 인터뷰로 대체하게 되었죠. 자기 소개를 한다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거점을 정하는 행위 아니겠어요.


《분게이》에 실린 「날짜, 거점」을 처음 완독하고 나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이 사실을 알고 계실지 모르겠는데 《분게이》에 발표된 글의 제목에는 ‘요미가나(読み仮名)’가 달려 있습니다. 일본어는 한자로 단어를 쓴 뒤 그 위에 그것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에 대한 표기인 요미가나를 달 수 있거든요. 요미가나의 재미있는 점은, 그 한자가 실제로 발음 되는 읽기 방식과 전혀 다른 단어를 붙여 그렇게 읽도록 유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예를 들어서 《분게이》에 발표된 글의 「거점」이라는 단어 위에는 ‘허브’라는 단어가 쓰여 있습니다. ‘거점’을 한자로 쓴 후, 그 위에 일본어의 고유 글자인 가타카나를 사용하여 ‘허브’라고 쓴 거죠.

대략 이런 느낌

 

활동이 되는 중심지라는 뜻이에요. 의미상으로는 거점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번역이지만, 한자와 영어를 동시에 두고 보았을 때는 반대의 이미지가 연상되죠. 거점拠点/據點이 ‘근거가 되는 점’이라는 의미인 반면, 허브는 ‘The central part of a wheel’, 즉 중심이 되는 바퀴 축이라는 의미입니다. 둘 다 고정되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후자는 하필이면 바퀴인 탓에 매우 동적으로 감각되지요. 거점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충분히 번역이 가능한데도 번역가는 왜 허브라는 읽기 방식을 제시했는가? 이것은 저와 마찬가지로 번역가도 글 안에서 드러나는 어떠한 움직임에 이끌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분게이》에 실린 기존의 글이 반점을 사용하고 있는 반면, 제 브이로그에서는 이 프로젝트가 「날짜―거점」으로 표기되고 있어요. 그것은 무수한 점과도 같은 날짜들로 이루어지는 연속성, 그리고 다른 땅에서 같은 제목으로 글을 쓰는 나의 위치성을 떠올리는 동안 정착하게 된 표기입니다. 그래서 번역가 선생님의 ‘허브’라는 (무)의식적 선택에서 저는 거점이라는 단어를 향한 우리의 연결감-대화를 감지합니다.

 


[스몰토크]

 

2022년 4월은 어떤 시간이었나요?
제게 올해 4월의 감각은 연장된 3월입니다. 한국의 대선이 끝나고 딱히 할 만한 거짓말이 없는 만우절을 지나면서 4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윤석열이 당선된 뒤로 일본에서 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떤 질문인가요?
가령 3월에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아트페어에 업무상 갈 일이 있었고, 그때도 제가 한국인이라는 걸 상대가 아는 순간에는 늘 질문을 받았죠. “한국 정권이 바뀌었는데, 앞으로의 미술시장에 어떤 영향이 있을까요?” 같은 질문이요. 그들 나름은 제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시작하는 ‘스몰토크’였지만 제게는 너무 거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스몰토크가 아니라 거대 담론인데요.
그렇지요. 그것은 저에게 단순히 문화예술의 지원이 얼마나 많아지고 적어지냐 정도의 문제는 아니지요. 한일 관계는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해석과 반응이 민감하게 달라질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이럴 때 저는 항상 섬세하게 단어를 고르게 됩니다. 하지만 짧은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질문은 연달아 이어집니다. 스몰토크에서 생기는 1초의 침묵은 매우 길다는 건 잘 아실 겁니다. 아주 잠깐 생각했을 뿐인데 또 다른 질문이 이어지죠. “바뀐 정권은 친일(新日)이던가요?” 라고 하더군요.


! 놀랍네요.
한국인 입장에서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질문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제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친일(新日)’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이 아시아 전역에서 모두 상이하다는 것입니다.


그 질문자는 어떤 의도로 ‘친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건가요?
그 사람이 사용한 거니 정확하게 제가 얘기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인 어떤 패턴으로 가정을 해본다면 단지 “일본을 좋아하느냐”는 나이브한 의미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일본에게 우호적이냐?”
네. 그러니 한 단어로도 의미가 매우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조금 전의 요미가나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서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 중국, 대만, 일본까지 모두 친일(新日) 혹은 반일(反日)이라는 단어를 같은 한자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같은 맥락을 가지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어떤 거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에 따라 같은 일본인이어도 이 단어들을 다른 의미로 사용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 경험을 미루어 보았을 때, 한국의 보수 정권이면 일본에 우호적이고 친일, 진보 정권이면 반일 성향,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와 같은 단어들을 사용할 때 저의 ‘동시 위치성’을 고려하게 되지요. 한국인으로서 한국 사회에 소속되어 있지만, 일시적으로 바깥에 나와 있는,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발 딛고 서 있는 곳과 또 다른 맥락 속에도 동시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무언가를 설명해야 합니다. 즉 제게 언어란 무엇을 거점으로 삼느냐의 문제이죠. 3월은 그런 것을 굉장히 많이 고민했던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공백]

 

그러면 다음 날짜로 넘어가보겠습니다. 2021년 12월은 어떤 시간이었나요?
제게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늘 어딘가에 거점을 두고 살아왔다고 생각했으나 이 원고를 쓰면서 그 거점이 확실한 것인지 잘 알 수 없게 되었어요. 질문하신 2021년 12월에 저는 일본에 있었고, 한국에서는 박근혜가 사면되었죠. 바다 건너 본국에서는 정치적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는데 저는 그와 동시에 매우 일상적인, 얼핏보면 그것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로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요? 저는 대답하지 못합니다. 이 기간에 대해 떠올리는 것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왜일까요? 오히려 가까워서?
네. 그리고 이 기간에 대해서 쓰는 것이 어떠한 죄책감을 느끼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궁금해요.
제가 가장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시점은 2016~2017년 즈음입니다. 문단 내 성폭력 사건에 대해 모두가 이야기할 때 저는 문예창작과 학생이었습니다.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저는 강남에 살고 있었지요. 이러한 위치적인 맥락도 있고, 그 시기에는 많은 시위를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020년 즈음부터는 거의 일본 사회를 중심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저에게 최근의 시간은, 말하자면 ‘한국 공백기’같은 겁니다. 2017년 즈음 한참 저와 함께 페미니즘 동아리 활동을 했던 친구가 작년엔가 전화를 해선 그러더군요. “언니, 나는 그때 언니들이 있어 너무 행복했어. 그런데 매일매일 까치발을 하고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어.” 끝없는 자기 검열이 극에 달았을 시기에 우리는 함께했고, 지금 그 친구는 한국에, 저는 일본에 살고 있지만, 둘 다 어쩐지 지난 시절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그 몇 년 전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것을 ‘퇴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도망친 것만 같은 느낌, 그런 특이한 감정들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존재했습니다.


저 역시 「날짜-거점」에서 2016년부터 2019년까지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 2022년의 위치에서 ‘멀어진’ 감각에 대해 썼어요. 그런데 제게 ‘오래된’ 느낌이 혜수에게는 ‘도망친’ 감각이었다는 것이 의아해요. 왜냐하면 외국인으로 살게 되면서 어려움이 더 가중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했거든요.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외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겹쳐질 때 또 다른 층위의 정치적 약자가 되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명확한 편견을 너무 쉽게 스스로의 것으로 취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저는 많은 것을 ‘모르는 척’하기도 했어요. 이것은 다른 사회에서 살아가는 자기 자신을 이용한 기만이죠. 하지만 그 ‘모르는 척할 수 있음’은 어떤 울타리처럼 제게 안전함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분게이》의 주제였던 ‘분노’에서 은정이 말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움직임에 어쩌면 나 자신이 속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혜수가 변화에 반대하면서 분노를 느끼는 건 아니잖아요?
아니죠. 아니지만 분노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조용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아,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의 자리에 대해 새로이 고민하게 되네요.
개인적인 경험에 비롯된 생각이지만, 사실 이러한 위치성이 일본 사회에서도 꽤나 발견될지도 모릅니다. 은정은 이 글에서 ‘승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지요. 하지만 현실의 정치 상황에 대해 묘사하며 싸움에서 이겨 환호하는 표현이 일본어로 쓰여 있는 것을 읽었을 때 저는 다소 낯선 감각을 느꼈습니다.


일본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인가요?
의미적으로는 당연히 사용될 수 있습니다. 낯설었던 건 아마 일본의 정치 구조가 한국처럼 치열한 양당 구도가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이 대결 구도 자체가 짬짜면이나 밸런스 게임 같은 거 아니겠어요.


확실히 한국 사람들은 정치를 스포츠로 대하는 태도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저는 한국의 시위(데모) 문화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야말로 어떤 종류의 집단적 플레이(Play)를 행하는 듯한 시위 방식에 대해서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놀이’가 아니라 ‘플레이’요. 음악을 틀 때도, 축구를 할 때도 플레이인 것처럼, 무언가 ‘특정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 플레이(Play)죠. 아까 말한 바퀴 축(허브) 같은 동사인 거잖아요. 역동적이지요.

 

 

[불출석]

 

혜수는 남북정상회담을 어떻게 받아들였나요?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제가 2016년에 문예창작과 합평 수업에서 썼던 소설 이야기를 간단히 먼저 하겠습니다. 제가 그때, ‘탈북민인 대학 동기와 룸메이트로서 함께 살면서 미묘한 연애 감정을 가지게 되는 퀴어 소설’을 학교에서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어떠한 정치적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기보다, 무언가를 대상화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이유는 합평 시간에 일어난 일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죠?
소설에 대한 합평 날짜가 하필이면 예비군 훈련일이었던 겁니다. 제가 남북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썼는데 정작 이 남한의 남성들은 전부 다 군대에 가서 그들의 의견을 들을 수 없었던 거에요. 올 필요 없으니까 제 소설도 안 읽었고요. 그날 수업에는 여학생밖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건 실화라고 하기엔 설정 과다인데요. (웃음)
저는요, 이 소설을 다시 쓴다면 이 예비군 훈련일 사건이 꼭 소설 속 내용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독이모』에서의 서독이모가 희곡을 썼던 것처럼, 남북에 대한 소설을 써내는 제가 실제로 현실에 존재했지만, 합평을 할 때 남학생들이 다 군대를 갔다고요.

 


박민정 소설가의 『서독이모』에서 서독이모가 “언젠가 꼭 남북 통일에 대해 써보았으면 좋겠구나”라고 권유하는 대목이 2009년으로 설정되어 있는데요, 혜수에게 이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요?
가라타니 고진이 2005년에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해 이야기할 당시 저는 초등학생이었고 학교에서는 〈북한 어린이들에게 편지 쓰기〉를 학급 활동 시간에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참여정부 시절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서독이모가 2009년에 “언젠가 꼭 남북 통일에 대해 써보았으면 좋겠구나”라고 조카에게 말했지만, 조혜수 어린이는 그 서독이모 나이대 사람들의 기획을 통하여 실제로 북한의 어린이들에게 (절대 보내지지 않을) 편지를 쓴 거죠. 담임 선생님께 검사도 받고요. 남북정상회담이 끝난 지금도 그 편지는 보내지지 않은 채 집에 보관되어 있네요.

84년생 장은정이 대학생 때 근대문학의 종언을 주장한 가라타니 고진에 대해 배우는 동안 93년생 조혜수 어린이는 학교에서 북한 어린이에게 편지를 썼다는 사실이 조금 얼얼합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발견했는데 지금도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통일 포스터’를 그리고 있었어요.
모두가 정치에 참여하고 있지만 사실은 늘 불출석 상태인 기이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네요.

 


[각주-이동]

 

《분게이》에 일본어로 실린 「날짜, 거점」을 읽는 것은 한국어로 인쇄된 글을 읽는 경험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분게이》에 실린 글엔 각주가 많아요. 저는 각주를 정말 즐겁게 읽었어요. 왜냐하면 그게 ‘우리’는 당연하게 아는 것들이었거든요. 광화문이 어디 있고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 장소이고, 박정희가 박근혜의 아버지라는 것, 그리고 사각 출판사의 의미와 시옷과 기역이 가진 각과 발음 같은 것이요. 이런 것들은 지식이라기보다는 신체에 각인된 어떤 풍경 같은 것이죠. 배경지식이라고 말하기도 참 애매해요. 내게는 너무 당연하지만 일본어가 되었을 땐 새로운 것들이요.


언어는 풍경인 것 같다고 했던 혜수의 브이로그 속 대사가 다시 한 번 떠오르네요.
랜드스케이프죠. 그런데 그 랜드스케이프가 「날짜, 거점」에서는 번역가 선생님에 의해 언어로써 번역되어 각주라는 형태로 달리게 된 거죠. 제가 일본에서 「날짜, 거점」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은, 지금의 나의 생활이 ‘이동하는 나와 나의 삶’이라는 거점에 계속해서 각주를 달고 있는 행위로 지속되고 있다는 거였어요. 인터뷰 초반에 말씀드린 “바뀐 정권은 친일이던가요” 같은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들처럼, 계속해서 나 스스로에게 각주를 달아야 한다는 것. 마치 내 존재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이요.


한국 독자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이 글이 처음부터 한국어로 만나는 글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설사 현재 한국어로 읽으신다고 하더라도, 마치 거울을 대고 거기에 비친 글자를 읽는 마음으로 읽어내는 것이 바른 읽기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조혜수 독립 큐레이터. cho.hyesu.0@gmail.com

 

 


나가며

 

이 소책자의 ‘들어가며’에서 「날짜-거점」이 “최근 7년간, 내가 분노하면서 사유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라고 소개했다. 저마다 자신이 가진 의견과 자기  표현조차 자본의 재료로서 경쟁 자원으로 삼는 관심경제의 시대에, 자신의 앎이 아니라 무지에 대해 질문하는 것, 더 나아가 무지를 대화의 거점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비평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소책자를 만들면서 나누었던, 조혜수 큐레이터와의 대화 역시 나를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다. 대화에서 요청한 날짜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2022년 4월 
2021년 12월 박근혜 사면, 남아프리카 공화국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의 코로나 확진
2021년 4월
2020년 코로나 시작 
2019년 박민정, 『서독이모』에서 화자의 진술. “그때쯤의 내겐, ‘남북 데탕트’라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 76차 유엔 총회
2018년 남북정상회담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탄핵 가결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출간, 박근혜 탄핵 시위
2009년 박민정, 『서독이모』에서 이모의 대사, “언젠가 꼭 남북통일에 대해 써보았으면 좋겠구나”
2005년 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언」 발표. 

 

이 소책자를 손에 쥐고 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남김없이 읽어준 당신은 저 날짜에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우리가 같은 지구별에 살고 있더라도 각자의 삶을 저마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압도적인 개별성들에 서로 귀 기울이는 일, 그리고 내가 다 안다고 믿고 있던 과거의 시간을 당신의 관점으로 재구성하는 일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비평의 시간이 아닐까.

 

(2022)

 

 

「날짜-거점」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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