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희망도 없는 사람이 글을 써도 될까? 이미 세상은 절망과 패배감으로 가득한데 이에 맞서기는커녕 동조하며 가담하는 글이 더 필요할까? 내게 주어진 청탁 주제가 ‘비평을 읽지 않는 시대’임에도 글쓰기의 자격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글을 시작한 이유는 설령 아무도 읽지 않는다 해도 쓰겠다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오래 곱씹어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비평을 읽는 것일까?’ 이처럼 쉬이 손에 잡히는 것이 없는 질문은 사람을 소진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나를 무한정 확장되는 세계에 막막히 내버려 두기 보다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으로나마 한정하기 위해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그 글은 무가치한 것일까?’ 쪽으로 어느 순간 미묘하게 질문의 방향을 틀었던 것 같다.
여기에는 경쟁시스템으로 모든 질서가 대체된 각자도생의 사회에 던져진 한 사람이 열악한 삶의 조건들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그 가치를 쉽게 폄하하지 않고 나의 언어로 직접 설명해 내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 유치하지만 비장하게 서려 있었다. 시를 읽는 마음이 그러했다. 비평만큼이나 누가 읽는지 알 수 없을 시를 읽고 있노라면 나라도 항변하지 않으면 끝내 어떤 가치가 소진되는 것만 같았고(물론 그건 착각이었지만) 적어도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도는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시 비평’의 독자는 언제나 ‘덤’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진정으로 믿는 것을 쓴다면 그것을 반드시 읽어주는/필요로 하는 독자는 있으리라고, 그것이 소수라고 한들 그 숫자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세상과 마찬가지로 함부로 폄하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시와 비평을 이어주던 확고한 끈이 끊어졌다. 내게 문학평론가란 비평적 대상이자 근거를 문학으로 여기는 사람을 뜻했고 나는 더 이상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읽은 문학평론가들은 네가 말하는 ‘문학’은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질문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문학평론가들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비평’을 규정할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나 2020년을 기점으로 나에게 중요한 질문의 주어는 더 이상 문학이 아니었고 그 자리를 ‘비평’이 대신했다. 이젠 문학이 무엇인지 답하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비평에 대해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타인에게 충분히 설명할 수 없었다.
문학평론가들은 말할 것이다. ‘문학’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하는 대상이므로 네가 문학을 무엇으로 간주하고 있더라도 그것을 고정된 것으로 사유하고 안과 밖의 경계를 기반으로 하는 한 이미 문학에 대한 질문/사유/실천이 아니라고. 나는 그러한 반문 자체가 문학평론가들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고 더 나아가 그런 질문이 그들 자신을 이루는 중요한 구성된 일부임을 이해한다. 그러나 적어도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문학평론가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주제들이 사실은 도무지 자신과 무슨 상관인지 그 실감을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사람도 존재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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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지점에서 내게 ‘비평’은 다르게 시작되었다. 문학을 전공하고 문학잡지에 평문을 싣고 문학 연구자로서 살아가며 이런 일에서 자기 삶이 갖는 가치를 경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 문학이란 존재는 학창 시절에 잠시 배웠던 까마득한 과목 중 하나인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비평을 읽지 않는 시대’라는 주제는 참으로 안성맞춤이다. 첫째, 도대체 누가 비평을 읽는지 되풀이해서 묻거나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한들 써나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곱씹는 일을 그만두고 둘째, 작은 규모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존속하고 있는 비평 제도의 한계나 의의를 규명하려는 일도 잠시 중단한 채 셋째, 삶을 살아가며 결국엔 얹게 되는 이런저런 말과 행동들이 비평적 행위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식의 (비평의) ‘말’ 역시 상대화하는 과정 속에서야 비로소 열리는 것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최근 나는 ‘연대 실패’라는 제목의 비평을 발표했다.(링크) 한국 사회의 발전주의는 가족 단위를 중심으로 복지 정책이 구성되었으므로 기본적인 최소한의 생계도 어려워 벼랑에 내몰린 사람들이나 끝내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 연대가 부족한 ‘연대 실패’의 사회이므로 지금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읽기와 쓰기에 앞서 ‘듣기’라는 주장을 담았다.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후마니타스, 2021)를 주된 텍스트로 삼은 이 글을 보고 문학평론가들은 이 책에 실린 쪽방촌 사람들의 ‘말’이 결코 ‘문학’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하리라. 그러나 나는 쪽방촌 사람들의 말을 ‘문학’이라는 단어와 다시 관계 맺기를 요구하는 일이 과연 누구에게 중요한 일인지 묻고 싶다.
언젠가부터 우리의 여가 시간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간으로 대치되었다. 각자의 관심사(?)로 수백만 갈래 찢어진 알고리즘의 시대에 보다 더 면밀하게 읽는 행위가 우리의 연결을 더 희박하게 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작품 속으로 완전히 침잠하여 그 안에서 타인이 미처 읽어내지 못한 무언가를 다르게 건져내려는 일을 경계하게 된 것은 그러한 몰입이야말로 콘텐츠 플랫폼을 작동시키는 근본 원리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 아닌지 질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학비평’이라는 단어에서 ‘문학’을 대신하여 건축, 만화, 무용, 미술, 사진, 연극, 영화, 음악(이 나열은 가나다순을 따른다)……을 넣는다고 한들 마찬가지다. 나에게 중요한 것이 나에게‘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괄호에 넣은 후에 작업을 시작한다면 내가 속한 알고리즘 배열 자체를 어떻게 비평적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나에게 중요한 것이 어떤 타인에게는 무가치한 것일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비평에서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관심사를 중심으로 두었을 때 어떤 접점도 없는 타인과 어떻게 만나야 할지 고민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때의 비평은 치밀한 논리를 꼼꼼히 쌓아가며 누군가를 설득하는 자기주장의 글쓰기가 아니라 우리의 다름을 기반으로 어떻게 타인에게 말을 걸 수 있는지 고민하는 일이 된다. 하지만 이런 논리라면 나의 비평적 정의 또한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콘텐츠 플랫폼의 알고리즘 시스템이 각자의 관심사 속에서 서로를 고립시킨다고 판단하고 작품을 경유하지 않은 비평을 상상하고 실천하려는 일은 마찬가지로 ‘나에게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이런 일은 혼자서 노력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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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말에 한통의 메일을 받았다. 스스로를 ‘비평 콜렉티브’라고 소개하는 ‘누워있기 협동조합’으로부터 대안적 신춘문예로서 기획된 〈장판문예〉의 후기위원으로 함께 작업하길 원한다는 기획안과 후기 청탁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처음에 청탁 받을 때는 평론 분야를 의뢰받았으나 만화평론 한 편 이외에는 응모되지 않아서 시 분야로 옮기게 됐다. 최종적으로 〈장판문예〉에 자신이 쓴 시를 보낸 사람은 총 38명, 소설은 22명이었지만 평론 부문에서는 만화 평론 한 편이 전부였다는 사실, 즉 문학평론은 단 한편도 없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현재 문학비평을 쓰는 사람들에게 ‘대안적’ 신춘문예라는 기획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해도 될까?
사실상 〈장판문예〉에서 가장 핵심적인 기획이라 할 수 있을 ‘후기’ 코너는 신춘문예의 심사평에 대한 비평적 개입이다. ‘후기위원’이라는 호명은 ‘심사위원’의 대체이며, 이러한 기획은 후기위원들에게 심사평과 후기가 어떻게 다른가 하는 질문에 대해 각자 답하기를 요구한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후기를 맡은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자신이 맡은 작품을 쓴 작가를 수신인으로 명확히 설정하고 후기를 써내려갔다는 점이다. 마치 후기를 작가만이 볼 것처럼. 작가만이 유독 중요한 독자인 것처럼. 나는 〈장판문예〉를 통해 비평을 쓰는 이들에게도 비평 독자의 자리는 좀처럼 상상되기 어렵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작가 이외에 독자의 자리를 남겨두지 않는 비평을 과연 누가 읽을 것인가.
기존 제도에 대한 활발한 비판 속에서 ‘새로운’ 문예지라거나 문예지의 ‘혁신’을 외쳤던 시기가 과연 있었는지 아득할 정도로 여러 비평 매체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비평적 개입을 읽어내고 그 읽기에 어떤 말을 보탤 것인지 고민하는 이들이 점차 줄어든다고 느낀다. 안정된 지면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으니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평론가들이 금방 사라지기 일쑤다. 작품 한편 한편을 읽어내는 면밀함이 깊어지는 것만큼이나 작품과 비평을 둘러싼 진입 장벽과 한계 지점을 동시에 읽어내고 그에 다르게 응답할 수 있는 영역이 필요하지만, 다르게 발을 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도 날이 갈수록 무너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이것이 다만 비평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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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어떤 시들에 대해서는 들을 만한 이야기를 내놓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비평을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누가 읽는지 알 수 없어져서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이 모든 일들이 무슨 뜻일까 묻기 시작했고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스스로 할 말이 생겼을 즈음, 누가 읽는지 모르는 글을 계속 써나가는 일이 스스로 의미가 있다고 믿는 일에 불과하다면 계속 써도 될지 확신할 수 없어졌다. 글을 열며 물었다. 어떤 희망도 없는 사람이 글을 써도 될까? 이미 세상은 절망과 패배감으로 가득한데 이에 맞서기는커녕 동조하며 가담하는 글이 더 필요할까? 내게 남은 질문들은 겨우 이런 것이다.
오래 일했던 탓인지 그만둔 후에도 종종 청탁 전화나 메일이 오곤 했다. 최근 첫 시집들의 경향을 짚어달라든지 팬데믹 이후 문학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야말로 ‘문학평론’의 작업이었고, 그때마다 “더 이상 문학평론을 쓰지 않습니다.”라고 또박또박 쓰거나 말하면서 회신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무슨 대단한 사명감 없이는 일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지만 생계를 위해 수많은 부업을 더 이상 동시에 감당할 육체적/정신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임을 덧붙여 두고 싶다. 지금 이 지면은 문학평론이 아니라 오롯이 ‘비평’을 위해 주어진 드물고 소중한 기회이기에 적게나마 남아있는 비평 독자들을 향해 쓴다.
최근 읽은 기사에 따르면 서울에서만 13만 명의 청년이 6개월 넘게 외출하지 않는다고 한다. 전국 기준으로는 61만 명가량이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들 중 10대부터 30대의 가장 높은 사망 원인은 자살이고, 지난해 우리 사회에서 산업재해로 사망한 사람은 2,223명이다. 매일 이런 기사를 읽고 보면서도 누군가를 보호하려는 변화의 움직임보다 경쟁만이 더 심화되는 ‘연대 실패’의 잔혹한 사회에서 비평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지금 우리의 사회는 읽고 쓰는 것보다 듣고 말하는 일이 더욱 절실하다고 쓴 적이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매일 삶을 그만두기로 결정하는 이들을 돌려세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저 너에게나 중요한 것에 혼자 파묻히지 않도록 더욱 귀 기울일 수밖에. 내 삶도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워 어쩔 줄 모르면서 말이다.
기획회의 2023년 6월호 수록
장은정 / 비평가. riyuni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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