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정 단독 공연

NOTATE : 나의 세계는

2022. 9. 24 - 25 / PM 5:00

 

 

 

 

노트, 어둠, 소리 

해가 지는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한 기록

 

 

 


커튼 없이

 

 

미리 입장해서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무언가 다르다고 느꼈다. 그래, 커튼. 커튼이 없다. 영화관에 입장할 때 우리는 무겁고 두꺼운 커튼을 열고 실내에 들어선다. 연극을 관람할 때에도 스텝들이 커튼을 열어주면서 관객들을 맞이한다. 공연장도 그렇다. 커튼은 무대 위에 오를 사람을 비출 조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어둠을 먼저 만든다. 외부의 빛을 차단한 상태로 실내의 불빛마저 꺼진다는 것은 영화가, 연극이, 공연이, 그러니까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는 어디에도 커튼이 없었다. 입구는 유리문으로 되어 있고 천장은 높았으며 네 개의 벽 중 두 개의 벽은 긴 사각형의 창문들이 차례대로 자연광을 그대로 투과시키고 있었다. 공간은 넓고 천장은 높았으며 무엇보다도 밝았다.

 

 

 

이렇게 쨍하게 빛이 들이치는 실내의 공간에서 열리는 공연을 본 적이 없다. 자연광이 무대 조명과 다른 점이 있다면 누굴 비추는가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 쨍한 가을 햇빛은 창이 열린 형태에 따라 뮤지션과 청중, 스텝들을 구분하지 않고 쏟아졌다. 창문과 정면에 앉은 한 청중은 손바닥으로 손차양을 만들어 얼굴에 그늘을 만들면서도 고집스레 자리를 지켰다. 아마 이 공간은 교회였던 것 같다. 처음부터 소리의 울림과 빛의 각도가 무언가 사람을 고양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건축 특유의 밀도가 있었다. 아마 단상으로 썼을 무대에 한희정이 돌아앉아 있고, 관객석은 단상 방향으로 꼭짓점이 향하는 삼각형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각 꼭짓점마다 마이크가 세팅되어 있는 것을 봐선 그 지점들을 중심으로 한 공연의 동선을 대략 예상할 수 있었다.

 

 


작고 어두운 각자의 방

 

 

공연의 절반까지는 일종의 연극 같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희정이 그 단상을 마치 자신의 방이자 작업실처럼 편하게 걸터앉아서 관객들에게 전혀 말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공연들이 첫 곡을 한 후에 청중들에게 인사를 건네듯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고(그렇다 나는 이 글에서 청중과 관객을 일부러 혼동하며 쓰고 있다) 한희정은 정해진 대본대로 연기를 하고 때로는 메모나 일기를 읽으며 노래를 불렀다. 첫 곡은 〈우리 처음 만난 날〉이었고, 노래가 끝나자 2007년에 쓴 일기 낭독에선 '어느 곳에도 자신의 자리가 없는 것 같다'는 대목이 들어있다. 〈나무〉를 부른 후, 다음의 독백은 전문을 인용하고 싶다.

 

2008년 1월 18일, 작업을 하기 위해 얻은 이 작은 방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어둠 같다. 이것은 끊임없이 나를 단념시키려 한다. 단념, 생각을 자르는 것. 연주하는 손 끝을 베고 생각을 자르려는 칼처럼, 어둠에 둘러싸여 있다. 빛을 찾아 헤매기보다 더 깊이 들어간다. 만들고 연주하는 동안 이 소리는 아주 작은 빛이 될 거라 믿는다. 어두울 수록 더 빛나리라 믿는다.

 

2008년이라니,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의 한희정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나 자신을 떠올린다. 한희정의 음악을 듣고 있는 나를. 14년이 흐르고서야 나만이 작고 어두운 방에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2008년의 한희정과 그때의 내가 공연장에 함께 있는 것 같다. 한희정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녀도 나처럼 어둡고 작은 방에서 작업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는 나만이 갇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가을 빛이 들이치는 오후 다섯시, 2008년의 일기 한 대목을 들으면서 각자의 방에 갇힌 사람들을 생각한다. 다들 갇혀 있으나, 각자 혼자만 갇혀 있다고 느끼는 시간이다. 

 

 


한희정의 세계는

 

 

이번 공연의 제목은 "나의 세계는"이다. 이번 바이닐 첫 트랙이기도 한 이 곡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따라불러보자. "나의 세계는/ 낮도 밤도 아닌 아침과 저녁 직전/ 찰나의 한가운데/ 오랫동안 다듬어 왔던 하나의 문장" 그리고 이 공연은 바로 이 세계를 구현한 것임을 깨닫는다. 한희정의 세계는 낮도 밤도 아닌 아침과 저녁 직전, 9월의 늦은 5시부터 서서히 가을햇살이 저물어가는 동안이고, 우리는 그녀의 세계에 잠시 초대받았다. 그러니 이 공연이 곡을 부르는 일만이 아니라 메모와 일기로도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작은 메모들이 일기가 되고, 어떤 문장들은 노래가 된다. 이런 이유로 공연 중반까지 우리는 한희정을 '몰래' 보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녀는 마치 보는 사람이 없는 듯이 작업하고 노래한다. 단상은 몇 개의 계단으로 되어 있고, 한희정은 부스스 일어나 계단 하나하나를 차근차근 짚으며 내려가며 2010년, 2012년, 2014년, 2018년…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독백한다. 공연과 극이 뒤섞여있고, 여기서부터는 무대와 관객석도 뒤섞인다. 

 

 


우리의 세계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언제부터 한희정의 음악을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푸른새벽의 《Bluedawn》(2003) 앨범 이후 나에겐 대략 20년의 시간이 흘렀기에 그녀의 다음 작업은 나에게 그녀와 함께 다르게 살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2006년에 쓴 일기를 읽으며 시작하는 이 공연은, 오랜 팬들에겐 더욱 각별할 것이다. 높지 않은 단상의 무대가 한희정의 작은 방으로 설정되어 있고, 그 방에서 걸어나오는 건 한희정의 작업이 어디로 어떻게 옮겨가는지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며, 음악을 듣는 우리가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 돌아보게 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희정이 유리문을 밀고 나가서 계단을 돌아 복층 구조로 되어 있는 다음의 무대 위에서 연주자들과 대화하면서 손뼉으로 박자를 만들고 발을 구르면서 리듬을 쌓아가며 부르는 〈흙〉을 들었다면, 아마 《날마다 타인》( 2013) 앨범을 처음 들었던 날의 놀라움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 앨범에 담긴 한희정 특유의 명랑한 장난끼를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흙〉과 〈날마다 타인〉을 부른 후에야 관객들에게 "안녕하세요. 만들고 연주하는 한희정입니다." 인사를 건네도록 기획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설문지를 돌렸던 것, 왜 그런 설문지를 돌렸고 설문 결과는 어떻게 나왔는지, 관객들에게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린 일들이 소개되었다. 그리고 이번 공연에서 가장 인상 깊은 한 순간이 만들어진다. 관객에게 마이크가 넘어가고 한희정의 편지에 답장을 쓴 관객이 자신의 편지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관객과 한희정은 1:1로 연결되어 있었다. 저마다 그녀의 음악을 들어온 사적인 시간들이 있을 것이고 이 공연의 구성은 그 사적인 시간들을 떠올리면서 연주와 노래를 듣도록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한희정의 음악을 함께 들어온 다른 관객이 마이크를 켜고 자신이 한희정의 곡들과 어떻게 살아왔는지 들려주는 순간, 관객들의 사적인 시간들은 다른 관객과의 시간과 겹쳐진다.

 

 


너의 세계는

 

 

당신은 공연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너무나 쉽게 음악을 재생할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는 우리는 왜 마음과 시간을 들여, 이미 알고 있는 곡을 굳이 다시 들으러 오는가? 나는 공연을 다니면서 이런 질문을 오래 해왔고, 좋아하는 뮤지션을 직접 보고 노래부르는 것을 직접 듣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나에겐 공연을 누군가와 '같이' 보고 듣는 것이 중요했다. 이미 이어폰으로 나만을 위해 노래하는 것을 수백번 수천번도 들을 수 있지만 한날 한시에 모여 알지 못하는 당신들과 '함께' 듣고 있다는 것, 오로지 나만이 이 곡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했다. 코로나 이후, 모이는 것이 그 자체로 위험이 되어버리자 이런 사실을 매일매일 더 간절히 깨닫는다.

 

그런데 공연의 초반부, "2008년 1월 18일, 작업을 하기 위해 얻은 이 작은 방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어둠 같다."고 과거의 일기를 읽어내려갈 때, 아이러니하게도 공연장은 막 기울기 시작한 가을 햇살로 눈부실 만큼 환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공연이 진행되면서 해가 저물기 시작해 〈나의 세계는〉의 한 구절처럼 "낮도 밤도 아닌 아침과 저녁 직전/ 찰나의 한가운데"가 되었고 그 순간이야말로 한희정의 세계에 잠시 속하게 되었다는 점을. 《날마다 타인》( 2013)에 수록된 곡들을 듣고, 이제 마이크가 한 관객에게 넘어갔을 즈음엔 해가 꽤 저물어 공연장은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 어둑함 속에서 〈잔혹한 여행〉을 들으며 고양되었던 마음은 잊기 어려울 것이다. 그때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다른 어둠

 

 

글을 열며 이 공연장엔 커튼이 없었다고 썼다. 커튼이 없는 장소는 빛이 드는 것으로 두드러지기 마련이지만, 커튼을 쳐서 만든 어둠과 커튼이 없는데도 해가 지면서 공간에 쌓이는 어둠 역시 다른 것이라 쓰고 싶다. 2008년의 한희정은 작업을 위해 구한 방이 마치 하나의 어둠 같다고,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단념시킨다고 썼다. 그 무렵의 나 역시 한희정의 곡을 들으면서도 홀로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 만난 사람이 읽어내려가는 편지 속에서 그때의 어둠과 이 공연장의 어둠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어둠 속에 있어서 절망스러운 사람은 빛을 찾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둠이 절망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면 어둠은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다. 공연이 끝날 무렵엔 사진을 찍을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졌다. 그 어둠 속에서 한희정은 말한다. "실뜨기처럼, 기쁨이나 고민 어떤 모양이든 당신이 만든 실뜨기를 건네주셔요. 그것에 이어 다음의 모양을 음악으로 만들고 연주하겠습니다." 이 글은 나와 함께 공연을 보았던 당신이 있어서 만들 수 있었던 실뜨기이고, 그날의 공연 이후 한희정이 건네 받았을 수많은 실뜨기 중 하나이다.

 

 

 

/ 장은정 비평가

riyunio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