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16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은영 소설가의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문학동네, 2016)가 막 발간된 때였다. 이미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작가였기에 나 역시 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기다림이 이미 잡지로 발표된 작품들을 하나의 책으로 다시 묶어서 읽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대감 뿐만은 아니었다. 당시 시집이나 소설집의 신간에서 가장 먼저 펼쳐보는 것은 해설이었다. 첫 시집이거나 첫 소설집일 경우, 단행본의 단위에서 한 작가의 위치를 비평적으로 자리매김해주는 첫 지면이 해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받고 깜짝 놀랐다. 해설 도입부 부분이 작가가 이전에 받았던 문학상들에 대한 심사평, 그리고 문자 그대로의 ‘인상비평’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문학이라는 특정 장르에 있어서 ‘전통’이라는 개념이 갖는 위치성을 검토하기로 약속한 이 지면에서, 당시엔 배신감에 가까운 실망을 느꼈으나 점차 까맣게 잊어버렸던 그 해설이 다시 떠오른 것은 본문에 ‘전통적’이라는 표현이 쉬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글이 학술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엄밀히 공들인 글이었다면 전통에 대한 개념은 그런 방식으로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의미로 ‘힘을 빼고’ 썼기 때문에 가능했을 ‘전통’이라는 표현은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흥미로운 대목을 옮겨보자.
어떤 장르에서건 현대 예술에서 가장 으뜸가는 평가 기준은 참신함이다. 남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 자기만의 개성과 독창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그것이 전통적인 것과는 구별되는 현대적인 미의식이며, (…중략…)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쇼코의 미소」를 통해 최은영 작가가 만들어낸 앞서와 같은 반응들, 정통적이랄지 기교 없는 싱거움 같은 평가는 인상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평가를 받으면서도 그의 소설이 수상작이 되었다는 것, 그뿐 아니라 심지어는 감동적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는 점이라 해야 하겠다. 수사를 걷어내고 나쁜 쪽으로 말하자면, 정통적이다라는 것은 진부하다는 말이고, 기교가 없다는 것은 미숙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진부하고 미숙한데도 감동적이라고? 그건 참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어쩌면 감동이란 진부함과 미숙함을 통해서만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영채, 「순하고 맑은 서사의 힘」, 『쇼코의 미소』 해설 중, 문학동네, 2016. p.274~276.)
이천 년대 초반, 문학평론에서 바르트의 ‘저자’와 ‘텍스트’ 개념이 너무나 상식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서 각주를 따로 달아야 할 필요성이 없었던 시간마저 한참 지났으나, 2016년에 출간된 신인 소설가의 첫 소설집에서 등장하는 ‘감동’은 여전히 형식과 내용이라는 관습적인 이분법 하에서 이야기된다. 위 해설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최은영의 소설은 현대 예술이 요구하는 참신함이나 특별한 기교가 없음에도 읽는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점에서 몹시 특수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이 감동은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희미하고 조용한 성격과 그들이 ‘공감’으로 맺어지는 관계성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다.
그런데 최은영 소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어떻게 ‘전통’ 개념과 맞물리는가?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참고하자. “지적인 것이 아니라 정서적인 것을 통한 공감력이 포스트 계몽 시대에 유효한 새로운 계몽의 양식일 수 있으리라는 말은, 이 책을 다 읽은 독자들을 위한 사족으로 달아두고 글을 맺자.” 즉 참신함을 가장 뛰어난 요소로 삼는 현대 예술적 감각이란 사실상 계몽시대의 산물인 ‘지적’ 근대성이며, 이 소설이 가진 ‘정서적’ 감동은 포스트 계몽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형태의 정서작용이라는 주장이다. 인용한 부분과 함께 이해하자면 결국 전통적인 것이 가장 새롭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런데 이 논리는 얼마나 근대적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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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피상적으로는 20세기 이전의 유산을 우선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끝없이 새로운 것이 다시금 요구되는 현대예술의 하위 장르로서의 문학적 ‘전통’은,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로 분류되는 2016년에도 기존 현대예술의 위반이자 대안으로 제시된다. 즉 만일 새롭게 다시 동원될 수만 있다면 ‘전통’의 시제는 언제든 현재화 된다. 이는 사실 한국문학의 비평에서만 반복되는 현상이 아니며 이미 콩파뇽이 그 역설을 적절히 지적했듯, “모더니티는 훗날의 자기 자신과 대립할지는 몰라도 더 이상 아무것과도 대립되지 않는다. 예술은 역사의 시간과 진보에 밀착되어버렸다.”(앙투안 콩파뇽, 이재룡 옮김, 『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 현대문학, 2008. p.33.)
한국문학의 ‘전통’을 다루는 이 지면에서 어쩌면 좀 더 학술적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전쟁과 분단을 경험하면서 한반도 거주자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뿌리 뽑힌’ 존재*로 이해하게 되는지에 대해, 이후 문지 그룹으로 성장하게 되는 ‘산문시대’와 ‘창비’ 그룹이 전통 단절론을 극복하기 위해 70년대에 한국근대문학사를 어떻게 썼는지, 그리고 이러한 작업이 어떻게 지금까지 작동하는 문학출판계 제도를 만들어 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2020년대 현재에도 활발히 활동 중인 최은영의 첫 소설집 해설에서 ‘전통’이라는 용어가 그토록 오래 축적된 문학사적 맥락을 일시에 소거하고 새로운 ‘일상 언어’로 (재)출현했다는 사실이야말로 문학평론이라는 장르가 신인 작가를 향한 찬사 문법의 반복이라는 층위에서 검토해보는 하나의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우려하고 있다. 이 글이 한국문학사에서 ‘전통’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전유해왔는지 나열하고 설명하는 행위를 통해 한국사(라고 상상된) 지식을 다시 한 번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재생산하는 것에 기여하게 되지 않을지. 나는 한국문학 연구자이고 한때는 한국문학 평론가라고 스스로를 소개했으나, 이제와 돌이켜보건대 연구자라거나 평론가라는 직업명보다 ‘한국’이라는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온통 알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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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육체적 나이는 늙었지만, 내 정신의 나이는 언제나 1960년의 18세에 멈춰 있다. 나는 거의 언제나 사일구 세대로서 사유하고 분석하고 해석한다. 내 나이는 1960년 이후 한 살도 더 먹지 않았다.(김현, 『전집7:분석과 해석/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 전망』, 문학과지성사, p.4.)
한국문학 연구자 중에 위 문장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 문장은 1988년, 막 마흔 여섯 살이 된 김현이 쓴 것이다. 한국문학사를 읽는 일은 수많은 선언의 순간들을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특정 시대의 가치를 규명하기 위해, 때로는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기 위해 ‘선언’의 형식은 수차례 활용된다. 자신의 사적 삶조차 4·19의 당시 나이인 열여덟 살에 멈춰있다고 말할 만큼의 가치 있는 사건이 있었던 시대를 산다는 것/살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처음 저 선언을 읽었을 때, 나는 첫 문장을 이렇게 비워서 읽었다. “내 육체적 나이는 늙었지만, 내 정신의 나이는 언제나 ( )에 멈춰 있다.” 어쩌면 내 삶에서도 어느 시간에 영원히 멈춰버릴 만큼 가치 있는 어떤 역사적 사건의 당사자가 될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나 역시 ‘한국인’이 아닌가?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부터 시작하고, 나 또한 이 헌법의 보호를 받고 있는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4·19가 나와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왜 나는 위의 인용에서 ‘1960년의 18세’를 괄호 처리하여 내 삶에 적용한 것일까?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사’는 주로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형성된 것으로, 한반도 거주자들이 식민지를 경험하고 한국전쟁과 분단까지 통과하면서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던 폭력에 의한 심각한 트라우마 및 열등의식에 대한 사상적 대응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한국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자기서사를 구성하기 위한 담론이었으며, 주로 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한국문학사’ 역시 4·19 이후 활발해진 민족주의의 흐름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이처럼 60~90년대에 이르는 특정 기간에 폭발적으로 생산된 지식 담론으로서의 한국사는 ‘주체성’과 ‘내재성’을 극히 강조하고 있어 직접적인 언급이 아니더라도 ‘단일민족’의 개념을 고취하기 쉽다. 이는 식민사관의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기존의 한국사와 한국문학사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나는 다음의 대목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옮겨 적고 싶다.
강요된 의존관계에 의해 식민체제, 부당한 국가, 착취적 결혼에 매여 있다면, 의존성을 극복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 것 같다. 그런 식의 예속화를 끊어내는 것은 해방과정의 한 단계, 평등과 자유에 대한 권리 주장의 한 단계다. 하지만 그럴 때 우리가 받아들이게 되는 평등은 어떤 버전의 평등인가? …중략… 우리가 자립을 통해 개인의 주권을 되찾거나 독립을 통해 국가의 주권을 되찾을 때 그 방식이 공거cohabitation에 대한 탈주권적 논의를 구상할 수 없게 만드는 방식이라면, 우리가 되찾은 주권은 끝없는 갈등을 함축하는 자족성에 불과하다. 어쨌든 지구상의 크고 작은 지역들 사이의 상호의존성 개념을 재고하고 쇄신하지 못한다면, 환경위협에 대한, 전 지구적 슬럼 문제에 대한, 구조적 인종차별에 대한, 전 지구적 공동 책임 하에 거주지를 찾아야 할 무국적자들의 처지에 관한, 그리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식민적 양태의 권력들을 좀더 철저하게 극복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없을 것이고, 사회적 연대나 비폭력에 대한 대안적 관점의 정식화 작업을 시작할 수도 없을 것이다.(주디스 버틀러, 김정아 옮김, 『비폭력의 힘』, 문학동네, 2021. p.68~69.)
60년대는 전쟁과 분단으로부터 비로소 얼마간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역사적 사건을 사유할 수 있는 조건이 비로소 확립된 시간으로 간주된다. 이때 한국사와 한국문학사는 과거의 강요된 의존관계로부터 그 의존성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그 주체성과 내재적 발전이라는 기획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았다. 이는 4·19가 열어젖힌 해방의 가능성 중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2020년대를 살아나가는 우리가 한국문학의 ‘전통’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의 목록이 특정 시대의 욕망이 투과된 상상적 산물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지나간 시간에 시작되었으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과거의 집적물들을 통틀어 ‘전통’이라고 호명하는 자는 누구이며 그 호명은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가? 그 욕망은 환경위협, 전 지구적 슬럼, 인종차별, 무국적자들이 겪는 고통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가?
글을 열며 최은영의 첫 소설집 해설에서, 이 소설들이 가진 미덕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전통’에 대해 이야기했다. 새로운 작가를 독자들에게 소개할 때 흔히 강조되는 ‘새로움’이라는 요소가 너무 오래 반복되다보니 이제는 가장 오래된 것일수록 새롭다는 역설에 이르렀다고도 말했다. 최은영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관계를 맺을 때 만들어내는 ‘공감’이라는 특성이 갖는 그 비평적 가치를 모더니티의 오랜 반복적 관습 속에 또 다시 위치시킬 필요가 있을까? 누군가는 최은영 소설가를 현재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명이라고 쉬이 소개하겠으나, 지금 비평은 최은영의 소설을 당연하게 ‘한국’문학이라는 개념으로 분류하는 그 관습에 대해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지구 생활자이자 한반도 거주자로서 문학에 필요한 비평일 것이다.
*“한국 문학은 선배 없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동시에 상당수의 작가·시인들이 월북하여 정치적으로 상대적인 위치에 서버림으로써, 30년대의 한국 문학의 문학적 결정들의 상당수가 일실되어, 유산 없는 시대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50년대의 한국 문학은 20년대의 한국 문학과 마찬가지의 혼란에 빠져버린다. 가장 표피적인 문제로는 그에게서 추천을 받고 싶은 선배 문인이 없어진 것이며, 가장 심각한 문제로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 없어진 것이다.”(김현, 「테러리즘의 문학」, 『현대 한국 문학의 이론/사회와 윤리』, 문학과지성사, 1991. p.248.
장은정 / 비평가. riyuni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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