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선언은 두려운 것이다. 선언한 내용의 달성 여부와 상관없이 선언 이후의 시간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20214, 첫 책을 내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비평을 쓴 지 올해로 13년 차에 접어들었다. 앞으로도 비평가로서의 글쓰기는 멈추지 않겠으나 앞으로 쓰이게 될 글은 그동안 써 온 글들과는 꽤 다른 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그 이후로 어떤 글을 써야 하는가에 대해 그다지 크게 고민하지 않고 지냈다. 글쓰기 이외에도 살아나가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은 너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에서 한국문학 번역가로 활동 중인 승미 선생님의 번역을 거친 한 통의 메일을 받게 된다.

 

안녕하세요.

저는 ‘가와에쇼보신샤河出書房新社’라는 출판사에서 문예지 ‘《분게이》文藝’의 편집을 맡고 있는 다케하나 스스무라고 합니다. 오늘은 저희 문예지 《분게이》에서 장은정 작가님께 집필을 부탁드리고 싶어 연락드립니다. 2022년 4월에 발행되는 《분게이》에서는 “분노”라는 주제로 특집 코너를 준비 중입니다. 일본뿐 아니라 해외 작가분의 글을 함께 게재할 예정으로, 소설, 에세이, 대담, 논고로 구성될 예정입니다. 이번 특집에서 장은정 작가님께 에세이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장은정 작가님께서는 한국에서 새로운 평론의 가능성과 출판의 가능성을 모색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과정에는 기존 사고법에 대한 분노가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또한 이는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감정이 아닐까 상상해보았습니다.

의뢰드리는 글의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1.게재: 《분게이》2022년 여름호(4월 7일 발매) 특집 ‘분노’

2.마감: 2022년 1월 31일(월요일)

3.분량: 200자 원고지 30매 정도(6000자 정도)

4.원고료: 5만 엔

 

모쪼록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가와데쇼보신샤 《분게이》 편집부

다케하나 스스무

 

나는 해외 매체의 첫 청탁을 기쁘게 수락했고 내게 주어진 주제인 분노에 충실하려고 했으나 원고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청탁서를 받았을 즈음 내가 가장 심각하게 여겼던 문제는 메일 내용에서 언급된 새로운 평론과 출판의 가능성보다 박근혜 전대통령의 사면소식이었고, 그건 내게 분노보다는 일종의 위협으로 경험되었기 때문이다. 속보 기사를 접한 후 나는 SNS 계정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은 문득 내가 너무 세상에 대해 정말 무지하고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근혜가 올해 사면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내가 세상에 대해 낙관적일 정도로 지나치게 무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하루 종일 떠나지 않네.”라고.

 

내게 분노란 자기 정당성이라는 ()의식적 판단 과정을 거친 감정이다. 그러나 나 자신의 판단 능력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고 있는 시점에서 분노라는 감정을 나의것으로, ‘현재의산물로 다룰 수가 없었다. 아마 이 주제가 2016년이나 2017년 즈음에 주어졌다면 나는 이 감정에 대해 쓰는 일에서 어떤 분열도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의 나는 잔뜩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는 20221월이었고 낯선 해외 매체로부터 건네받은 분노라는 주제를 받아 들고 다음과 같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7년간, 내가 분노하면서 사유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날짜-거점」

 

 

202112310, 대통령의 특별사면권리로 박근혜 전()대통령이 석방되었다. 판결 당시 징역 22년이 선고되었다. 그런데 석방이라니? 속보기사가 뜨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다. 누군가 가짜기사를 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몇 번의 검색 끝에 그것이 진지한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눈앞이 깜깜해졌는데 나 자신에 의한 충격 때문이었다. 라는 사람이 박근혜가 징역 22년을 모두 채울 것이라고 믿을 만큼 한국정치사에 무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풀려난다고 한들 정권이 바뀐 이후일 것이라고 짐작했지, 문재인 대통령의 특별사면의 권리로 석방될 것이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까맣게 잊었던 어떤 시간이 거짓말처럼 선명히 떠올랐다.

 

20191026토요일, 나는 광화문 광장 근처에 있는 한 호텔의 1층 카페에서 문학평론을 함께 쓰는 동료들과 약속이 있어서 외출했다.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역에서 내려서 계단을 오르는데 쩌렁쩌렁한 소리들이 들렸다. 출구로 나오자마자 광장은 태극기와 성조기로 가득하고 경찰들이 서서 집회 주최 측 근처를 드문드문 에워싸고 있다.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야했는데 금방 빨간불로 바뀌는 바람에 다음 보행 신호가 들어올 때까지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초조하게 횡단보도를 얼른 건널 수 있기를 간절히 기다렸던 적이 있었나? 70대 정도로 보이는 한 남성이 확성기를 바짝 가까이 대고 반발과 욕설을 섞어 몹시 심하게 화를 내고 있었는데, 그는 길을 건너기 위해 어쩔 수 없이서 있어야 하는 행인들 사이에 있었다.

 

그가 확성기에 대고 외치는 말은 대부분 욕설이었다. 함께 집회에 참여한 시위자들이 모인 곳에서 이탈해 횡단보도 앞, 즉 나처럼 길을 건너기 위해서는 잠시 머물러야 하는 행인들이 모인 곳으로 자리를 잡은 그는 당장에라도 어딘가 옮겨 붙기 위해 작정한 불씨처럼 보였다. 바람의 방향이 조금만 바뀌어도 내게 옮겨 붙을 것만 같아서 겁이 났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남성을 중심으로 시위자가 아닌 행인들이 일부러 몇 보폭 거리를 두면서도 동시에 그를 피한다는 느낌이 노골적으로 전달되지 않도록 애쓰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그와 행인들 사이엔 아주 미묘한 거리감이 형성되어 있었고, 신호가 바뀌자마자 다들 달아나듯이 그곳을 벗어났다. 나는 약속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동료들에게 물었다. “오면서 태극기부대 만났어요?”

 

그걸로 끝이었다. 우리는 최근 한국시가 소설에 비해 페미니즘 비평담론이 잘 형성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나눴고, 그 모임이 끝나고 광화문 광장으로 나왔을 때 그들은 해산하고 없었다. 사실 나는 박근혜 석방 결정이 나기 전까지도 그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는데, 나 역시 다른 방식으로 몹시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201610,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을 든 사람들이 광화문 광장에 주말마다 폭발적으로 모여들던 그 시점, 트위터에서는 ‘#문단__성폭력해시태그를 달고 그동안 한국의 남성 작가들이 위계를 이용하여 저지른 성폭력에 대한 고발들이 쏟아졌다. 그 목소리가 쉽게 휘발되지 않도록 작가들이 모인 연대체들이 생겨났고, 나 역시 그에 참여했다.

 

2017310,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서 가결되었다. 나와 친구들은 4~5개월째 수면부족에 시달릴 만큼 강도 높은 무리한 연대 활동에 점차 지쳐가고 있었으나, 탄핵이 결정된 것 역시 우리의 승리였으므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 그와 같은 결정이 누군가에게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부정의이자, 역사적 후퇴의 순간이었음을 여기에 새로 써 넣는다. 헌법재판소 앞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한 시위대는 헌재의 결정에 항의하며 경찰차를 부수고 차벽을 넘으려 했다. 그 과정에서 경찰차에 있던 스피커가 떨어져 시위자 중 세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들은 이번 석방 소식을 정의의 승리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나에게는 상상조차 못한 석방이 그들에게는 점차 누적된 활동에 대한 성취이자 승리가 아닐까?

 

*

 

세계적인 페미니즘 조류와 코비드19로 인한 팬데믹 시대 속에서 기존 사고방식에 대한 분노를 기반으로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게 되며, 이런 맥락 하에 이 감정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것이 내가 전달받은 이 지면의 기획의도였다. 그런데 내가 분노라는 키워드를 듣자마자 횡단보도 앞에 서서 확성기로 욕설을 퍼붓는 타인의 분노에 대해 떠올린 것은 새로운 사고방식보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유지하려는 이들이 가진 분노가 훨씬 강력하고 또 지속적이라고 체감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변화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역사적 위기이자 심지어 목숨을 걸고 막아야만 하는 불의라면, ‘새로운 것기존의 것사이에서 어떻게 나의 분노가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 타인의 분노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할까?

 

이모는 내게 “언젠가 꼭 남북통일에 대해 써보았으면 좋겠구나”라고 말했다. 내가 대학원에 막 입학했을 때였다. 2009년의 나는 저런 무성의한 말이 어딨을까, 생각했다. 문학이란 게 뭔지, 소설이 뭔지 다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누가 요즘 ‘남북통일’ 같은 단어를 꺼낸다고. 오랜만에 만난 이모가 감 없는 꼰대처럼만 보였다. (박민정, 서독이모, 현대문학, 2019. p.10.)

 

집에서 3분 정도 거리에 있어서 자주 가는 카페에서 박민정 소설가의 신작 소설 서독이모(현대문학, 2019)를 펼쳐 읽다가 위의 대목에서 크게 웃었다. 사실 이 웃음엔 몇 가지 맥락이 섞여있다. 첫 번째는 문예창작학과 출신인 나 역시 저런 말을 실제로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즉 이런 뜻이다. “, 맞아, 2009년 그 즈음에 문예창작학과를 다닌다고 하면, 꼭 어느 정도 배운어른들은 통일에 대해 쓰라고 했었지!” 두 번째 맥락은 이 말을 들은 화자의 반응, “2009년의 나는 저런 무성의한 말이 어딨을까, 생각했다.”는 말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나는 2004년에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한국문학 평론계에서는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을 두고 비평적 담론이 활발히 형성되던 시점이다.

 

90년대 한국문학 평론가들은 문학이 윤리적이고 지적인 과제를 짊어지기에 영향력을 갖는 시대가 끝났으며 이제 문학은 만화처럼 오락에 불과하고 세계적인 상품을 만들어주기를 그러나 순수문학 작가가 더 이상 잘난 척하지는 말아 달라는 고진의 일갈에 반박하는 비평들을 앞 다투어 내고 있었다. 하지만 84년에 태어난 나로서는 선배들의 반응이 어리둥절했는데, 에반게리온과 함께 성장하고 하루키를 읽으면서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입장에서 고진의 글과 당대 평론가들의 글은 그저 공부하는대상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런 나에게 통일로 소설을 쓰라니! 정말이지 무성의한 조언이 아닌가!

 

세 번째 맥락은 내가 2016년 페미니즘 리부트, 2018년 남북정상회담을 통과하면서 그들의 조언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무성의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다는 것. 서독이모에서도 내가 느낀 그 감각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이 소설은 다음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때쯤의 내겐, ‘남북 데탕트라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 이때의 그때가 바로 소설이 출간된 2019년이니, 10년 전에 들은 권유의 진의에 대해 이 소설의 화자 역시 새삼 다르게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어른들은 왜 그때 우리에게 통일로 소설을 쓰라고 했을까? 즉 어떤 말은 듣는 이에게 실제로 도달하기까지 무려 10년이 걸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언어에는 한 사람의 삶이 축적되어 있고, 그 축적된 시간을 가늠하려는 노력 없이 대화란 그저 공허한 글자와 소리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2019517, 문학평론가로서 첫 책이 나왔다. 단독 저서는 아니었지만 공동 저서라는 것이 나에게는 사실상 더 큰 의미였다. 13명의 여성평론가가 #문학은_위험하다라는 제목으로 각자 발표한 열아홉 편의 글들을 모았다. 개인 작업으로 발표한 글들인데도 한권의 책으로 묶어놓으니 서로의 글을 참조하고 반박하고 인용하면서 담론이 생겨났다. ‘이라는 매체가 가진 비평적 가능성에 새삼 놀란 기억이 난다. 당시 자주 언급되는 텍스트는 단연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이다.

 

당시 한국문학 평론계에서는 2017년부터 본 작품이 정치적·윤리적 가치를 강조하느라 설득력 있는 플롯을 갖추지 못해 미학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적 평가가 등장했고, 이에 맞서 작품의 미학성을 평가하는 것만이 현재 문학평론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지 되묻는 비평적 담론이 활발히 일어났다. 2022년에 다시 이 책을 펼쳐 내가 발견한 것은,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시대를 막 맞이한 여성평론가들의 벅참과 들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척 오랜 과거처럼 느껴진다. 어째서일까?

 

나는 20203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문학평론가로서 문학의 가치를 규정하려는 작업을 그만 졸업하겠다고 선언했다. 20204, 비평전문 출판사 사각을 등록하고 10년 간 문학평론가로서 발표한 글들을 내 비평적 가치관을 담아 첫 단독 비평집 침투(사각, 2021)를 발간한 이후, 많은 이들로부터 문학평론가비평가의 차이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가 팬데믹 시대와 겹쳤다. 즉 나의 비평가로서 경력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 세계적인 유행과 함께 시작된 셈이다.

 

얼마 전 한 다큐에서 제76차 유엔 총회에 참석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시릴 라마포사의 연설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 다큐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 세계 백신 확보율이 82%이지만 저소득 국가는 1%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인류에 대한 고발입니다. 우리가 이를 다루지 않는다면 대유행은 더 지속되고 새로운 변이가 다시 나타나 퍼질 것입니다.” 이 총회 개최 시기를 찾아보니 20219이었다. 그리고 20211213,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이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에 의한 코로나 확진자 판정을 받았다는 기사를 발견한다.

 

고백하자면 지금의 나는 분노보다는 공포에 질려있다. 나의 투쟁이 승리가 되었던 결정들이 이전의 질서로 하나하나 다시 되돌아가는 것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지고 서울에서 살아가고 있는 1984년생 페미니스트 여성비평가로서 나의 분노는, 2015~16년 시점에 그 정점을 찍은 것 같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다루는 사건들이 발생한 날짜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또박또박 기입하고 이 날짜들을 볼드처리해서 강조되도록 했다. 왜냐하면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이 시간들은 다른 서사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 서사에 대해 질문하기 위해서다.

 

나에게 분노가 횡단보도 앞에서 확성기를 들고 욕설을 퍼붓던 70대 남성의 이미지로 가장 먼저 형상화되었다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분노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상징적 이미지는 무엇인가? 내가 이 글에서 강조했던 날짜에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고 20224의 시점에서 그 시간들은 어떻게 회상되는가? 이런 차이들에 대해 대화하기 위한 필요한 최소한의 거점을 구성하는 것이 비평가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나는 그 거점을 달력에 표기된 특정한 날짜로 삼았다. 우리는 다른 삶을 살아왔다. 이 글이 서로 다른 삶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 (2022)

 

 

장은정 / 비평가. riyunion@naver.com 

 

 

조혜수와의 대화, 「거점-이동」 이어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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