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질서
 
장은정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 ‘나’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어 합니다. 내가 나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만큼 스스로에게 갇혀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 있을까요. 이영주의 두 번째 시집 『언니에게』를 읽으며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나 자신이 아닐 수 없는 순간들 속에서만 살아가야하는 인간이 감당해야하는 슬픔들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시집은 어느 페이지를 아무렇게나 펼쳐도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간신히 존재하는 것들, 살아간다기보다는 살아남은 것에 가까운 이미지들이 바로 그것인데요.

 

“새의 하나만 남은 발”(「력(曆)의 기원」)이라거나 “숲이 낳은 뭉툭한 아기들의 손발”(「자살법」), “고양이가 먹다 남긴 쥐의 얼굴”(「동거녀」), “단도로 반을 가른 개구리”(「활자들이 길게 타오르며 태양으로 올라간다」) “붕대를 감아도 통증을 감출 수 없는 나무들”(「소녀는 던진다」)에 이르기까지 시집 속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생명력으로 활기차기보다는 온통 절룩거리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미지들이 유독 기묘한 것은 그것이 강렬한 핏빛을 띄면서 역동적으로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노톤의 색감으로 매우 건조하게 죽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날선 비명도 고통스런 몸부림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들은 그러한 담담함이 읽는 사람을 더욱 몰입하게 만듭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뒤를 돌아보지 마. 구멍이 좁다는 걸 알면서도 내내 돌아보던 너의 흰 목에서 피가 흐른다. 노인은 신에게 경배를 드릴 때마다 조금씩 무릎이 부서진다. 너무 쉽게 죽은 사람의 이름을 말하면 안 돼. 한쪽 유방이 도려내진 브래지어를 보고 한 노인이 뒤를 돌아본다. 이것은 전염병일까? 목발을 짚은 사내는 꺼지지 않는 불꽃을 뒷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는다. 신은 뒤를 돌아보는 불경한 것들의 심장을 움켜쥔다. 아름다워지기 전에 뒤를 돌아보면 안 돼. 오르페우스는 어린 딸과 침대가 없는 외계(外界)로 가기 위해 천상의 노래를 부른다. 목소리를 잃고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본다. 제 다리를 뜯어 먹는 늙은 개. 


―「뒤」 전문



‘뒤’에는 “아름답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한쪽 유방이 도려내진 브래지어”나 “제 다리를 뜯어 먹는 늙은 개” 같은 것들 말이에요. 이들이 경고합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들키고 싶지 않으니, 뒤를 돌아보아선 안 된다구요. 이 경고에는 수치가 뒤섞인 간절함이 묻어 있습니다. 그것이 이 시의 도입부를 하데스의 금기가 아니라 절실한 부탁으로 들리도록 만듭니다. 한데 부탁을 받은 자 역시 “목발을 짚은 사내”처럼 마찬가지로 “아름답지 않은” 자입니다. 그는 결심합니다. “아름다워지기 전에 뒤를 돌아보면 안 돼.” 하지만 그는 “흰 목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아름답지 않은 것”들을 “내내” 돌아봅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들이 “전염병”처럼 시 속을 번져가는 것이지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아름답지 않은” 자들은 누군가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시인은 죽음을 풍기는 이러한 ‘아름답지 않은’ 불완전함을 외부의 강제적인 힘에 의한 훼손이 아니라, 본연적으로 이미 주어져 있는 필연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구나 기형은 정상으로부터 벗어난 우연적인 비정상이 아니라, 애초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내포되어 있는 필수적인 존재론적 속성인 것이지요. 어쩌면 ‘정상’이라는 것은 현상계에서는 불가능한 초월적 관념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는 불경한 것들의 심장을 움켜”쥘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신’ 뿐인 것이지요. 그러니 이 시는 아름답지 않은 것들에게 바치는 시, 아름답지 않은 자들이 아름답지 않은 자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내내 바라보게 되는 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시가 가장 슬픈 지점은 불완전한 아름다움을 “내내” 돌아보면서도, 궁극적으로 걸음의 방향은 바꿀 수 없다는 것.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간주되는 ‘앞’이라는 방향 자체는 바꿀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뒤에 남겨진 자든, 내내 돌아보는 자든, 모두가 ‘앞’을 향해 있다는 것이 이 시가 불러일으키는 슬픔의 본질입니다. 만약 ‘앞’이 없다면 ‘뒤’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불구의 이미지들에게 있어서 불완전함이 만들어 낸 빈자리는 바로 이 완전한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으로 출렁이고 있습니다. 그 열망이 수치를 만들어내고,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만들어냅니다.

 

놀라운 것은 이 불우한 존재론이 아주 오래된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이 존재론을 단순히 개별적 감정의 차원으로, 근대를 맞이한 현대인들의 어느 특정 시대의 산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린 저무는 사람들”, “태어나면서부터 우린 비린내를 풍기는 물건들.”(「저무는 사람」)과 같은 구절들이 잘 보여주듯이 생명의 불완전함이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새겨져있는 보편적인 구조입니다. 그러니 그 슬픔과 수치의 이력 또한 매우 오래 되었음을 예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장마」는 현재의 슬픔과 몇 세기 전의 슬픔의 밀접함을 ‘장마’를 통해 응축하여 보여주는 탁월한 시편입니다. 화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욱신거리는 등”에서 “몇 세기 전의 울음”을 감지해 냅니다. 이 시가 어느 극점이 다다르는 것은 다음의 구절인데요. “위로받지 못하는 건 점점 휘어가는 내 등만이 아니다. 어떤 종족은 사라지고 싶어서 비명을 안으로 삼킨다.” 내부로 날카롭게 향해있는 혐오가 개인적인 슬픔이 아니라 종족의 보편적 슬픔과 결합하고 있습니다. 어떤 슬픔이 이토록 깊기에 개인적 감정에 그치지 않고 후대에까지 이어지는 것일까요.

 

「해바라기」에서도 비슷한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부활하지 않으려고 귀에 독을 넣어주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완전함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요. “나를 만진다/모든 혐오감은 접촉에 대한 것”(「월식」)이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가늘게 어깨를 떨고 있습니다. 이 불우한 존재론의 슬픔이 점차 확대되어 우주적 질서로, 형이상학적 원리에까지 가닿는 것은 이 시집의 중요한 성취 중 하나입니다. 시집에 수록된 시들 중에 「미래안(未來眼)」은 감히 제가 판단하기에 이영주 시인만이 쓸 수 있는 아름다움에 닿아있다고 생각합니다.

 


크레타 섬에는 대리석과 염소와 죽은 왕들. 푸른 이마를 문지르며 노인이 옆 노인을 끌어안는 장면. 에게 해 절벽에서 우주 원자론이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 밤이면 얼굴을 깎아 비석을 세우는 여러 개의 니코스 카잔차키스 술집. 잘린 토끼 머리가 정육점 유리창에 매달려 귀를 길게 세운다. 죽는다는 건 홀로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는 것. 노인이 옆 노인의 목을 끌어안고 염소처럼 운다. 따뜻한 언덕에서 지친 노년이 다른 노년을 배웅하는 것. 저녁이면 흔들리는 에게 해 물빛. 수학 시간 옆자리에서 동맥 끊기 놀이를 하던 내 첫사랑 소녀의 까맣고 푸른 동공 같은. 절벽에는 죽은 왕들의 비밀 문자. 어린 왕은 진공 없이 텅 빈 바다를 봤다고 썼지만 홀로 남은 시간에는 우주에 꽉 찬 숫자를 보고 운다. 크레타 섬 정육점 유리창에 붙어 토끼 이마에 툭 불거진 뼈 하나를 보는 저녁. 노인이 천천히 쓰러지는 옆 노인처럼 푸르고 푸르게 물이 드는.


― 「미래안(未來眼)」

 


이국적인 소재들도 매혹적이고, 조용히 걷다가 문득 멈추는 듯한 문장의 종결방식도 매혹적이지만, 이 시가 가장 매혹적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죽음을 앞둔 노인들에 관한 시라는 점입니다. 시는 “죽는다는 건 홀로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홀로 있는 자신을 곧 마주해야하는 노인들이 “목을 끌어안고 염소처럼” 함께 울고 있습니다. “따뜻한 언덕에서 지친 노인이 다른 노년을 배웅하는 것.”이지요. 노년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듯한 ‘지친’이라는 수식어가 마음을 칩니다. 노인의 울음은 가장 외면하고 싶은 추한 인간적 진실들까지도 긍정하고 마주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존재의 불완전함은 노인의 울음에 이르러 가장 완성된 형태에 도달합니다. 

 

“어린 왕은 진공 없이 텅 빈 바다를 봤다고 썼지만 홀로 남은 시간에는 우주에 꽉 찬 숫자를 보고 운다.”라는 구절은 노인의 울음이 두려움으로 번들거리는 아이의 울음으로 되돌아가면서 총체적인 형이상학적 질서를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때 노인이 천천히 쓰러집니다. 옆 노인은 푸르고 푸르게 물이 들구요. 이 번져가는 푸른빛에는 불완전함에 대한 어떤 혐오의 흔적도 없지만, 불완전함이 그 자체로 진정한 완전함임을 깨달았다는 식의 어떤 이념적 진실에 치우치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에게 해의 흔들리는 저녁 물빛처럼 한 노인의 울음이 다른 노인에게 옮겨가는 것 뿐 입니다.

 

저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나 자신이 아닐 수 없는 순간들 속에서만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슬픔들을 시집을 읽으며 느꼈다고 썼습니다. 어쩌면 그 슬픔들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진부하지만 거대한 결론을 맺어야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사라진 그런 투명한 슬픔들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아직 저 노인들처럼 지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다만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투명한 슬픔은 스스로에게만 차오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푸르게 물들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구요. 

 

 

 

이렇게 확장되는 자유

장은정

그녀가 돌아왔다.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라는 제목으로. 그런데 말이다. 두번째 시집의 제목에서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니? 이는 첫 시집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무엇인가가 처음, 생겨났음을 암시하고 있다. 2005년의 첫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는 금방이라도 시집 밖으로 흘러넘칠  듯 기괴한 이미지들로 출렁이고 있었다. 비아냥거림이 섞인 비어와 욕설, 구어, 말놀이들은 외부의 폭력과 억압들을 조롱하거나 자기혐오의 형태로 절제 없이 들끓었다. 이는 ‘예술가의 자의식’이라는 의식적 ‘절제’마저 거부하는 것으로 읽혔기에 급진적인 동시에 위태롭게 보이는 지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첫 시집과 다르게 이번 시집에서 “처음” 생겨난 것은 무엇일까? 시인의 뒤표지 글을 보자. 예식장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데 한 여자가 계단 위에서 발목과 발목 사이에 팬티를 걸치고 우뚝 서 있다. 이 당혹스러운 상황을 마주한 화자의 자문. “나라면 추켜올렸을까,/아니면 벗어버렸을까.” 이어지는 자답. “더러운 팬티를 수치스러워하기보다/낡은 팬티를 구차해하기보다/고무줄의 약해진 탄성을 걱정하는 데서부터/시라는 것을//나는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공적인 영역에서 여자는 언제나 ‘보여지는’ 존재로 간주됨으로서 ‘느끼는 주체’이기를 억압당한다. 이 폭력적 억압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첫시집은 함께 욕하고 함께 찢고 잘랐다. 하지만 이번 시집에서는 다르다. 낡은 팬티에서 수치와 구차함을 느끼길 강요하는 외부의 시선에는 아랑곳없이, 가만히 서서 “고무줄의 약해진 탄성”에 대해 몰입(걱정)하는 것이 바로 시라는 것을, 그녀는 처음,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몰입은 사적 영역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식장” 앞이라는 공적인 영역에서 ‘대놓고’ 이루어진다.

 

언제 어디서건 누가 뭐라든지 자신의 느낌을 스스로 지켜내고 솔직하게 발화하는 것, 이것이 김민정의 시적인 오르가슴인 것이다. 이것은 분명 시론이다. 시적 자의식의 배제라는 특성이 첫 시집을 도발적으로 느끼게 만들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시적 자의식을 뒤표지 글에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이번 시집의 사태는 완전히 정반대인 것이다. 그러니 이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곧 찔러버릴 듯 벼르고 있던 가시들로 무장한 고슴도치 아가씨는 이제 맨몸으로 홀홀히 걸어나온 것이다. 가시들 속에서 홀로 북적이던 자기자신을 벗어던지고,

더 많은 사람들 사이로. 수학선생님, 신현정 시인, 학이엄마, 할머니, 김근 의사, 스페인에서 만난 흑인 남자와 백인 소녀 커플, 야한 스님, 천안역 노숙자에 이르기까지…… 이 북적이는 사람들이야말로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의 또다른 새로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등장인물들은 환상적 이미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첫시집부터 이어져온 발화방식인 일상어들(비어와 욕설, 성적언어, 구어, 말놀이)은 이전의 환상적 요소를 거의 제거하고 고유명사나 구체적인 시적 정황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들의 편수가 늘어난 것이다. 그러니 김민정의 일관적인 발화방식인 일상어들이 수행하는 기능은 전혀 달라졌다.

 

첫 시집의 일상어들이 환상적 이미지와 결합하여 비아냥거리고 조롱하는 저항의 언어였다면, 두번째 시집에서 일상어들은 고유명사나 구체적인 시적 정황과 결합하면서 시적인 것의 영역을 일상 속으로 넓히는 개척의 언어다. 이제 그녀에게 시적인 것이란, 일상과 동떨어진 고상하고 우아한 무엇이 아니다. “순간 다급하게 펜을 찾는 손이 있어/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릴 때,(「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손끝에 닿는 것은 펜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건네려 했다가 돌려받은 커피캔의 온기인 것이다. 마치 홍상수의 영화처럼 ‘시적인 것’들은 일상에 널려 있고, 그녀는 그 일상들을 과장하지 않고 끌어모은다. 

 

물론 모든 일상사가 있는 그대로 시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가 일상 속에서 시적인 섬광을 발견하는 순간은 이번 시집에 새롭게 등장한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다. 가령,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같은 시. 응급실에 갔더니 담당의사 이름이 ‘김근’이다. 김근 시인의 이름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함께 느낄 반가움과 놀라움을 담아 화자는 “어머, 뿌리 근을 쓰시나요?/성함이 제가 아는 분이랑 같아서요” 하고 반색하는데, 바느질로 바쁜 의사는 아무 말이 없다. 이 어색한 침묵 속에 공존하는 미묘한 불일치 때문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반색했던 화자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 대답 없는 김근 의사 모두 “비호감”이 되는 것을 포착하는 것.

 

그것이 “고무줄의 약해진 탄성”에 대해 몰입하는 순간이다. 물론 이 순간의 핵심은 시적인 것이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며 고발하고 끌어내리는 아방가르드적인 ‘공격성’에 있지 않다. 오히려 “‘앙서점’이나 ‘님짜장’처럼 글자 하나 툭 떨어진 의외의 간판”처럼(「어느 날 가리노래방을 지날 때」) 사소하고 하찮은 순간을 ‘시적인 것’으로 격상시키는 ‘복원성’에 그 방점이 찍힌다. 이 때문에 그녀가 포착하는 일상성은 ‘시적인 것’의 영역을 제한하지 않고 더욱 넓혀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시를 읽고 있으면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들이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혹은 더 정의로워지기 위해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시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 김민정의 시가 가장 시적인 지점에 도달할 때에는 너무나 익숙해서 비루해 보이는 일상까지 깊숙하게 침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위로는 어딘가 

여전히 도발적이다. 물론 이 도발성은 빈번히 출현하는 성적 언어들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성적 언어를 사용할 때의 핵심은 최고조에 이른 섹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섹스를 나눈 뒤/등을 맞대고 잠든 우리/(…)/거기 침대 위에 큼지막하게 던져진//두 짝의 가슴이,/두 쪽의 불알이,” “어머 착”하다는 것을(「젖이라는 이름의 좆」) 발견하는 순간에 있다. 김민정의 시적 오르가슴은 관능과는 거리가 멀다. ‘관능’이란 여전히 보는 자가 보여지는 자에게 은밀히 강요하는 덕목이 아니겠는가. 강조해야할 것은 그녀가 발견해내는 일상들이란 화자가 순수한 관찰자로 존재하는 ‘풍경’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령, 앞에서 인용한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화자는 누구인가? 이 시를 쓴 시인 김민정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녀의 시에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지난 16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1인치씩 얼굴이 자랐다는 조막의 달인 대두 김민정 선생님……”「나미가 나비를 부를 때」) 시를 쓰고 있는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시적 사건의 풍경을 찢으면서 자꾸만 시 속으로 불쑥불쑥 얼굴을 내미는 이 시인은 누구인가. 그녀가 다루는 일상의 대담함이란 바로 시와 시인이, 시와 현실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는 데 있다. 물론 실제 시인과 시 속에서 드러나는 시인이 과연 동일한 인물인가를 묻거나, 마치 현실처럼 보이는 시적 사건이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방점은 시인과 현실세계를 시 속에서 동시에 발견하게 만드는 시적 구조에 찍혀야 한다. 저자의 죽음이 당연시되는 지금 여기에서, 시와 시인, 현실이라는 이질적인 세 영역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순간을 체험하는 것, 그것이 김민정 시의 위로가 지닌 도발성이다. 혹자에게 김민정의 시는 지나치게 사소하고 가볍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가벼움이란 자명한 경계들을 단숨에 임의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자유의 이면이라는 것을, 나는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_《창비문학블로그》 2010년 3월 발표.  

 

 

 

조용하고 정확한 발끝


장은정

이근화의 두 번째 시집 『우리들의 진화』의 출발점은 단순하고 자발적인 감정이다. 그것은 물처럼 흐르고, 공기처럼 이동하며, 불처럼 번져나간다. 내면에 갇혀 있지 않고 언제나 자신의 ‘바깥’을 향해 열리는 이 감정은 시의 전개와 구조를 생성하는 근본적인 에너지다. 「소울 메이트」의 경우, “이 세계가 좋아서”라는 단순한 감정이 이 시를 움직인다. 시 속에서 “우리는” “젖을 줄 알면서”도 “옷을 다 챙겨 입고”, 비 오는 “골목에 서서 비를 맞는다”. “비의 감정”이라는 자신의 감정 ‘바깥’을 만나기 위해서다. 

 

모든 감각을 활짝 열어젖힌 채, 낯선 누군가에게 흠뻑 젖어보는 것. 그리하여 그 누군가가 잃어버린 기억에까지 도달하고자 하는 순수한 몰입. 이 행위는 오로지 ‘듣고자’하는 열린 방향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때 빗줄기는 골목 뿐 아니라 우리의 감정 안으로도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단지 “이 세계가 좋아서” 벌어진 일들이라는 것. 여기에 이근화의 감정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의 ‘역동성’이 존재한다. 

 

낯선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이처럼 ‘듣고자’하는 ‘열림’의 행위로써만 가능하다. ‘듣고자’ 한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군가를 산산이 부쉈다가 자의적으로 다시 맞추는 이해와 판단의 단계로는 발전해나가지 않고 흠뻑 젖기만 하는 행위를 뜻한다. 이는 비 오는 골목에 서 있는 것처럼 가만히 ‘멈추어’ 있는 일이지만 가장 적극적인 자발성으로 이루어진 ‘역동적 정지’이다. 우리 안에는 말 열 마리로도 끌어낼 수 없는 거인이 숨어있어서 스스로 움직이려 하기 전에는 결코 움직여지지 않는다. 이근화의 시는 그 거인이 바로 감정들임을, 그의 어깨에 올라탈 때 세계 역시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헌데 이러한 감정의 자율성의 뒷면에는 어떤 절박함이 있다. 이 시집의 첫 시에 해당하는「엔진」의 일부를 보자.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피를 흘리고/ 귀여워지려고 해/ 최대한 귀엽고/ 무능력해지려고 해// (…)//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울어보려 해/ 우리는 젖은 얼굴을/ 찰싹 때리며/ 강해지려고 해”. 귀여워지려는 것과 무능력해지려는 것이 “피를 흘리”는 것과 동일한 지위를 가질 뿐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문제로 제시되고 있다.

 

이근화의 시에서 감정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것이며, 지켜낸다는 것은 곧 강해지려는 일인 것이다. 그러니 「소울 메이트」는 마지막 연까지 남김없이 읽혀져야 한다. “외투를 입고 구두끈을 고쳐 맨다/ 우리는 우리가 좋을 세계에서/ 흠뻑 젖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골목에 서서 비의 냄새를 훔친다”. 감정은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자발성/자율성인 것이다. “우리가 좋을 세계”를 감정으로 지을 수 있고, 그 속에서 “흠뻑 젖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마로니에」에는 “살아남기 위한” 감정이 어떤 시적 태도와 효과를 보여주는지 잘 드러난다. 시 속에서 화자는 “귀의 모양을 바꾸”기 위해 “귀청이 떨어질 듯 크게 음악을 틀어 놓”거나, “오래된 습관들”에게서 떠나기 위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 보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모든 노력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가고 화자에게 남은 것은 “나무들은 꺾이지 않고/ 도로 위의 아침은 도로 위의 밤을 벗어”난다는 사실 뿐이다. 이 시가 빛나는 지점은 다음에 이르러서다. “가로등에 부닥치는 나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읽기에 좋은 간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안간힘을 써도 꿈쩍도 않는 사실들에 대해 시는 그 어떤 부정적 판단이나 평가, 비난도 하지 않는다.

 

단지 강압적 사실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만 머물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명하게 발언할 뿐이다. 이 직접성은 시와 독자 사이의 거리를, 내쉬는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좁혀놓으면서 시적 효과를 획득한다. 이는 그동안 다른 많은 시들이 감정을 절제하는 묘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정서를 전달하던 작법과는 대조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감정의 직접성이 ‘과잉’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녀의 시가 이해/판단/평가로 발전되려는 지점에서 감정을 정지시키기 때문이다. 이 ‘역동적 정지’는 자신을 지켜내려는 노력인 동시에 타자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그녀의 시가 가장 매력적인 지점, 즉 천진난만하고 엉뚱한 상상력은 바로 이러한 태도가 기저에 깔려있기에 가능하다. 「금자씨의 권총」에서 화자는 자꾸만 화가 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3층 베란다 창문으로 담배꽁초가 들어”온다거나 “21층 사시는 아줌마 한 분”의 지독한 향수 냄새, 혹은 “왕족발이 가죽 수선이 차량 수리가 왔다고/ 친절에 꽂혀 마이크를 가져다 귓가에 들이대는” 상황들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상황에 대처하는 시적 태도는 엉뚱하고 기발하다. 그저 “권총이나 하나 쥐고 있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권총으로 누군가를 쏘아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총알 없이 폼 나게/ 들고 아파트 주변 산책이나 하”겠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감정인 분노를 표현하면서도 어느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 그녀가 시에서 일관되게 보여주는 태도들과 일치한다. 

 

그녀의 엉뚱하고 다정한 상상력은 “배 한 척을 집어삼킨 대왕 오징어의 마음”을(「우리의 우정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중) 걱정하는가 하면, “살인자가 주머니에서 잃어버린 손가락을 꺼내 흔드”는 것을 보고 “그건 나의 것인데 하며 울다가/어느새 좋은 생각에 빠져버리”기도 하며(「大원수 무찌르자 포장마차」중) 자신의 손가락을 장난감처럼 대할 만큼 천진하다. 이 알록달록한 상상력과 투명한 감정들로 가득찬 시에는 원한이나 증오를 위한 자리가 없다. 세계가 병들었을 때, 시는 건강해지려 함으로써 함께 병들지 않는다. 그것은 병든 세계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이지만 동시에 세계를 치유하는 힘이기도 하다. 

 

상상해보자. 키가 닿지 않는 선반 위에 놓인 캔디 박스를. 그리고 아이가 집에 혼자 남은 날, 선반 아래 놓일 의자를. 아마 설렘으로 팽팽한 발끝은 의자를 조용하지만 정확하게 딛고 올라설 것이다. 아이는 “섭취한 대부분의 영양을 발로 소비한다”(「우리들의 진화」중).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두 발을 사랑”하는 일이다. 우리 자신의 두 발을 믿고, “길을 똑바로 걸어/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되돌아”올 것.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상자는 다시 닫히고, 의자는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지만, 세계는 어딘가 비밀스러워져 있다. 

_《문학동네》 2009년 겨울호 발표.

 

 

 

빛으로 만들어진 방, 그림자의 신전

장은정

벽과 바닥, 천장이 빛으로 만들어진 방이 하나 있다. 방에 나 있는 창으로는 미끄럼틀을 타듯 그림자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바닥으로 미끄러진 그림자들은 젖어있고 이윽고 방 속을 물처럼 흐르기 시작한다. 그 “그림자 속에서 새가 날고”, “강이 흐르고”, “바람이 불”면서(「세상에서 가장 긴 나무의 오후」중) 지평선이 생기고 나무들이 길게 자라난다. 이 낯선 세계 속, 그림자들의 살아있는 형태들을 넋을 잃고 지켜보노라면 건축가 루이스 칸의 말들이 떠오른다.

 

“방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 즉 방에 속한 빛은 대단한 것이다. 태양은 방이 만들어 지기까지는 그 빛이 얼마나 멋진가를 깨닫지 못한다.”(존 로벨, 김경준 역, 『침묵과 빛 ― 루이스 칸의 언어』, 스페이스타임, 2005. 104면.) 신영배의 이번 시집을 읽으며 이 문장들을 이렇게 바꿔 읽었다. ‘신영배의 시들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그림자라는 존재가 얼마나 멋진가를 깨닫지 못한다.’ 하나의 방은 자아의 확장일 뿐 아니라 사건의 체험이라 생각하는 루이스 칸의 말들에 이어 기댄다면, 신영배의 방은 우리의 자아를 확장시키고 새로운 사건을 체험하게 한다. 

 

 

오후 두 시 방향으로
나는 상자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얇게 접어둔 다리

의자는 새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앉아 있던 잠이 툭 떨어져 내린다
의자가 쓰러지고
새가 아름답게 나는 방

…중략…

커튼은 물고기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젖히자 출렁이는 강물 속
내 다리가 아름답게 흐르는 방


―「아름다운 방」부분

 


시 속에서 상자의 그림자는 흘러가며 의자의 그림자가 되고, 의자의 그림자는 흘러가며 새의 그림자, 물병의 그림자가 된다. 끊임없이 흐르며 다른 형태가 되는 이 그림자들은 대체 무엇인가. 귀속되어 있어야 할 대상과 무관하게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실체가 되는 이 그림자들. 그것을 부재의 현존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신영배의 그림자들은 어떤 특정한 의미나 상징의 대체물이 아니라 ‘물질’에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이 그림자들에게 어떤 이념적 진리를 요구한다면, 그러나 그림자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모든 물질들이 가진 침묵을, 이 그림자 역시 가지고 있다. 이 “다리가 아름답게 흐르는” 움직임은 오로지 이러한 물질적 침묵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림자의 움직임에 따라 수많은 대상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헌데 우리는 시 속에서 상자, 의자, 새, 물병, 물고기로 변하는 그림자의 수많은 대상들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자와 의자의 사이, 의자와 새의 사이까지 바라본다. 그 ‘사이’의 공간은 행과 연 사이의 간격들이다. 행갈이와 연갈이에 의한 호흡의 배치와 구조에 의해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 많은 대상들의 모습들을 한번에 이어서 연속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혀 다른 대상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움직임들의 동선은 마치 무용수의 동작들처럼 우아하고 매혹적이다. 물론 이 동선은 오로지 ‘비어 있음’의 간격에서만 읽어낼 수 있는 가상의 선(線)이다. 

 

상상력의 물질인 이 가상의 선은 볼 수만 있을 뿐, 만질 수는 없다. 바로 그것이 이 움직임이 주는 매혹의 핵심이다. 칸은 우리의 모든 감각 중 가장 첫 번째 감각은 촉각이며, 촉각은 단순히 만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만지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또한 이 열망은 보고자 하는 열망으로 발전되어 나간다. 즉 시각만이 허락되는 이 가상의 물질은 만지고자 하는 열망을 가장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는 이 순수한 동선들의 긴장에 헌신하는 시들로 붐비고 있다. 

 


소녀는 새를 기다린다
새는 물을 뚝뚝 흘린다

줄 위에 새가 앉아 있다

새가 마르면
새는 날아간다 

나는 소녀를 기다린다
소녀는 물을 뚝뚝 흘린다

줄 위에 소녀가 앉아 있다

소녀가 마르면
소녀는 날아간다

바다가 밀려온다
줄 위에서 떨어지는
소녀를 본다

목이 부러진 새를 날리던 물가


― 「소녀의 점」전문

 


이 시는 시적 구조와 이미지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로 결합했다가 분산되는 운동을 통해 시적 효과를 획득한다. 시의 구조를 살펴보자. 새와 소녀가 등장한다. 소녀는 새를 기다리고 있고, 새는 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새라는 상승의 이미지와 물이 떨어지는 하강의 이미지가 동시에 응축된 이 이미지는 돌연 말라버리고 날아가 버린다. 새가 마른다는 구절에서 물과 동일시된 새의 존재도 기묘하지만, 소녀를 기다리는 ‘나’가 등장하자 소녀가 돌연 새의 구조를 그대로 반복하는 장면은 더욱 낯설고 기묘하다. “소녀는 물을 뚝뚝 흘린다”는 “새는 물을 뚝뚝 흘린다”의 반복이며, “줄 위에 소녀가 앉아 있다”는 “줄 위에 새가 앉아 있다”의 반복인 것이다. 소녀와 새의 관계에서 새가 사라지자, 소녀는 새가 되고, 소녀의 역할은 ‘나’가 맡게 된다. 삼각형을 그려가는 선들의 반복적인 운동 속에서 동선들이 생겨난다. 

 

돌연 등장하는 “바다가 밀려온다”의 구절은 이 삼각형을 그리는 선들과 충돌하며 시적 효과를 획득한다. 필시 “줄”의 수평적 선의 연속에서 등장했을 바다의 수평적 이미지는 “밀려온다”는 서서히 펼쳐지는 면과 충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면은 “줄 위에서 떨어지는 소녀의 점을 본다”는 구절의 점들과 충돌한다. 다양한 형태들의 불규칙한 운동 속에서 펼쳐지는 긴장들은 마지막 구절 “목이 부러진 새를 날리던 물가”라는 구체적 이미지를 통해 극대화되어 완성된다. 이 짧고 간결한 행들이 펼치는 명료한 동선들의 긴장들은 단연 신영배의 시적 공간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사건이라 할 만하다. 

 

어째서 이 추상적인 선들이 감정을 동반하여 구체적 시적 효과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일까. 스위스의 미술사가인 뵐플린은 건축 형태가 어떻게 분위기와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우리 모두는 몸을 가지고 있고, 그 몸을 통해 공감의 원칙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라 대답한다. “우리의 신체 조직이 하나의 형태이고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모든 구체적인 것을 이해한다.”(에이드리언 포티, 역 이종인, 「형태」,『건축을 말한다』, 미메시스, 2009. 235면.) 건축적 형태에 대한 뵐플린의 설명을 빌려올 수 있다면, 신영배의 시들은 우리 몸의 형태들을 통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헌데 이 움직임들이 그려내는 동선들은 하나의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검은 바람결이 목을 감는다 손아귀들이 연체동물처럼 스멀스멀 저녁의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그림자들이 죄다 머리가 잡혀 저녁의 점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얼어붙어 집으로부터 떨어진 점이 된다 둥근 나무들의 여백 사이로 발없는 여자가 달린다 베란다에서 자라는 검은 식물 속으로 모공의 꿈속으로 침대와 엘리베이터와 테이블과 보도블록과 물빛이 함께 있는 거울 속으로, 달린다, 점이 될 때까지


―「저녁의 점」부분

창밖에서 사람들은 그림자를 사고팔았다 // 정오의 사무실 // 벽에 점이 있다  // 그녀는 / 점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 벽이 눕는다 // 바닥이 일어선다 // 그녀가 쓰러진다 // 바닥에 점이 있다 / 점이 있다 // 그녀는 일어나 / 점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 다시 벽이 눕는다 // 다시 바닥이 일어선다 // 그녀가 쓰러진다 // 벽이 도로 벽이 된다 // 연속하는 점 // 그녀는 일어나 / 점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 벽이 눕는다 // 바닥이 일어선다 // 쓰러진다 // 그녀는 일어나 / 점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 깊은 곳에서 말을 버렸다

 

―「정오에는 말을 버린다」전문

 


위의 인용된 시들에게서 쉽게 알 수 있듯이 모든 반복되는 운동성들은 한없이 점으로 수렴되고자 한다. 「저녁의 점」에서 그림자들과 발 없는 여자는 “점이 될 때까지” 달린다. 이 ‘점’은 “저녁의 구멍”이라거나 “거울”과 같은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있다. 구멍처럼 뚫려 있으나, 거울처럼 막혀있는 이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 ‘점’의 의미는 「정오에는 말을 버린다」에서 더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이 시에서 정오의 사무실은 벽이 눕고 바닥은 일어서는 회전을 거듭한다. 그 회전을 주도하는 ‘그녀’는 마치 쳇바퀴를 도는 것처럼 절박하다. 그녀가 달려드는 곳은 앞의 시와 마찬가지로 “점”이다. 하지만 점은 계속해서 그녀를 튕겨내고 그녀는 다시 정오의 사무실을 굴리고 점으로 달려들기를 멈추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그녀는 이토록 절박하게 달리고 뛰어드는 것일까. 

 

마지막 구절이 그 질문에 대한 결정적 힌트가 되어줄 수 있을 듯하다. “깊은 곳에서 말을 버렸다”. 어쩌면 신영배가 이 모든 운동을 반복하는 것은 ‘말을 버린 깊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 즉 언어 이전의 언어, 언어 없는 언어에 도달하기 위해서일지 모른다. 「점의 동물」에서 ‘점’은 수정란의 상태로 형상화된다. 이 시에서 점이란 ‘동물’이기도 한 것인데, 그것은 “입이 귀였을 때/무릎이 혀였을 때/머리통이 발바닥이었을 때/…중략…/두 다리가 가슴이었을 때/요도가 식도였을 때”처럼 모든 것이 합쳐져 있는 근원적이고 합일적인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는 시간적 의미에서 존재의 최초이기도 하고, 이 모든 운동성이 정지되어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그것은 「기하학적 다리에 대한 독백」에서 점은 그림자(운동성)가 생겨난 근원을 지시하기도 한다. “두 개의 다리를 외출시키고 나는 네 개의 점으로 주방에 몰려있어요” 

 

사실 신영배는 첫 시집 『기억이동장치』에서 “쓰다가 내가 사라지는 시/쓰다가 시만 남고 내가 사라지는 시”(「시인의 말」중)를 쓰고 싶다고 쓴 적이 있다. 이미 그녀는 첫 시집에서부터 사라지는 자유를 꿈꿔왔던 것이다. 이제 두 번째 시집에서 사라지고 싶은 것은 시인 뿐 아니라 시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시들은 증발을 향해 거슬러 흐르고 있다. “꽃이 있는 곳에서 꽃이 없는 곳으로”, “혀가 있는 곳에서 혀가 없는 곳으로”, “바람이 있는 곳에서 바람이 없는 곳으로”(「얼굴은 안개로 돌아간다」중). “얼굴들은 액체에서 기체로”(「4월의 나프탈렌」중). 엄밀한 제한성과 규칙성들이 부여된 이 움직임들에게는 사라지기 위한 순수한 ‘동선’들만이 남아있다. 빛으로 만들어진 방, 살아 있는 형태들이 무한히 흐르고 있는 곳. 그 곳은 그림자의 신전이다. 

 

_《현대시》, 2009년 10월호 발표.

 

 

 

 

 

씩씩한 반작용과 무중력의 영역

 

장은정

오은 시인의 첫 시집인 『호텔 타셀의 돼지들』(민음사 2009)은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경쾌한 ‘말놀이’들로 가득하다. 이 놀이는 좀처럼 지칠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까르르 까르르 숨넘어갈 듯 웃으며 ‘또 하자’고 어른들을 조른다. 먼저 녹초가 되는 쪽은 언제나 어른들이다. 수록된 대부분의 시가 말놀이를 거친다는 점에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은 명백히 아이들의 세계다. 아이들에게 언어란 존재의 집과 같이 엄숙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음과 모음으로 따로 떼어내 가지고 놀 수 있는 알록달록한 블록이다.  

 

「0.5」에서 0.5라는 숫자는 단위의 종류에 따라 시력, 샤프심, 강설량, 구 버전 소프트웨어, 커플링의 무게 등으로 쉴새없이 다르게 규정된다. 이 ‘단위의 이데올로기’는 무표정하게 0.5라는 숫자를 자신의 의도와 필요에 의해 ‘사용’한다. 사용이 끝나고 나면 여지없이 “잊어버리”거나 “휙 던져”버리고, “분해”해버린다. 이처럼 0.5를 함부로 다루는 일방적인 태도는 이해와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이러한 일방적인 폭력에 분노하는 데 궁극적인 목적을 두지 않는다. 독자가 가장 먼저 누리게 되는 것은 다양한 종류의 0.5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이다. 이 즐거움이 먼저 온 후에 다른 정서들이 뒤따라 붙는 것이다.

 

「어떤 날들이 있는 시절 3」 또한 마찬가지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마다 새우 등이 터졌지만, 등잔 밑이 어두워서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거나 “쥐구멍에는 볕 대신 병이 들었고 고생 끝에 찾아온 건 낙이 아니라 막”이라는 구절들을 보자. 이 구절들은 우리 주변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절망스럽고 부조리한 어떤 구체적인 사건들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이 묘사들은 마냥 비장해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선 속담을 비틀거나 이어붙여 만든 이 절묘한 말놀이들에 ‘감탄’하면서 잠시나마 이 상황들에 대해 시치미를 떼고 웃을 수 있다.

 

사실 말놀이가 이처럼 ‘본격적인’ 요소였던 적은 없다. 황병승의 말놀이는 세계의 폭력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부조리와 모순을 드러내고 동시에 자기연민을 경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이는 황병승의 시에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 전면적인 특성이라 규정하기 힘들다. 김경주의 말놀이는 간혹 위트와 유머를 동반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노리는 것은 정서의 효과적인 전달이다. 이 말놀이 역시 김경주의 시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꼽기는 힘들다. 이에 비하면 오은의 말놀이는 분량적인 면에서나, 그 의의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말놀이들은 지칠 줄 모르는 활기로 가득하다. 세계의 폭력으로 인해 앓거나 미치거나 분노하던 그간의 많은 시들과는 달리, 보란 듯이 ‘활짝’ 웃으며 더욱 신나게 “텀블링, 텀블링”(「스프링」) 튀어 오른다. 

 

이 도약은 정점에서 세계를 일시적이나마 ‘내려다볼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하여 함께 웃을 수 있게 한다. 잠시 떠오른 그 순간의 정점에는 끔찍한 세계에 대한 긍정과 분노가 공존하고 있다. 세계가 아무리 폭력과 억압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이를 완전히 외면하지 않고 끈질기게 바라본다는 점에서 긍정이며, 그 세계를 웃음거리로 만든다는 점에서 분노인 것이다. 즉 말놀이는 맞은편에서 날아오는 공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면서 힘차게 맞받아친다. 이것이 오은 시인이『호텔 타셀의 돼지들』에서 보여주는 ‘씩씩한 반작용’의 자의식이다. 이 세계의 ‘끔찍함’에서 더 큰 반동을 끌어내 ‘말놀이’와 ‘애드리브’로 즐겁게 도약하는 이런 태도는 분명 특별하고 새로워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 시집의 더 큰 가능성은 「한스」나 「존재하려는 경향」을 비롯한 몇편의 예외적인 시들에게서 발견된다. 이 시들은 ‘씩씩한 반작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작용―반작용의 무한한 반복의 궤도를 약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한스」에서 ‘한스’는 하룻밤 사이에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 “꿈을 품기보다는 그것을 실현하는 문제에” 부딪힌다. 하룻밤 사이에 바뀐 기준들로 혼란스러워진 한스에게서 ‘질문’들이 쏟아진다. “하루 만에 성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질문에 대한 질문도 이어진다. “내게 질문할 권리가 있긴 한 걸까요?” 「21세기 어린이」역시 문득 찾아온 질문들이 시의 마지막을 차지하고 있다. “나의 이름은 과연 몇개나 될까요? (…) 얼마나 더 성장해야 할까요? (…) 대체 누구 말을 믿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질문들에서 아이가 세계의 폭력에 ‘대응’하는 것을 넘어서서 스스로를 ‘들여다보려’ 하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세계를 내려다보던 수직적인 시선이 점차 그 방향을 반대로 되돌려 자기 자신을 향한 수평적 시선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수평적 시선이 궁극적으로 닿는 곳은 바로 ‘어리둥절한 무중력의 영역’이다.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는 이 영역은 혼란스럽다. 

 

「존재하려는 경향」은 이 영역의 모호함이 시적인 순간으로 잘 포착되어 있다. 이 시에는 이차 방정식 예제를 샤프심 한번 부러뜨리지 않고 푸는 선생님과, 그런 선생님에게 관심을 받지 못해 속상해하는 소년이 등장한다. 이 시가 묘한 느낌을 주는 것은 전화기를 들고 “문득 막막”해 하는 1층의 엄마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인과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 시는 기계마냥 메말랐을 것 같았을 “선생님이 흠뻑 젖은 몸으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면서 매혹적인 어리둥절함을 전달한다. 

 

씩씩한 반작용의 시들은 작용과 반작용의 영역이 명료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중력의 영역’에서는 그 상반되는 흑백의 명료함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이 모호함과 불확실함은 이데올로기의 감시와 억압이 완전히 포섭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이다. 이 예외적인 몇편의 시들은 세계의 억압과 감시망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는 몇편에 한정된 미약한 가능성이다. 허나 이 미약한 가능성이 없다면 이 시집이 주력하고 있는 ‘씩씩한 반작용’은 단지 ‘새로움’에 그쳐버렸을 것이다. 시가 가닿을 수 있는 최고의 지점은 기존의 세계에 단지 ‘새롭게 대응’할 때가 아니라, 그 대응마저 넘어서는 순간 만들어지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첫’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갖춘 그 ‘씩씩함’을 그대로 껴안고, 이 젊은 시인이 무중력의 영역 속으로 더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기를. “씩씩하게, 씩씩하게 / (…) / 묻고 또 묻고 / 묻는다는 것에 대해 또 물을 것.”(「스타일」)

 

_《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 발표 (본문 보기 ↘링크)

 

 

 

저수지 근처에서였다.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다가 우리는 싸웠다. 나는 절박했다. 그는 그 절박함에 목 졸리고 있었다. 내가 한 마디를 더 보탤수록 우리는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보태고 보탰다. 바닥을 보며 듣고 있던 그가 날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할 수만 있다면 가위로 내 입을 오려내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어쩐지 그 증오가 묘하게 평화로워보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몇 마디를 더 보탰다.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다가 뚜벅뚜벅 나를 지나쳤다.


혼자 남겨진 것 치고는 너무 환하고 밝았다. 나는 그의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를까 말까를 계속해서 고민했다. 비참함과 후련함이 뒤섞여서 망설이다보니 너무 멀어져버렸다. 비행기가 지나간 후 하늘에 구름들이 선을 그리듯이, 그가 지나간 긴 자국을 눈으로 오래 더듬었다.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조금 울었다. 한껏 몰입해서 슬퍼하고 싶었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내 울음이 스스로에게 어색해졌다. 

 

긴장이 풀리자 온 몸이 나른해졌다. 적당히 바람이 불어서 눈물이 금방 말랐다. 건성 피부여서 얼굴에 눈물이 흐른 자국이 당겼다. 가방에서 로션을 꺼내 발랐다. 여전히 저수지의 수면은 평온했다. 햇살을 반사하고 있어 반짝거렸고 예뻤다. 날씨는 따뜻했고 약간 졸렸다.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정말이지, 안전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의 따뜻한 온도와 나른한 기분, 그 평온하던 수면과 반짝임. 마침내 어긋나는 순간, 어긋남이 자명해지는 순간의 투명함. 활과 과녁 사이. 날카롭게 공중을 가르며 떠 있는, 포물선을 그리는 화살의 시간. 거절과 외면 후에 잽싸게 따라붙는 시간들이 절망과 괴로움이 아니라 평온함이라니. 이 역설 속에서 나는 어리둥절하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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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23 10:36 # modify/delete reply

    너무 좋아요. 문장들이 뚜렷하고 섬세하다고 생각했어요..

출간

2019년 5월, 소영현 외 12인, 『#문학은_위험하다』 발간 링크


발표글

2019년 12월, 《포지션》, 「누가 시를 읽는가」

2019년 8월, 문학웹진 《비유》, 「작가연대 총파업 돌입, 작가들 노동환경 개선되나」링크

2019년 봄호, 《문학과사회》, 「현장-스코어-비평」링크

2019년 2월, 임지은 시집 『무구함과 소보로』 해설, 「범람」링크

2019년 1월, 이기인 시집 『혼자인 걸 못 견디죠』 해설, 「셀 수 없는 것」링크

2019년 1월, 《크릿터》 리뷰, 「탈출구-문보영론」링크

 

포럼

2019년 10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였는가?문학분야 정책 비평 발표 링크

 

좌담

2019년 8월, 《문장웹진》, 「'비평지'를 만드는 사람들」 좌담 사회 1편 링크 2편 링크 

2019년 7월 《연극in》, 「미투 이후 1년, 연극은 달라졌는가?」 좌담 패널 1편 링크 2편 링크

2019년 5월, 《모티프》, 「인터뷰-비평 : 잘 알지도 못하면서」링크

 

행사 

2019년 8월, 심훈문학상 챌린지 리뷰 및 비평 패널 링크링크

2019년 8월, 위험한 북토크, 〈#해시태그는_위험하다 패널 링크

2019년 7월, 요즘비평포럼, 비평가는 어디에 있는가? 패널 링크 

2019년 1월,  내/일을 위한 시간〉예술계 협동조합 사례 발표 링크

 

강의

2019년 4월, 문학출판계 성폭력 말하기 운동 이후 페미니즘 문학비평 담론특강, 말과활 아카데미↘링크 

 

기획

2019년 8월, 문학웹진 《비유》 의 '?'(묻다) 코너의 '공동체' 키워드 기획 링크

2019년 8월, 《문장웹진》, 「'비평지'를 만드는 사람들」  좌담 패널 선정 및 주제 기획 ↘1편 링크 2편 링크 

2019년 1월, 문학웹진 《비유》 × 《문학3》  공동 주최 내/일을 위한 시간링크

 

기타

2019년 5월, 제24회 한겨레문학상 심사 링크 

2019년 5월, 미투 공동포럼 미투 운동 1년, 한국 사회에 찾아온 변화토론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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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 2019.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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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처음으로 야구장을 갔을 때를 기억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것을 처음 보았고, 나는 아직 어렸으므로 그저 부모님과 함께 외출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들떠 있었다. 손등으로 흘러내릴 만큼 아이스크림을 천천히 아껴 먹으면서 사람들이 소리 지를 때 함께 소리 지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들뜸이 조금씩 지쳐 갔던 것 같다. 아마 아직 어린 아이가 관람하기에 야구는 지나치게 길고 정적이고 복잡한 게임이었을 것이다. 문득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분명 한낮에 입장을 했는데 지금은 해가 졌고, 태어나 처음으로 보게 된 저렇게 밝고 큰 조명 장치하며, 모두가 숨죽이고 있다가 일시에 터지는 함성들 같은 것 말이다.

 

저 마름모꼴 흰색 선은 누군가 땅 위에 그려 놓은 것에 불과한데,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금방 지워져 버릴 저 도형의 내부 혹은 외부의 특정한 어떤 위치에 공이 위치한다는 사실 때문에 모두가 때로는 모든 것을 잃은 듯이 절망하고 때로는 세상의 전부를 얻은 듯이 열광하고 있으니까.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의 안과 밖에서 울고 웃으며 사는 것이 인간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의 일이지만, 대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뭘까 곰곰 따라가면 저 야구장의 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러니까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이 직접 선을 그어 하나의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의 규칙 속에 흠뻑 빠진 채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는 듯이.

 

낯선 이에게 직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읽은 것에 대해 씁니다라고 답하곤 했다. 시인은 시를 쓴다고 말할 것이고 소설가는 소설을 쓴다고 말할 것이다. 비평가는 읽는 것에 대해 쓴다. 이것이 비평이라는 장르의 특수성일 것이다. 언제나 ‘~에 대해써야 한다. 세계에 대해 쓴 것을 읽고 그것에 대해 쓴다. 이 이중의 절차는 읽지 않고서는 단 한 줄도 쓸 수 없게 만든다. 시인들과 소설가들에게 왜 쓰느냐는 질문이 본질적인 것이라면 비평가에겐 왜 읽느냐는 질문이 더욱 본질적인 것이다. 읽기를 멈추는 순간, 단 한 줄도 쓸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 비평이므로. 이것이 비평이 스스로 만든 규칙이다.

 

 

2

 

왜 읽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왜 쓰는가에 대해서보다 훨씬 더 답하기가 어렵다. 읽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특히나 시나 소설을 읽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많은 이들은 비평가가 텍스트를 고르고 그에 대해 쓴다고 생각하겠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엔 반대의 상황이 일어난다. 텍스트가 나를 고른다. 그만 읽고 싶어도 도무지 책장을 덮을 수 없게 만드는 텍스트를 만나게 되면, 그땐 내가 읽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나를 읽는다고 쓰는 것이 더 정확한 일이다. 그 텍스트는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무엇을 경험하고 어떤 느낌과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지 관심도 없지만, 그런데도 그 텍스트는 나를 낱낱이 들여다보고 애써 모른 척 해 왔던 것들을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상기시킨다. 그렇게 나는, 읽는 것이 아니라 읽힌다.

 

그런 작품을 만나고 나면 내가 그동안 세계를 이해해 왔던 방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쩌면 그동안 내게 보이던 세계의 모든 것이 다만 나의 합리화, 기만, 위선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읽기라는 건…… 그것이 제대로 된 읽기일수록 파괴의 경험에 가깝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임의적인 것으로 만들기, 확실하다고 믿어 왔던 것을 흔들리는 자리로 되돌리기, 좋은 작품은 오래도록 날 지켜 주었던 믿음을 가차 없이 파괴한다. 나는 모두가 함께 열광하고 절망하는 큰 경기장 속의 무수한 의자들 중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손등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내려다보면서 어리둥절해지는 것이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범람이다. 텍스트가 내 삶을 구체적으로 부수고 들어온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읽고 쓴다는 것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계속해서 부수면서 살아가는 일이 아닌가. 마치 한 번의 큰 파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며 공들여 모래성을 쌓는 것에 가깝지 않나. 그렇게 계속 읽고 쓰다 보면 결국은 어떤 진실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쥐게 되는 것은 아주 단단한 무지, 결코 파괴할 수 없는 무의미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결코 뚫을 수 없는, 어떤 빛도 스며들 수 없는 단단한 돌멩이 하나를 쥐기 위해 읽는/읽히는 것일까.

 

 

3

 

나의 할아버지는 글을 쓰시는 분이었다.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서 라디오와 책, 종이와 펜으로 삶을 살아가셨다. 일어로 쓰인 그 글들은 단 한 번도 세상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 장애인의 아내로 사느라 평생을 고되게 보내셨던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장례식 날 그 글들을 모두 태워 버리셨다. 이제야 생각해 본다. 저자인 동시에 스스로 유일한 독자였을, 평생을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웠을 그 문장들이, 할아버지에겐 무슨 의미였을까. 왜 쓰고 또 쓰셨을까. 그것이 자신의 삶을 구원해 주리라 기대하셨을까. 아니면 그런 기대조차 없이 읽고 또 쓰셨을까. 인간이 문장을 쓴다는 것은, 그리고 인간이 쓴 것을 읽는다는 것은 아직도 내게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비밀처럼 느껴진다. 세상과 단절된 그 어두운 작은 방에서 매일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집으로 가져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해가 지고 파도가 밀려오면 어둠 속에서 결국 다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아이들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없이 모래성을 쌓는다. 이젠 더 이상 아이가 아닌데, 읽고 쓰는 일이 이와 같다고 느낄 때가 많다. 무언가를 제대로 읽을수록 내가 쌓아 올린 모래성은 쉽게 허물어진다. 그 허물어짐에 대해 쓰는 일은 또다시 새로운 모래성을 쌓는 일이고, 그것은 또 다음의 읽기에서 무너질 것이다. 그렇게 나는 쌓고 텍스트는 파도처럼 밀려와 허문다. 허물기 위해 쌓는 것은 아닌데, 늘 그렇게 된다. 아무것도 쌓이지도, 지속되지도, 남아 있지도 않다. 세계에 대한 어떤 통찰도 잠시 그럴싸했다가 금방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결국 세계를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는 영역이 있다. 그렇다면 읽고 쓴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어느 겨울이었다. 이미 죽어 지금은 세상에 없는 사람이 쓴 문장을 밤새 들여다보다가 햇볕을 좀 쬐고 한숨 자겠노라고 산책을 나선 적이 있다. 하필 출근 시간이었고, 잠이 덜 깬 피곤한 표정으로 사람들이 골목마다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들 모두 지하철역을 향해 걷고 있을 때, 나는 그들 사이를 헤쳐 정반대로 걸으며 생각했다. 계속 이 방향으로 가도 되는 것일까. 어쩌면 한사코 그들이 가지 않으려는 방향으로 나 홀로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산책 내내, 이미 죽은 자의 문장의 진실이 무엇인지, 그런 것에 대해 쓰는 일이 참으로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던 그때였던 것 같다. 아무도 없어 텅 비어 있는 공원에 빛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그날 오전의 공원은 텅 비어 있으면서도 꽉 차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죽은 후에도 있을 풍경을 상상해 본다. 어느 시절이고 아이들은 해변가에서 모래성을 쌓았을 것이고, 어느 시절이든 파도는 그것을 허물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닿는 곳마다 부지런히 쌓고 또 남김없이 허물어 버렸을, 그러나 또 쌓아 올려질 모래성과 반드시 밀려오는 파도에 대해서 말이다. 쌓고 허무는 일이 반복되는 해변이라는 장소 그 자체, 그곳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여전히 무언가 남아 있다. 아마도 오늘. 언제나 오늘이 남아 있다. 어떤 거친 파도도 오늘이라는 시간만은 모조리 허물 수가 없어서 누군가 또 모래성을 쌓고 마는 것이다. 문장을 쓰는 일이 그저 이 끝없는 우주 속에서 몇 줌의 모래를 쌓아 올리는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고 한들 멈추지 않는 것은 아마 읽고 쓰는 일이 항상 오늘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다만 오늘을 살기 위해 읽고 쓰는 것이라고.

 

2016년 봄, 연희문학창작촌 연간지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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