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여행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채로 여행해왔다.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가, 자신도 모르는 것에 대해 쓴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도 이 글을 쓰겠노라고 쉽게 약속했던 것은 쓰는 동안 알지 못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만 몇 개의 기억들이 남아있을 따름이다.

 

타이베이를 벗어나 중부 지역인 타이중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일정은 아리산을 방문하는 것이었는데, 예약해놓은 숙소는 아리산 해발 1200m 위치에 있었다. 버스를 타고 구불거리는 산길을 한참 올라야 해서 아주 피로해진 상태였다. 장거리를 이동해야 했으므로 숙소에 온 것만으로 하루가 모두 가버려서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숙소의 부엌을 둘러보다 마을을 소개해둔 지도를 발견했다. 지도 한 귀퉁이에 ‘firefly trail’이라고 써져 있었다. 조금 더 어두워지면 반딧불이를 보러 여길 가볼까 싶었는데, 안전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같은 숙소에 묵는 다른 게스트들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들도 가보지 않아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며 흥미를 보였다.

 

저녁 아홉시 쯤 지도 한 장을 접어 주머니에 넣은 채로 숙소를 나섰다. 산골 마을답게 상점들은 당연히 모두 문을 닫았고 가정집들에서 드문드문 불빛이 흘러나왔다. 가로등이 밝게 켜져 있어 ‘firefly trail’의 입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는데, 그 입구에서 돌아 나오는 한 가족이 있었다. 각각 다섯 살, 여덟 살 쯤 되어 보이는 두 남자아이를 한 명씩 안고 있는 부부는 한 손에는 내가 가진 것과 같은 지도를, 다른 한 손에는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반딧불이를 보았느냐고 물어보니 길이 너무 어두워 몇 걸음 들어가지도 못하고 돌아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나에게 행운을 빈다고 말하는 가족을 뒤로 하고 핸드폰 플래쉬 불빛에 의지해서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갔다. 아마도 이 작은 산골마을 사람들은 이 길을 처음 만든 이후로 전혀 관리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서히 길 위로 울창한 식물들이 뒤덮어가고 있었고 이러다가는 돌아오는 길을 잃겠다는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나서 왔던 길을 되짚어 나왔다. 반딧불이를 반드시 봐야겠다는 집념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저 숙소로 돌아가기가 싫었다. 지도를 다시 살펴보니 길이 하나 더 있었다. 

 

새로운 입구를 찾았을 때의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기억한다. 아리산의 그 울창한 열대 나무들로 빼곡한, 그야말로 ‘밤의 숲’이었다. 빛이라곤 저 멀리 마을의 마지막 가로등 빛과 내가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 불빛이 전부였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그토록 완벽한 어둠은 처음이었다. 이제 나는 반딧불이의 빛이 아니라 숲의 어둠에 홀린 기분으로 한발 한발 숲 속을 걸어 들어갔다. 가로등 불빛이 더 이상 도달하지 않기에 사방이 가늠할 수 없는 어둠으로 가득 찼을 때에야 내가 아주 위험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이토록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생생한 어둠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설렘과 두려움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얼마나 걸어 들어갔을까, 여기까지 왔는데도 반딧불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그러나 밤의 숲에 완전히 매혹된 상태였으므로 나는 잠시 핸드폰 불을 껐다. 완전한 어둠을 경험하고 싶었고, 이 깊은 숲속에서 올려다보는 별빛이 찬란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 내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은은히 빛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반딧불이로 가득한 숲속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 연한 빛들이 핸드폰의 차갑고 선명한 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하늘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들이 빛났다. 순식간에 빛으로 가득한, 밤의 숲 한가운데에 놓이게 되었다. 나는 길 위에 조용히 앉아 점멸하는 반딧불이의 빛들을 바라보았다. 사람은 왜 반딧불이의 빛에 매혹되는 것일까? 연약함 때문일까. 

 

숙소로 돌아와 불을 끄고 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다른 나라의 산 속에서 반딧불이를 보고 돌아와 낯선 방에서 잠을 청하는 나 자신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하는 기분이 들었고,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밤의 숲속에서의 경험이 꿈처럼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힘든 무서운 수수께끼처럼 느껴졌다. 그토록 아름다운 경험 이후에 어째서 이런 상태가 되어버렸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타이베이에서 묵기로 했던 숙소는 시내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는 조용한 주택가의 한 가정집이었다. 호스트는 자신을 비디오 아티스트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초행길이라 헤맬지도 모를 나를 위해 지하철역까지 마중을 나왔다. 숙소에 들러 짐을 내려놓고 동네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집에서 십분 정도 걸어 나갔더니 상점가와 시장이 나왔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카페와 음식점들을, 집 근처의 저렴한 마트를, 집 근처의 공원을 가는 방법을 꼼꼼하게 알려주었다. 여행이 아니라 이사 온 느낌이 들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안내를 받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오늘은 무엇을 할 계획이냐는 질문에 시립미술관에 갈 것이라고 대답했던 것이 무색하도록 미술관이 문을 닫을 무렵에야 깨어났다. 호스트는 외출하고 없었다.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고 이른 아침 비행기를 놓칠까 싶어 새벽부터 움직이느라 쌓였던 피로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때의 적막을 기억한다. 처음 도착한 낯선 작은 방에서 꿈도 없는 깊은 낮잠을 자고 일어나 텅 빈 집에 혼자 앉아 있는 동안 공간을 가득 채우던 깨끗한 적막을. 그것을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건 서울의 작은 내 방에서도, 일상 속에서 자주 경험하는 감각이었으므로. 어쩌면 그 평범함 때문에 이렇게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일지 모르겠다. 먼 곳으로 여행을 가더라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고, 어딜 가도 그저 나는 나인 것이다. 바꿀 수 없는 것들 속에서 돌멩이처럼 단단하게 굳은 채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열어둔 방문으로 함께 사는 고양이 미미가 들어왔다. 내 캐리어 곳곳을 꼼꼼하게 냄새 맡는 것을 보고 카메라를 꺼내 미미를 찍으며 웃었다. 그제야 나는 결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날 저녁을 어떻게 보낼지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정수리에 얼음물을 부은 것처럼 일시에 모든 감각이 깨어나던 그 깨끗한 적막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빛으로 가득하던 밤의 숲을 보고 돌아와 잠들기 위해 누워 있었을 때 경험했던 감각과 비슷했다. 내게 있어서 모든 경험의 중핵에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무의미가 존재하고 여행을 한다는 것은 그것을 극대화하는 일에 가까운 것 같다. 반딧불이의 수명은 이 주 정도라고 한다. 대만에 이 주 가량 있었으므로 나의 여행 기간이 어느 반딧불이에게는 태어나고 죽음을 맞이하는 전체의 일생이었을 것이다. 아리산은 천년 넘게 산 고목들로 가득했다.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린 채 천년을 살아온 나무들이 가득한 숲속에서 나의 삶은 반딧불이의 삶처럼 순간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우주 전체의 시간에 비교한다면 나와 반딧불이, 아리산의 고목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여행을 다녀온 지 한 달이 넘었다. 벌써 드문드문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겪은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속도보다 잊어버리는 속도가 더 빠르다.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연약한 빛과 깨끗한 적막에 대해 썼고, 이 또한 공정하게 잊힐 것이다. 그뿐이다. 

 

(시인동네, 2017년 7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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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것

장은정

 


어떤 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묻는다. 그것도 아주 직접적으로. 그때 시는 ‘삶’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당연하게도 삶은 나 자신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아서 김이듬의 『말할 수 없는 애인』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전화를 걸어와선 “눈이 와, 여긴 함박눈이야”(「함박눈」)라고 말하는 ‘너’에서부터 “인도 아프리카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사람들”,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인 학생들”(「말할 수 없는 애인」)도 있고, “미끄러운 언덕” 위에 있는 “오두막집의 삐걱거리는 문”을 열어야 만날 수 있는 “여태껏 보아왔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늙고 커다랗고 비만한 남자”도(「호수의 백일몽」) 있다. 처음으로 한국에서 첫눈을 맞아본 “쿠바에서 온 소녀”(「기적」)와 “7, 8년 만”에 동행한 “백발의 신사”도(「백발의 신사」) 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 시들은 그들에 ‘대해’ 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화자와 함께 있다. 함께 대화하고 함께 눈을 맞고 함께 통화한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시가 아니라 그들‘과의’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일어나는 일들로 가득해서, 어쩐지 김이듬의 시는 ‘텍스트’라고 말하기가 망설여진다. 화자와 시인을 혼동하게 하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김이듬의 시를 읽고 있으면 어쩐지 그녀의 ‘생활’에 동참하게 된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때로 그 생활은 예전에 좋아했던 남자와 그의 딸을 만나는 일이어서 함께 새로운 감회를 경험하기도 하고(「겨울 휴관」), 반년 넘게 비어있던 앞집에 누군가가 새로 이사 온다는 사실을 알고 먼저 도착한 이삿짐 속의 책 제목을 흘깃거리는 일처럼(「파도」) 두근거리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일상에 내재해있는, 우리도 한번쯤은 경험해봤음직한 감정들은 김이듬의 시에선 고스란히 ‘시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일화들이 있다. 가령 화자에게 “한국말을 배우던 베트남 여자가 도망”친 일 같은 것들, 결국 “나의 베트남 친구”가 “추방”되는 것을 지켜보는 일(「자살」). 이런 일화들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순히 ‘사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일화에서 더욱 치열한 자기인식의 문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음악도 독서도 나를 방해하지 않고/철거반도 폭격도 내 식사를 망치지 않는다”(「나는 세상을 믿는다」)는 그러한 자기인식에 의해 가능한 문장이다. 여기에는 ‘나는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음악과 독서는 언제나 ‘즐기는’ 것으로 기능하고 결코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 철거반에 대한 기사를 보며 분노할 수도,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쏟아지는 폭격에 비장해지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내 식사를 망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은 내가 지금 “평범한 기쁨”과 “엄청난 사태로부터도” “떠나 있는 것”임을(「함박눈」) 알게 해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멍청이 정신병자로 분류되지 않으려면/의심 속에서 처참한 현장을 목격해야 한다” “휴전 지대에서의 생존은 몇 편의 어이없는 영화를 더 보는 것”이기 때문에 “자살을 지연하는 용기와 인내심을” 가져야한다.(「자살」)

 

이러한 자기인식에 기반한 가치관은 김이듬의 시적 가치관과 직결되어 있다. 그에겐 일반적인 ‘시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에 대한 의심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문학적인 선언문」의 “나는 내가 시적이지 않은 시를 쓰며/시인답지 못하게 살다/문학적이지 않은 죽음을 맞게 되길 빈다”는 구절이나 「죽지 않는 시인들의 사회」의 “연애는 없고 사랑만 있다/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조용히 그리고 매우 빠르게/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했다”는 구절이 그러하다. 예술적 자율성을 파괴하고 삶으로 뛰어들 것! 이것은 아방가르드의 오래된 태도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저 구절들을 맥락 그대로 해석하는 일은 위험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이듬의 시들은 충분히 시적이기 때문에. 그러니 가장 중요한 마지막 질문을 던지자. 김이듬에게 ‘시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축하해
잘해봐
이 소리가 비난으로 들리지 않을 때

누군가 꽃다발을 묶을 때
천천히 풀 때
아무도 비명을 지르거나 울지 않을 때
그랬다 해도 내가 듣지 못할 때

나는 길을 걸었다
철저히 보호되는 구역이었고 짐승들 다니라고 조성해놓은 길이었다

 

―「꽃다발」 전문

 


좋은 일이 생긴 모양이다. 축하한다는 말과 잘해보라는 말들을 듣는다. 그 말이 어쩐 일인지 비난으로 들리지 않아서 그 좋은 일에 흠뻑 젖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천천히 꽃다발을 묶고 천천히 푸는 것과 같이 차분해서, 그 시간만큼은 “아무도 비명을 지르거나 울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듣지 못한다. 조용한 곳, 조용한 시간. 그런데 흔치않은 이 시간은 지나치게 너무 조용하다. 여기는 어디일까. 사실 그곳은 “철저히 보호되는 구역이었고 짐승들 다니라고 조성해놓은 길이었다”. 이 시를 다 읽으면 어김없이 몰려드는 이 이상한 기분의 정체는 이것이다. 「꽃다발」은 아주 기쁜 순간, 그 기쁨의 조용한 순간을 시적으로 구축한다. 하지만 마지막 연은 바로 그 시간이 어떤 극도의 배제를 통해 만들어진 것임을 서늘하게 일러주고 있다. 그래서일 것이다. 시를 다 읽고 나면 어딘가 갇혀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이 시는 김이듬의 이번 시집 『말할 수 없는 애인』에서 김이듬의 ‘시적인 것’을 가장 응축하여 뛰어나게 보여준다. 아름다운 것을 충분히 감응하게 한 후 그 아름다운 것의 잔인함을 드러낼 것. 

 

다시 한번 강조해야 할 것은 이러한 시적인 것을 만드는 원동력이 시에 대한 불신에서 온다는 점이다. 가령 이런 구절은 어떠한가. “절박하다는 건 뭔가 나는 시를 안 썼어도 목매달지 않았을 것이다 난 나를 저주하지 않으며 내 시는 볼펜으로 그린 내 손목시계처럼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나는 속없이 다정하고 인생은 덥다”(「오빠가 왔다」). 뒤표지 글도 일관적이다. “2, 3년 쓰다 말려고 했는데 이래저래 세 번째 시집을 묶는다. 이렇게 된 데는 시를 향한 열렬한 사랑이나 의지 같은 거보다는 그것들을 상실하고 상실해가려는 내 육신이 있었을 뿐.” 우리는 시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려줄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김이듬의 시는 자신을 부정하는 힘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사실 삶을 긍정하고 존중하는 힘이다. 그래서 김이듬은 이렇게 쓴다.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끝내 내가 말하지 못할 때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끝내 쓰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아들은 후에 그것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는 일이다. 가령 「여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같은 시는 그저 읽을 수 있을 뿐, 그에 대해 따로 말을 덧붙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_ 《애지》 2011년 여름호 발표. 

 

 

 

남아있는 한 조각

장은정

 


하루 중에서 박형준의 시에 가장 어울리는 시간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해가 지는 무렵일 것이다. 붉음과 어둠이 불길하게 뒤섞이는 이 시간에 대해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있다』에서 그는 이미 단 한 줄로 시를 쓴 적이 있다. “알 속에서 이미 날개를 편 새”(「저녁 노을」). 그 시간을 지나 찾아오는 밤은 “날아다니는 동물”과도 같아서 어린 화자는 석유를 먹고 온 몸에 물집이 잡혔다. 아버지가 아이를 안고 강가로 달리던 장면은 여전히 쉽게 잊히지 않는다(「백열등이 켜진 빈집」). 그래서 그 동안 박형준의 시를 함께 읽어온 독자라면 이번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의 첫 시를 보고 어딘가 울컥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아이를 안고 달리던 그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불길한 색감으로 묘사되었던 “저녁 노을”은 이제 “아버지 삼우제 끝나고/식구들, 산소에 앉아 밥을” 먹을 때 바라보는 “황혼”이 되어있다. 그 어둑한 빛에서 화자는 “창호지 안쪽에 배어든/초롱불”을 보고 “아버지가 삐걱 문을 열고 나올 것 같다”고 쓴다. 이제 해가 질 무렵의 시간은 이미지 자체라기보다 더욱 기억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변화는 제 1부 “아버지의 죽음에 바치는 노래”에서 시론으로 더욱 확장되고 있다. 시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를 가만가만 손가락으로 조용히 짚어간다. 거슬러 오는 동시에 미리 앞질러 가보는 것. 그래서 이 시들은 단순히 ‘애도가’가 아니며 ‘죽음에 관한 시들’이라고도 정리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생을 통과한 후에 비로소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빗속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만들어주던 밀가루 떡의 냄새를 맡거나(「별식(別食)」젊은 아버지의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보는(「꼬리조팝나무」) 시들은 아버지의 죽음이라기보다 삶에 가깝다. 이렇듯 시를 통해 아버지의 삶을 반추해보던 화자는 깨닫게 된다. 그의 삶이 “침묵”(「시집」)이었음을. 그 침묵의 삶은 아들이 쓰는 시를 “글씨”라고 부르곤 했었다(「가을밤 귀뚜라미 울음」). 그래서 “아버지 돌아가신 날/새 시집이 나왔다”는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침묵이 바람처럼 잦아든 후에야 시가 시작되는 것. 언어 이전에 삶이 있다는, 겸손하고 오래된 믿음은 “너는 삶 대신 이미지를 택했다.”(「서커스」)고 지적한다. 시인이 직접 뒤표지 글에서 자신의 시를 “기억을 향해 날을 세우고 있는 부재의 이미지”라고 쓴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를 기반에 두고 있다.

 

그동안 우리가 읽어온 박형준의 시가 삶과 죽음이 기묘하게 결합된 그로테스크한 색상이었다면, 이제 이 색은 삶을 잃은 이미지로 의미화 된다. 「당신의 팔」이 대표적이다. “당신의 팔 속에서/강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는 1연의 서정적 진술은 “사람이 사랑을/사랑이 사람을/못 믿고/사랑을 사람이 두고/못 믿”는다는 인식에 이른다. 그 때문에 “당신의 팔”은 “정육점 같은 팔”로서 일종의 고깃덩어리로, “강물”은 “고기 같은 강물”로 명명되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나는 언제나/당신의 팔에서 타인을 사랑”하고 “언제나 당신의 팔 속에서 죽”고 만다. 이미 “인간의 언어”를 알아버린 시인에게 아버지와 같은 “침묵의 삶”은 허락되지 않기에 언어는 삶에 가닿을 수 없고 시는 “가만히 펼쳐진 채 묘혈처럼 깊”어지는 것(「시집」)이다. 

 

삶이 제거된 이미지로서 이번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것 중 하나가 ‘빛’이다. 중요한 것은 그 빛이 태양의 빛이 아니라는 점이다. “해가 들지 않는 곳에서”(「해가 들지 않는 곳에서 빛이 내릴 때」) 내리는 빛이기에, “희한하게 빗속에서” 떠다니는 “빛들”에(「여우비」) 가깝다고나 할까. 본래 빛은 로고스로서의 진리를 상징해왔다. 하지만 박형준의 이번 시집에서 ‘빛’은 삶을 잃고 이미지로 존재하는 병든 빛에 가깝다. 「저녁 빛」에서는 그 동안 그의 시에서 중심을 이루는 저녁이라는 시간이 ‘빛’으로 형상화되면서 이미지로서의 저녁으로 고조되고 있다. 이때의 저녁은 “사물 속에 빛나는 고통”과도 같아서 노을은 “부드러운 상처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별들로/또 하나의 성좌를 이룬다”. “수평선의 빛”은 이제 “나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빛이 고통인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부재의 이미지이므로 더욱 간절히 ‘있음’을 요구하고, 그러한 요구 속에서 지금의 ‘없음’을 더욱 확연하게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빛을 “남은 빛”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그것은 삶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이 된다. 이것은 결여의 이름이 아니라 삶의 아주 작은 조각의 이름인 것이다. 제 1부 <아버지의 죽음에 바치는 노래>로부터 시작한 박형준의 시가 제 3부 <남은 빛>에 이르러 그 언어에 관한 자의식이 점차 더욱 섬세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삶의 한 조각이 언어라면, 그것은 당연히 “침묵으로 남은 빛”일 것이고 ‘침묵’인 삶을 쓸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일 것. 다만 그 가능성은 “너의 눈과 나의 눈에서 흐르는/눈물”로써만 피어나는 “꽃”과도 같다.

 

시적 언어에 관한 이러한 자의식 속에서 읽을 때, 표제시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는 더욱 크게 울린다. 이 시는 우선 가난했던 한 젊은이의 사랑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이는 지하방에 사는 한 젊은이와 작은 열매처럼 찾아온 사랑. 맨방바닥에서 나누던 사랑 끝에 낙과처럼 그녀가 떠났고 젊은이는 그녀를 기다리며 꽃무늬 요를 가만히 접어놓는다. 마침내 다시 그녀가 돌아왔을 때에야 지하방엔 꽃이 활짝 피어나는데, 마지막 연 “사과나무의 꼭대기,/생각날 때에만 울었다”를 읽고 나면 그녀가 이젠 영영 떠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만약 그녀가 우리가 끝내 잃어버린 ‘침묵의 삶’이라면, 사과나무 꼭대기야말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빛”은 아닐까. “생각날 때마다 울”수 있는 것은 아직 “사과나무 꼭대기,”를 잊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_《문학과사회》 2011년 가을호 발표.

 

 

 

알지 못하는 것들

장은정



유희경의 『오늘 아침 단어』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것은 가장 개별적인 차원의 시적 감정에 관한 시들일 것이다. 가령 티셔츠에 목을 넣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그 순간은 어느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가장 개별적인 시간이다. 그야말로 화자만이 겪는, 완전히 밀폐된 순간. 이런 순간을 시로 쓴다는 것은 예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더라도, 시를 당장 ‘여기 지금’으로 만들어 놓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개별적인 것이라 해도 1인칭의 그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감정이라는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꽃처럼 시시각각 모양이 달라지는 것이어서 스스로에게 차오르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1인칭 내부에 북적이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감정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속으로 내리는」은 바로 이 이질적 감정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순간을 잘 보여주는 시편이다. “원망하는 시간”과 “그만 갔으면 좋겠다가도 멈출까 봐 두려운 시간”, “너인 시간”이며 “네가 아닌 시간”인 동시에 “너를 생각하는 나도 아닌 시간”이 모두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시집에서 풀어놓는 마음의 결을 세세하게 엿듣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가만히 짐작해보고 있는 이 시간이 어째서 도래하게 된 것인지를 생각하는 편이 더욱 흥미로운 것 같다. 「K」는 그 과정을 역추적할 수 있게 도와주는 시편이다. 백발의 K는 창가에 서 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물러서거나 시선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창밖에는 바람이 앞에서 뒤로, 쓰러질 것처럼 불고 있었다.” 창을 사이에 두고 K와 나는 서로 다른 공간에 있다는 점에서 분리된 동시에 서로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볼 수 없는 것과도 같다. “K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게 나를 미치게 만든다.” 그를 바라볼수록 알 수 있는 것이라곤 지금 자신이 바라보는 것은 “K를 생각하는 태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타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반응의 바깥”에 위치해 있다. “그는 수천의 나비가 만들어낸 사람”인 것. 그렇게 타자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 수 없는 ‘우리’를 만들어낸다.

 

「K」가 닿을 수 없는 ‘너’에 관한 시였다면, 「내일, 내일」은 ‘우리’에 관한 시다. 둘은 “잘못 배달된 도시락처럼 말없이,” 마주 앉아 있다. 그들은 “서로의 눈썹을 향하여 손가락을, 이마를, 흐트러져 뚜렷해지지 않는 그림자를, 나란히 놓아둔 채 흐르는” 중이다. “오른쪽에 왼손을 대고 싶어져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궤적」 역시 “나와 다른 한 명이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둘은 어떤 대화를 나누었지만 사실 “각각 무슨 말을 했는데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야말로 “어쩌면 구름은, 그냥 보이는 것이”니까. 곧 다른 한명이 나무의자에서 떠나고 나만 홀로 남아 있는 것으로 시는 끝난다. 이 우리에 관한 시편들의 방향은 모두 동일하다. 타자로 향한 마음들은 창가처럼 단단한 유리에 부딪히고 그 유리가 유리 너머를 더욱 상상하게 만든다. 그 상상하는 마음들은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결국 끝없이 자기 자신으로 환원되는 것. 여기에는 어떤 깊은 무기력이 존재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무기력이 북적이던 모든 감정을 의심하는 순간에 다다르게 한다는 것이다. 「深情」이 대표적이다. 누군가가 “나를 물속으로 던졌다”는 진술 뒤에 의심이 따라붙는다. 어쩌면 그가 나를 물속에 던진 것이 아닐 것이라는 의심이 아니라, “물은 우리의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나는 물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감정에 대한 비유로 읽히는 ‘물’에 대한 의심이 인상적인 것은 이것이 그의 시 전반에 대한 의심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3연을 보자. “나는 물 아래로 흘러갔다/그때 나는 얼굴이 없었다/얼굴이 없어 눈물도 없었다/표정은 우리의 오해일지도 모른다”. 물에 대한 의심은 얼굴과 눈물, 표정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의심은 모든 감정을 흘러가게 하고 굳어가는 자세만을 남겨놓는다. “파쇄된 리듬처럼 굳어버”리게 되는 것. 

 

물론 이러한 슬픔들, 무기력들, 의심은 관계의 불가능성에서 기인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근원적인 기원을 따라가자면, 어쩌면 이 시집에 실린 모든 시가 ‘일어난 일’들이기 때문은 아닐까. “없어진 나날보다/있었던 나날이 더 슬”픈 것(「텅 빈 액자」)이다. 그의 시는 “택시에서 내려 문을 닫고 오늘 닫은 몇 번째 문인지 곰곰이 생각”하는 것에 가깝다. “문 뒤에는 또 문이 있고 문 뒤의 당신은 아직도 깜깜”한 것(「부드러운 그늘」)이다. 그렇게 일어난 일들의 문을 열어보고, 또 열어보면 또 다른 문이 나온다. 마지막 문은 「면목동」이다. 아내와 남편이 있다. 아내는 소주를 마시고 내내 울고 있고, 남편은 아내를 업고 대문을 나선다. 남편은 아내가 왜 울었는지 모른다. 유희경 시가 대부분 타자에 대해 그저 짐작만 하듯, 남편 역시 “미끄러지는 아내를 추스르며 빈 병이 되었다”. 이 연인 사이에서 조용히 ‘나’가 등장한다. “거기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건 남편과 아내 뿐이었다 마음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유희경 시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 시편까지 읽고 나면 이 시집이 일렁이는 마음들이 처음 생겨난 기원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내 안에서 흔들리는 마음조차 알 수 없는 이유는 가장 최초부터 우리의 존재는 아무도 모르는 순간 생겨났던 것. 시는 그 모르는 것들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_《시와 사상》 2011년 여름호 발표. 

 

 

시선의 공간에서 형성되는 ‘우리’의 비밀

장은정

 


김성대 시에서 시적공간은 대부분 동일한 시간을 반복하고 있다. 그것은 특정한 행동의 반복으로 기인하는 것이다. 가령 「둘째 주에 온 사람」에서 “우리”는 둘째 주마다 찾아오는 “그”를 둘러싸고 토끼들과 함께 도는 것을 반복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그가 사라져도 빙글빙글 도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이 반복되는 행동으로 인해 시의 모든 시간은 둘째 주가 된다. 또한 「1950년의 창고」에서의 시간적 배경인 1950년에는 몇십 년 후의 창문이나 테니스 공, 줄넘기 등이 1950년에 공존하고 있다. 1950년부터 몇십 년 후 사이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김성대의 시에서는 특정한 시간대의 “모든 것이 리플레이되고 있”거나(「우주선의 추억」) “여러 날 같은 컷이 반복되고 있다”(「만화에 빠진 윤사월」). 도대체 이 시공간의 반복은 김성대의 시에서 어떤 의미일까. 이것이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던져져야 할 질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시간적 반복에도 처음과 끝이 섬세하게 구분되고, 그 시간 내에서 시적 주어의 이동이 발생함을 알 수 있다. 가령 앞서 언급했던 「둘째 주에 온 사람」의 첫 행은 “그는 슬로 모션으로 왔다”이고, 마지막 행은 “둘째 주가 되면 우리는 상세해졌다”이다. 즉 시는 ‘그’가 왔다는 것에서 사실의 제시로부터 출발하여 그로 인해 영향을 받은 ‘우리’에게 도착한다. 대상을 진술하는 시선으로서만 존재하던 화자가 불쑥 얼굴을 내밀면서 대상을 시야의 중심에서 밀어내게 되는 것인데, 바로 그때 반복되는 시간이 발생한다. 시적 주어의 이동은 단순히 대상에서 주체로의 이동이 아니다. 그때 밀려난 대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화자가 바라보는 대상’으로서 남아있고 새롭게 등장한 시적 주체는 ‘대상을 바라보는 자’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김성대의 이 독특한 시공간은 타자와 주체 사이의 팽팽한 시선의 구조로 구축되어 있다. “목맨 사람의 집”에서 우리가 고요한 점심을 차릴 때, 그곳에는 우리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목맨 사람의 집」). 


그러니 김성대의 이 독특한 시공간에서 단독자로 존재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시선의 공간이기에 온갖 이질적인 요소들이 함께 공존하기 때문이다. 제 2부 <마임의 방>에 속한 시 대부분이 바로 이 수많은 타자들과 그 타자들의 눈에 의해 무한히 분해된 ‘나’들로 들끓는 공간을 묘사하고 있다. “노인이 아이와 일치하는 시간”이거나(「만화에 빠진 윤사월」) “불 켜진 돼지” 안을 열고 들어간 “남자”들이 북적이는 “봄”이거나(「돼지 (안)에서」) “큰 형의 재를 곱게 빻아 콜라에 타” 먹은 막내의 이야기인 것이다(「삼형제」).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무한히 분화된 주체 자체는 이미 경험한 적이 있다. 2000년대 시들의 시적 주체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김성대의 시는 분화된 주체 자체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의 시는 타자와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시선의 구조’를 전면에 내세우며, 그 구조를 프리즘으로 삼아 타자와 주체가 뒤섞이는 현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분명 낯선 시적 관점이다.

 

김성대의 시적공간은 시선의 구조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분화된 주체 자체를 상실의 표지로도 해방의 표지로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다만 시선의 공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극대화시키고자 한다. 「진찰」은 그 가능성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시편이다. 이 시에서는 ‘나’라거나 ‘우리’와 같이 명명할 수 있는 화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시적 주체는 “꼭 피를 나눠야 한다면”이라는 전제 하에 자신의 눈에 다른 “동물들의 눈”을 넣어보거나 “몸 안의 동물들이 숨는 그늘”을 널어본다. 이 행동은 필시 타자와 주체가 뒤섞이는 공간에 자발적으로 들어서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뜻밖에도 그는 그런 행동으로 인해 그동안 감춰져있던 우리의 비밀이 밝혀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있다(“우물 앞에서는 비밀이 없다고 했으니까/오늘 우리가 밝혀질지 몰라”). 그 비밀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심장이 몸에 꼭 맞”는 잔인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성대의 시는 ‘나’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섞여 있는 공간으로 걸어 들어가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결론적으로 ‘너’의 비밀 역시 ‘나’를 통해 알려질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있으리라. 2000년대 시들이 수많은 주체들이 자기 고유의 목소리를 내는 다채로운 공간을 경험하게 해주었다면, 김성대의 시는 그 주체들 사이에 거미줄 같은 시선의 그물망을 촘촘한 시적 공간으로 구축함으로써 서로가 함께 있을 때에만 생겨나는 ‘우리’의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김성대의 시가 보여주는 “오늘을 꼭 기억하자”.

 

_《창작과비평》 2011년 여름호 발표.

 

 

 

안부 개인전, 〔관사적 관계〕

레인보우큐브 갤러리(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91-27)

2019. 10. 11 ~ 10. 20

 

안부 작가의 작업에서 주된 대상은 ‘아버지’이다. 내가 안부 작가의 작업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남성이 남성을 대할 때 가부장제의 재생산에 기여하지 않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작업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들에서 작가는 유의미한 성취를 내놓기도, 때론 나이브한 전략에 그치기도 하면서, 그 가능성과 한계가 뒤섞인 결과물을 내 놓았다. 우리는 안부 작가의 이번 전시를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사유할 수 있다. 남성창작자는 페미니즘적 작업을 할 수 있을까? 이때의 페미니즘적 작업이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할까? 남성과 남성 간의 차이를 페미니즘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런 고민 속에서 흥미롭게 작업을 지켜보던 도중 전시의 서문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평소 전시를 다니는 입장에서 어떤 전시 서문들 중엔 의아한 경우가 많았다. 작품 해석 자체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지만, 어느 정도 해석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그 해석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차단하는 경우도 답답했다. 비평은 어떤 역할을 해야할까? 창작자와 향유자 사이에 어떤 비평적 개입을 해야할까? 전시 서문을 쓸 기회가 생겨서 더욱 이 문제를 곱씹게 되었고, 일반적인 서문 형식을 버리고 지령과 질문을 서른 개 정도 작성하여 ‘매뉴얼-비평’을 작성했다. 이 생소한 형태를 택한 것은 안부 작가의 작업이 갖는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다.

 

안부 작가는 회화와 사진, 비디오 작업을 넘나들면서 본인의 문제의식을 중첩시켜 나간다. 하나의 장르에 한 가지 작품이 귀속되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영상으로 찍고, 그 영상에 자막을 입힐 때는 유투브 브이로그의 형식을 차용한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을 전시할 때의 맥락에 의해 관객은 단지 ‘회화 그 자체’라는 전통적 접근 방식으로 그림을 감상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인스타그램 해시태그가 작동하는 방식을 차용하는 사진 찍기 방식을 택하되 그 사진을 인쇄하고 전시할 때는 전통적인 사진전이 갖는 형식을 차용할 때, 사진전에서 ‘사진을 본다’고 여기던 행위는 인스타그램에서 ‘사진을 보는’ 행위와 구분되는 간극 자체를 작업의 한 요소로 다룬다. 

 

이 같은 장르적 중첩성은 하나의 작품이 단 하나의 장르 문법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고 작가의 문제의식에 맞춰 여러 장르와 매체들이 ‘활용’되는 수행성을 지닌다. 즉 안부 작가의 작품에서 아버지가 어떻게 다뤄지는지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그가 여러 장르들이 갖는 차이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비평 역시 그 간극을 경험하게 만들어야하지 않을까? 안부 작가가 여러 장르들의 특수성을 하나의 작업 대상으로 삼았듯, 비평 역시 작품과 관객 사이에 성립하는 여러 구분들 자체를 비평해야 하지 않을까? “매뉴얼-비평”은 안부 작가의 작업에 대한 나의 첫번째 비평적 응답이다. 

 

 

매뉴얼-비평

*전시를 함께 즐기는 매뉴얼과 질문을 제공합니다.
*동행이 있다면 아래의 질문들을 함께 이야기 나눠보세요.

A관 (1~7번 작품)
1. A관으로 입장하여 7번부터 오른쪽으로 돌아 3번, 4번, 5번, 6번 순서로 관람한다.
2. 인스타그램에 접속하여 #ootd 해시태그를 검색어로 넣는다. 검색되어 나온 사진들과 3번~7번 작품들을 비교해본다. 비슷한 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일까?
3. 피사체가 들고 있는 물건이 있는지, 그 물건이 무엇인지 기억해둔다.
4. 7번 작품 오른편의 작은 a방으로 들어가서 1번 작품을 관람한 후, 3~7번까지의 작품과 1번이 어떤 점이 다른지 비교해본다.
5. 피사체가 왜 어떤 물건들을 손에 쥐고 있었는지, 2번 작품에서 그 맥락을 찾아본다.
6. 2번 작품은 왜 ‘원고지’에 ‘손글씨’로 작성되었을까?
7. 3~7번 피사체 코디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색 계열이 있는가? 어떤 색 계열의 선호도가 나타나는가?

B관 (8~10번 작품)
8. B관으로 이동하여 8~10번 작품을 관람한다.
9. 셋 중 어느 그림이 가장 좋은가?
10. 그 이유는 무엇인가?
11. 셋 중 어느 그림이 가장 ‘잘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 하는가?
12. 9번 질문과 11번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일치했는가?
13. 만일 불일치했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그림과 ‘잘 그린’ 그림의 기준은 어떻게 다른가?

C관 (11번 작품)
14. C방으로 이동하여 영상을 관람한다.
15. 안부 작가에게 그림을 가르쳐주는 세 명의 선생님들은 안부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가?
16. 세 명은 모두 같은 것을 가르치는가? 만약 다른 것을 가르친다면 어떤 차이가 있는가?
17. 그림을 배워서 그리는 과정을 비디오로 찍어서 보는 것이 당신에게 재밌었는가? 재미가 없었다면 왜 재미가 없었는지, 재밌었다면 어떤 지점이 재밌었는가?
18. 안부 작가가 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그림을 배우는 과정을 우리가 함께 관람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9. tmi와 11번 작품의 차이는 무엇일까?
20. 무엇보다, 안부 작가는 ‘굳이 왜’ 그림 그리기를 배우려고 하는 것일까?

D관 (12번 작품)
21. D관으로 이동하여 12번 영상을 관람한다.
22. 안부 작가는 왜 아버지를 그리는 것일까?
23. 아버지를 그리는 과정에서 비디오에 찍힌 모습과 다르게 그린 점은 무엇이며, 다르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24. 그림을 그리는 도중 나누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에서 당신에게 인상 깊었던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B관 (8~10번 작품)
25. B관으로 ‘다시’ 이동하여 8~10번 그림을 ‘다시’ 관람한다.
26. 영상들을 관람한 후에 이 그림들이 다르게 보인 지점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왜 다르게 보였을까?
27. 그림이 제작된 모든 과정을 보고 나서 세 그림 중 가장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그림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나가며
28. 만약 안부 작가가 여성이었다면 이 전시에서 결정적으로 달라졌을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29. 검색창에 ‘관사’를 검색하여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고, 이 전시 제목이 왜 ‘관사적 관계’인지 추측해본다.
30. 만일 당신이 이 전시의 제목을 짓는다면 뭐라고 지을 것인가? 그렇게 제목을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지령 및 질문 작성자_ 장은정(비평가)
창작자와 향유자 사이에 비평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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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읽기'는 행동일까, 아닐까? 책상 앞에 앉아 한 권의 책을 읽으며 하루를 통째로 보낸 한 사람을 상상해본다. 그 사람이 책을 읽는 동안 세계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만일 그 사람이 책을 읽는 대신 집을 짓는 것에 하루를 할애했다면, 저곳에 있던 몇 개의 벽돌들이 이곳으로 가지런하게 옮겨지고, 여러 나무 판자들이 일정한 모양으로 잘리고 배치되고 연결되는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이때 그 사람이 한 행동이 세계에 일으킨 변화는 명확해보인다. 어떤 사건이 명백히 발생했고 그것은 미세하게나마 세계를 다르게 변형시킨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벽돌과 나무판자들을 어떤 목적에 맞춰 변형시키는 대신, 책을 읽었다. 그렇다면 이 세계엔 하루동안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그건 어떤 건축물을 쌓아올리는 일과는 분명 다른 종류의 일이다.

하루에 시집을 다섯 권씩 읽던 시기가 있었다. 대학을 다니던 시절이었고, 당시 집이 학교에서 멀어서 학교에 가려면 한 시간 반 정도를 이동해야 했다. 왕복으로 대략 세 시간은 걸리는 그 시간은 언제나 시집을 읽는 시간이 되었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수업과 수업 사이의 공강 시간, 학생으로서 의무적으로 해내야 하는 과제와 같은 일들이 끝난 이후의 남는 시간은 모두 시집을 읽는 시간이었다. 그건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고, 그걸로 무언가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기'에는 시를 이루는 단어, 문장, 심지어 조사 하나, 문장 부호까지도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와닿았다. 

 

늘 어려운 수수께끼처럼 느껴지던 시들이 갑자기 무슨 뜻인지 명료하게 독해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시를 어려운 장르로만 여기던 시절에도 시는 모호했고, 하루에 다섯권씩 읽어치우던 '그 시기'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그 모호함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에서 불편함이나 거부감보다는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비밀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읽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는 문장으로 글을 처음 열었지만, 여러 종류의 글 중에서도 시를 읽는 것이 특히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지식을 전달하거나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명료함들에 저항하는 모호함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시라는 장르의 특수성 때문이다. 지식의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읽기 행위는 '배움'이라고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하루종일 시를 읽은 자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배움'이 없던 무언가가 새로이 생겨나는, 즉 더해지는 사건이라면 시 읽기는 오히려 반대의 일, 덜어내는 사건에 가까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쉽게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모호함 앞에서 읽는 자는 무언가 배우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한 질문을 듣게 된다. 가령 이런 시는 어떤가.    

 

우리 둘이는 서로 손을 맞잡고

어디서나 마음속 깊이 서로를 믿는다

 

아늑한 나무 아래 어두운 하늘 아래

모든 지붕 아래 난롯가에서

태양이 내리쬐는 빈 거리에서

민중의 망막한 눈동자 속에서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들 곁에서라도

어린아이들이나 어른들 틈에서라도

사랑은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우리들은 그것의 확실한 증거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음속 깊이 서로를 믿는다.


_폴 엘뤼아르, 「우리 둘이는」 전문

 


두 사람이 있다. 그 중 한 사람의 목소리로, 시는 우리 두 사람이 “어디서나” 서로를 믿고 있다고 말해준다. 이때의 '어디서나'라고 하는 것은 “아늑한 나무 아래 어두운 하늘 아래"가 되기도 하고, "모든 지붕 아래 난롯가"이거나 "태양이 내리쬐는 빈 거리"이기도 하다. 이때 나열된 것들은 구체적인 '장소'들이지만 "민중의 망막한 눈동자 속"이나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들 곁” 혹은 “어린아이들이나 어른들 틈"처럼 상대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이 시는 일견 추상적인 것으로 이해되기 쉬운 '사랑'이라는 가치가 서로를 깊이 믿는 두 사람을 통해 그 관념성을 벗어던지고 실재하는 것으로 명확하게 존재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증언한다. 

그렇다면 이 시에 모호성이란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이 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믿으며, 그 믿음이야말로 사랑이라는 것. 이렇게 요약하고 보면 참으로 명료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서로를 믿게 된 것일까? 그 믿음이란 그토록 '어디서나’ 존재할 수 있을 만큼 견고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 무엇보다 믿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시는 이처럼 시가 다루고 있는 대상인 '믿음'의 기원과 경로, 의미에 대해 그 무엇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 시의 모호성은 바로 여기서 비롯하며 동시에 이 시의 강렬함 역시 그 과정을 대담하게 건너뛰고, 그럼에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증언함으로서 발생하는 것이다.

어떤 시들은 읽는 자의 마음을 완전히 부서버린다. 자고 일어났더니 친구가 핸드폰으로 이 시를 보내놓았다. 잠결이라 아무런 대비없이 이 시를 읽고서는 나는 내 마음이 완전히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믿음과 사랑, 그리고 그러한 믿음과 사랑을 통해 살아가는 두 사람에 대한 이 시는 정말 아름다운데, 어째서 내 마음을 산산조각 내버렸을까? 아마 그건 내가 그토록 강인하고 완벽한 믿음과 사랑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을 절절히 깨닫게 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시 속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끝내 누군가를 믿지 못했던, 그리하여 끝내 도달하지 못했던, 불완전한 나의 사랑과 나의 한계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잊어야만 했던, 고통스러웠던 기억들 모두가 이 시를 통해 생생하게 이끌려 나왔다. 덕분에 이 시를 읽었던 하루종일 나는 슬픔에 잠긴 채로 무겁게 가라앉은 채로 하루를 보냈다. 그날 나에게는, 그리고 세계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2017년 8월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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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들은 상처를 요구한다

장은정
 


멍들고 살갗이 찢어져 피를 흘리며 울고 있는 아이에게 지나가던 한 어른이 다정하게 일러준다. 간절히 바라기만 한다면, 신은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준단다. 그날 밤, 아이는 불 꺼진 교회를 조용히 숨어든다.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보는 기도는 이것이다. 그들을 모두 죽여주세요. 아이에게는 살인만이 유일하게 간절한 바람이었으리라. 최치언의 두 번째 시집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는 이러한 최초의 기도를 닮아 있다. 그러니 가까스로 도달하는 화해나 위안이 주는 온기와 같은 것은 이 시집과 거리가 멀다. 

 

이 시들은 아이의 기도처럼 세계의 비참과 폭력에 ‘대응’하고자 한다. 화자는 “발길에 차이면서” “엄마, 제가 죽여드릴게요. 다 죽여드릴게요.”(「매장된 아이」)라고 거듭해서 다짐하거나, “봄나물 같은 여자아이들이 나팔랑거리며/줄넘기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 여자아이들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 하나만/새겨줄 수 있다면”(「일생에 단 한번」)라고 중얼거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최초의 기도 내부에서는 여전히 이런 문장들이 통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은밀한 살인이 아니면 진실은 창틀 위에서 썩는다.”(「떡갈나무아래」). 이 시들은 분노와 증오의 근원적인 형태를 시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내가 너희들을 견디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너희가 내 뒤통수에 낯익은 얼굴처럼 붙어 울고 웃고 춤추는 것을
내가 견디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견딜 수 없다면 내가 나를 죽여 너희도 죽여야 하는가.

한순간, 극렬한 감정들이 눈동자에 고인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뒤표지 글 중

 


이토록 단호할 수 있는가. “내가 너희들을 견디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라니. 여기에는 타자의 눈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하여 바라보는 ‘타자로의 우회’라고 할 만한 모든 가능성이 완전하게 차단되어 있다. ‘나’ 역시 ‘너희들’의 입장에선 ‘너희’일 수 있을, 그 모든 가능성 말이다. 이 문장들에겐 어떤 잠재적인 형태로도 ‘너희들의 관점’이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이 시들이 스스로도 누군가에겐 폭력일 수 있는 가능성이 배제되어 있는 ‘반성 이전’의 세계이며, ‘사유와 교육 이전’의 세계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목소리는 완벽한 일인칭, 밀폐된 일인칭의 것이다. 그러니 이 문장들이 이토록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호함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문장을 읽는 우리가 스스로를 타자의 눈으로 대상화시켜 바라보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세계는 완벽한 일인칭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내 뒷통수”에는 끔찍하게도 “너희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낯익은 얼굴처럼 붙어 울고 웃고 춤”춘다. 그러니 위 문장들은 ‘나’라는 존재에 불순물처럼 섞여드는 ‘타자’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최초의 폭력과 억압에 맞서 내지른 최초의 분노이다. 너희를 죽이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죽”이는 방법 밖에 없을 만큼 ‘나’가 ‘너희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아이는 이제 알게 되었다. 그들을 모두 죽여주세요. 하지만 당연하게도, 아무리 간절히 원한다고 해도, 이 최초의 기도는 실현되지 않는다. 그제야 마지막 문장이 가능하다. 

 

“한순간, 극렬한 감정들이 눈동자에 고인다.” 여기서 ‘극렬한’이라는 형용사에는 분노와 울분, 슬픔이 이상하고 빠르게 혼합된 최치언만의 시적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밀폐된 일인칭과 그러한 일인칭을 무화시키려는 세계와의 충돌, 그 속에서 이 낯선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넘칠 것만 같은 잔처럼 감정적이고, 때로는 깨어져버릴 듯 위태로우며, 머뭇거리지 않고 눈알을 그어버릴 듯 공격적이다. 이처럼 이 시집의 많은 시들이 다양한 종류의 폭력과 억압에 대항하여 이 낯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데 이 낯선 목소리가 투명한 분노들을 통과하여 가장 ‘극렬한’ 지점에 가닿을 때,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극렬함’만으로 시를 쓴다면, 시가 이토록 차가워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모두 우측으로 걷고 있었다. 그때 좌측에서 소리가 들렸다
듣지 마라
소리는 계속해서 우리들의 귓전을 때렸다
귓속에서 시뻘건 태양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좌측은 연필의 힘을 믿는다
나무의 치졸함을 믿고
의사당의 순결을 믿는다
좌측은 형제들의 오만을 믿는다
그러므로 좌측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우리가 늙는다는 것도
너희들이 여자이었다가 남자가 되고 그리고 여자로 사랑하는 나약한 방식을 믿는다

귀를 도려내라

그리고 우리는 귀 없이 계속 걸었다. 그때 좌측에서 움직였다
보지 마라
움직임은 계속해서 우리들의 눈꼬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담장의 덩굴이 눈알을 휘감아 낚아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

좌측은 우리들 반대쪽으로 기울어 있다
높은 담장을 드리우고 좌측은 아무것도 치료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좌측의 말이
칼처럼 우리 몸을 찌르고 들어왔을 때 우리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많이 순진해졌다
우리가 더 이상
선한 꿈을 꾸지 못한다는 건 좌측에게 우리들의 악몽을 맡겼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 있을 때

눈알을 파라

눈알 없이 우리들은 우측으로 걷는다
좌측이 우측이 될 때까지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우리는 우측하고만 싸웠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
이것이 좌측이 준 선물이다

 

ㅡ 최치언,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전문

 


이 시를 주도하는 것은 단연 ‘걸음’일 것이다. 다소 정지된 느낌을 주는 좌측에 대한 진술들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걷고 있었다”, “계속 걸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라는 구절들이 중간 중간 삽입됨으로써 시는 계속해서 걷고 있는 느낌을 준다. 이것이 이 시를 지탱하고 있는 굵은 선이라면, 우측의 걸음을 소리로, 시선으로, 자꾸만 잡아당기는 좌측은 이 굵은 선의 두께와 걸음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고 깊어지게 만든다. 이 시에서 좌측과 우측은 일견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읽히지만, 사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구분’되어 있을 뿐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측에서 걷고 있어도 좌측의 소리들을 들을 수 있고 좌측의 움직임들을 볼 수 있다. 오히려 너무나 주도면밀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도려내고, 보지 않기 위해 눈알을 파는 것이다. 그러니 좌측과 우측 사이의 복합적인 애증 관계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좌측이 믿고 있는 것들은 모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무용해서 이상적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이다. “연필의 힘”이라거나, “나무의 치졸함”, “의사당의 순결”, “형제들의 오만”과 같은 것들. 이것은 현실세계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존재해야할 것들에 가깝기에 이 좌측의 믿음을 우측이 가진다는 것은 현실적인 우측의 세계와 충돌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섬뜩할 만큼 단호한 이 명령들, “듣지 마라”, “귀를 도려내라”, “움직일 수 있을 때//눈알을 파라”와 같은 구절들은 너무나 깊고 잔인한 애정에서 나온 것들이다. 좌측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꿈꾸게 하지만, 그 꿈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고 있기에 좌측 자신으로부터 우측을 보호하고자 한다. 심지어 귀를 도려내거나 눈알을 파서라도. 그래서일까, 다음의 구절이 이 시에서 가장 깊은 감정을 건드린다. “사랑한다는 좌측의 말이/칼처럼 우리 몸을 찌르고 들어왔을 때 우리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많이 순진해졌다”.

 

그렇다, ‘믿는다’는 것은 많은 것을 가져가지만 아무것도 치료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랑이란 칼처럼 찌르는 것, 꿈꾸게 하지만 그 대가로 귀와 눈알을 가져가야만 하는 것.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측이 걷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귀와 눈알이 없어지더라도 우측은 계속 걸으면서, 모든 것을 잘라내면서, 좌측의 존재를 계속해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좌측이 우측이 될 때까지”. 그렇게 해서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모두 죽는 일 밖에 없다. 어떤 보상도, 치료도 주어지지 않는다. 시는 담담하게 마지막 행을 마무리 짓는다. “이것이 좌측이 준 선물이다”. 그렇게 제목은 이제야 우리를 최종적으로 이해시킨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놀랍지 않은가. 많은 다른 시들이 내 뒤통수에 붙은 ‘너희들’에 대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것과 다르게, 여기서 우측은 좌측과 공존할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내어주면서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 냉정하고 잔인한 극렬함이 “내 뒷통수에 낯익은 얼굴처럼 붙어 울고 웃고 춤추는 것”을 ‘감내’함으로서 생겨난다니. 이 시집을 읽으며 가장 깊은 분노와 가장 완벽한 꿈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완벽한 꿈과 불가능성이 공존하며 만들어내는 비장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물’하는 이 시집은 아름다움의 결론이 언제나 공허하고 허탈한 죽음으로만 귀결된다는 ‘피’의 진실을 요구한다. 그렇다. 어떤 시들은 상처를 요구한다.

 

_《문장웹진》 2010년 1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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