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립니다. 

1. 저는 2019년 겨울에 '노동자로서의 평론가'라는 주제를 청탁받아서, 11년간 발표한 원고에 각각의 일련번호를 붙인 후, 청탁서 여부와 고료 기재 여부, 매수 및 입금고료와 입금날짜까지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이 파일을 완성하는 것에만 한달이 걸렸고, 이 데이터들을 대상으로 「지나간 미래」를 작성했습니다. 이 글은 『자음과모음』 2020년 봄호(링크)에 실렸습니다. 

 

2. 경향신문의 이영경 기자님께서 위 글을 읽으시고 인터뷰를 요청해주셨습니다. 이 인터뷰를 기반으로 "매당 5000원의 삶" '노동자로서 평론가'의 삶은 가능한가'(↘링크) 기사가 작성되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이영경 기자님께서 정리하시기 전, 제가 작성한 인터뷰 원본 전문입니다. 이영경 기자님의 동의 하에 전문을 공개합니다.


이영경 : 글을 읽는 독자를 30년 후인 2050년의 독자로 상정하고 글을 쓴 이유가 있으신지요.

 

장은정 : 우리는 일상에 주어진 과업들을 하루하루 소화하기도 벅차기에 내가 처해 있는 여러 조건들이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특정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을 사유하기 힘듭니다. 제가 만일 2050년의 관점을 도입하지 않고 이 글을 썼다면 출판 산업의 구조 속에서 평론가가 갖는 열악한 노동조건을 폭로하는 것으로만 읽혔을 것입니다. 적을 상정하고 분명한 전선을 그어 프레임을 짜는 것은 빠른 시간 내에 사람들을 함께 행동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효율적이며, 이런 방식의 운동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장기적인 방향성 없이 이 방식이 반복될 경우, 그에 참여한 사람들을 궁극적으로는 무력하게 만들 우려가 있습니다. 느리더라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경험의 축적이 없다면 모든 노력이 무의미한 반복으로 경험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지금으로부터 30년 이후라는 설정은 ‘어떤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가’라는 질문과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두 가지 질문을 동시에 맞물리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태어난 아이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살게 될 세상은 지금의 우리에게 큰 책임이 있습니다.

 


이영경 : 2009년 등단, 11년 동안 문학평론가로서 일해왔습니다. 11년이라면 짧지 않은 기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은행 계좌를 들여다보며 지난 11년의 평론가로서의 삶을 돌아보니 어떤 소회가 들었는지 궁금합니다.

 

장은정 : 저는 이 작업을 하기 전에는 제 문학관과 비평관을 통해 저를 어떠어떠한 평론가라고 이해해왔습니다. 그런데 은행 계좌에 입금된 내역을 보면서 저의 자의식과는 별개로 현재의 한국 사회의 출판 산업 내에서 문학평론가에게 부여된 장소가 고정된 상태로 반복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11년 간 쓴 비평들의 총 매수와 원고료 총액을 계산해보니 1매당 오천원 정도였고, 월 평균 46만원을 벌었습니다. 이것은 제 삶의 조건일 뿐 제 가치를 매기는 것이 아닌데도 제가 매당 오천 원짜리 삶을 살았다는 자괴감을 떨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처한 경제적 조건과 제 삶이 갖는 의미를 구분하여 사유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옳은 태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경제적 조건이 비평이라는 장르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비평가로 하여금 어떠한 자의식을 갖게 하는지 그 관계를 더욱 면밀히 사유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 중입니다.

 

 
이영경 : 비평가의 역할이 ‘지식인-비평가’에서 ‘작가-평론가’로의 변화를 소영현 선생님의 말씀을 인용해 말씀하셨습니다. ‘작가-비평가’는 개별 작품을 꼼꼼히 읽고 해설하고 비평하는 평론가, ‘서평가로서의 평론가’에 가깝게 들리는데요, 제가 해석한 말이 맞을까요? ‘작가-비평가’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장은정 : 소영현 평론가는 ‘작가-평론가’의 기반이 황종연, 이광호, 김형중 평론가에게서 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분석합니다. 저는 이 기반이 2000년대에 이르러 신형철 평론가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2008년에 발간된 그의 첫 평론집 서문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나에게 비평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아름답게 말하는 일이다.” 대략 10년이 지난 2017년, 《문학동네》 인터뷰에서 권희철 평론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에게 비평은 작품에 대한, 작품에 의한 비평입니다.” 이런 입장에서는 비평이 작품을 경유하지 않고는 세상의 비참과 폭력, 고통에 대해 ‘직접’ 발언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작가-비평가’ 모델에 근본적인 의심을 갖게 된 것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일부 남성평론가들이 페미니즘 비평을 쓰는 여성평론가들의 글을 비판하면서 비평가는 작품을 충실히 읽는 직업이지 그런 식의 현실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목격하면서부터입니다. 그 이후, ‘지식인-비평가’ 모델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기획에서 시작된 ‘작가-비평가’ 모델 역시 그 역사적 유효성이 끝났다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이영경 : ‘주니어 평론가 시스템’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문학 출판사에서 ‘젊은 평론가’들을 10년 정도 활용하고, 10년이 지나면 다음 세대의 평론가들에게 또 ‘젊은 평론가’의 역할을 부여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들이 ‘젊은 평론가’로서 여러가지 역할을 요구받고, 최근 유튜브 등 영상 콘텐츠까지 확대되면서 역할 또한 다양화되는 가운데 충분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젊은 평론가’로서 평론가의 경력에 얻은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10여년의 ‘젊은 평론가’로서의 경력이, 현재 선생님의 앞으로 평론가로서의 경력을 만들어 나가는데 어떤 연결점이나 커리어로 작용하는지 궁금합니다.

 

장은정 : 저의 11년의 경력 중 ‘젊은 평론가’로서의 경력은 5~6년 정도입니다. 7년 차 쯤, 90년대생 평론가들이 유입되면서 짧은 리뷰 지면 청탁 대신 대체로 긴 분량의 원고 청탁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제가 기성 평론가로 분류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5~6년간의 ‘젊은 평론가’로서의 경력을 통해 제가 얻게 된 것은 출판 산업이 신간이 출간되는 속도에 맞춰 ‘젊은 평론가’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그 구조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번 《자음과모음》(2020년 봄호)에 발표한 「지나간 미래」는 그 이해를 역으로 활용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출판계에서 비평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질 것으로 보이고, 만약 제가 앞으로도 이곳에서 경력을 쌓아나간다면 그것이 어떤 형태일지 아직은 예상하기 힘듭니다. 

 


이영경 : 젊은 평론가들이 ‘과분하게 주어지는 큰 기회’라 받아들여 제대로 된 청탁서나 보상 없이 ‘인정’을 위해 일하고 10년이 지나면(물론 교체 주기는 다른 업종에 비해 깁니다만), 다른 ‘젊은 평론가’들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어찌보면 이는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반적 상황 같기도 한데요. 정당한 보수 없이 스펙 쌓기나 ‘기회’를 위해 일하고, 안정적인 직업이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측면 말이죠. 예를 들어 인턴 같은 제도가 대표적일 것 같습니다.

 

장은정 : 동의합니다. 이번 이상문학상 사태 속에서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 출판지부가 발표한 성명서에는 출판계에서는 외주노동자 뿐 아니라 재직 중인 출판노동자에게조차 근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으며, 10년 넘는 경력을 쌓고도 아웃소싱의 영역으로 내몰린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번 이상문학상 사태에서 언론노조의 성명서가 나왔을 때 가장 반가웠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구체적인 발화 없이는 (한국출판인회의의 입장문에서 목격할 수 있는 바와 같이)창작자와 출판사라는 대립구도로 단순하게 이해되기 쉽고 그 과정에서 출판노동자들이 처한 노동환경이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문학평론가’가 처해있는 이 특수한 노동환경이 ‘문학출판계’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고 여기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문학출판계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처해있는 상황들이 더욱 입체적으로 가시화되어 어떤 연결점으로 맞물려 있는지 ‘공적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영경 : 2015년 신경숙 표절 사태, 2015~2017년 문학잡지 혁신호,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폭로, 2017년 최영미 시인 미투, 2020년 1월 이상문학상 저작권 문제를 경험하면서 평론가로서의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하셨습니다. 각각의 사건을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이 평론가님 개인에게, 또 문단 제도 전체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보시는지요.

 

장은정 : 우선 저는 이 사건들이 문단 제도 전체에 끼친 영향을 조망할 만한 안목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 경험적 범주와 비평관을 통해 답변하고자 합니다. 저는 최근 다른 지면에서 이 사건들을 기존 문학출판계를 향한 ‘질문하기’의 역사라는 점에서 하나의 큰 흐름으로 묶은 바 있습니다. 이 시기와 제가 기성평론가로 분류되기 시작한 시점이 맞물려 저는 각 사건들에 대해 여러 번 발화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에 발표한 글들은 이전의 글들과 확연한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그전의 글들이 특정한 작품이나 작가가 갖는 문학적 가치를 부여하는데 지면을 할애했다면, 이 시기는 위 사건들의 발생 구조를 분석하는 것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합니다. 즉 저는 이 시기를 통과하면서 매체 비평, 제도 비평 쪽으로 관심사가 이동하여 일종의 ‘작가 중심주의’에서 이탈하게 되었습니다. 신경숙 표절 사태는 문예지 혁신의 계기가 되었지만, 그때 문학계가 꿈꾼 ‘혁신’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출판계 성폭력 말하기 운동에 참여한 피해자들 대다수가 가해자들로부터 역고소를 당했고 길고 고통스러웠던 재판 결과가 하나둘씩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론화조차 되지 못한 피해사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지금은 문단 제도 전체에 끼친 영향보다는 문학출판계를 이루는 구성원들 각각에게 이 시간들이 어떤 경험으로 남아있는지, 그때 고려되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영경 : 이상문학상 사태, 백희나 작가의 <구름빵> 저작권 소송 패소 등으로 저작권 등 작가 권리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비해 작가들의 권리의식이 높아지는 등의 변화로 문학상, 출판시 작가들의 저작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개선되는 사례가 있기도 한데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 알 수 없는 곳, 규모가 작은 출판사의 경우는 이런 부분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금 문학 출판계가 작가들의 저작권을 충분히 보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장은정 : 얼마 전, 우롱센텐스의 주최로 〈예술인을 위한 권익 보호 워크숍〉이 열렸고 2월 19일에 ‘계약 및 저작권’에 대한 세미나가 진행된 바 있습니다. 현실을 이야기하자면, 이번 이상문학상 사태를 계기로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권리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한 여러 교육들을 필요로 하는 시기라고 판단됩니다. 사실 ‘작가들’이라고 묶어서 이야기하지만 장르별로 처한 상황이 워낙 다릅니다. 제가 입금내역을 기반으로 출판산업의 구조에 대해 서술한 글을 시인이나 소설가 친구들에게 먼저 보여줬을 때, 평론가들이 이러한 시스템 속에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작가가 갖는 노동권리 문제는 장르에 따라 전혀 다르게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그 특수성을 고려해가면서 앞으로 더욱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나가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영경 : 페미니즘 비평 아카이브(↘링크)를 운영하고 계신대요, 이런 시도 또한 ‘평론가로서의 역할 재정립’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까요? 이런 아카이브 작업의 의미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갈지 계획이 있으신가요.

 

장은정 : 2016년 10월의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은 SNS의 특성과 언론사의 보도 형태, 문학잡지에서의 특수한 비평적 접근 방식, 한국사회 내 페미니즘의 흐름 등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복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각자 사용하는 매체가 달라 이 사건들을 기억하고 경험하는 방식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저는 서로 다른 기억과 경험들이 동일한 시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으며, 서로 다른 데이터를 한 번에 모아볼 수 있는 페이지가 있다면 ‘공동 시간’을 구축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 아카이빙 페이지는 1. 언론사 보도 기사 2. 문학잡지 관련 기획 3. 관련 행사들의 자료집 4. 당시 출간된 페미니즘 신간 서적의 목록 등으로 구성됩니다. 이는 제게 파편적으로 흩어진 데이터들을 일정한 년도와 월에 모아 ‘동시대’를 데이터로 재구성하는 적극적인 비평적 개입입니다. 또한 이 시간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시간을 어떻게 기록하여 남길 것인가’에 대한 제 방식의 대답이기도 합니다. 이전에는 ‘문학평론가’로서 출판사로부터 청탁받은 원고를 작성하는 것에 골몰했다면, 이제는 ‘비평적 행위’가 앞서고 글쓰기는 그러한 비평적 행위의 한 요소로 삼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아카이빙 팀 ‘모월모일’ 멤버로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2017년 이후의 폴더들을 데이터로 채우는 일에 주력하려고 합니다.

 


이영경 : 이전에 ‘작가연대 총파업’이란 글(↘링크)을 쓰신 적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도 작가들의 노동조합 결성, 단결권과 단체행동권 등 행사를 통해 원고료를 인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국회 계류중인 예술인권리보장법이 예술인의 단결권을 가능하도록 하고 있지만, 국회의 태업으로 법 통과가 요원한 상황입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예술인 협동조합 등 결성을 염두에 두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장은정 : 예술인권리보장법은 여성예술인연합이 오래 천착해온 작업으로서 예술계 성폭력 말하기 운동의 성과 중 하나입니다. 문학계에서는 이성미 시인께서 여성예술인연합의 멤버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법적 토대의 마련은 당연히 필요하며 아주 중요한 사안입니다. 그런데 문학출판계에서 이러한 법적 토대를 기반으로 조직이 만들어진다면 그 특수성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19년 1월, 문학웹진 《비유》와 《문학3》이 공동 기획한 행사 〈내/일을 위한 시간〉(↘링크)을 통해 ‘만일 협동조합이 생긴다면 우리의 글쓰기 환경엔 어떤 변화가 생길까?’라는 질문을 던져본 바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행사 참여자분들의 의견들 중, 협동조합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등단제도에 의한 위계가 작동할 것이고 모이는 일이 오히려 서로를 낙인찍고 소외시키는 일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습니다. 이런 의견들을 경청하면서, 조직을 만들어나가는 과정 자체가 그동안 문학출판계에서 작동해오던 다양한 방식의 위계를 해체하는 방식이 되지 않는다면 어렵게 단체를 이룬다고 하더라도 지속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장기적인 안목에서 접근할 생각입니다.

 

이영경 : 현재 독립 문예 잡지가 많이 등장하고 있고, 구독자를 직접 모집하는 작가, 작가들이 만든 새로운 유료 플랫폼 등 기존의 문학제도를 벗어나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런 새로운 흐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장은정 : 독립문예 잡지는 독자와 작가 사이의 만남을 다르게 촉발하며 문학이라는 장르를 재정의하고 다양하게 향유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2016년 초부터 시작된 펀딩 시스템을 통한 소위 제1세대 독립 문예잡지들은 휴간 혹은 폐간 상태입니다. 이는 2~3년 이상 지속하기 힘든 독립출판 생태계를 보여준다고 판단됩니다. 그들이 잡지의 발행을 중단하게 된 과정에 대해 경청하는 담론이 있어야 경험이 축적되어 같은 상황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일종의 각개전투로서 각자 고립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구독자를 직접 모집하는 작가들 역시 이제 글만 쓰는 것이 아니라, 기획하고 모집하고 발송하는 등 일종의 개인사업자로서 활동한다는 점에서 글쓰기 이외의 업무를 모두 감당해야 하는 피로감이 있으리라 추측됩니다. 저는 현재 2세대로 분류될 수 있을 《모티프》, 《토이박스》, 《be:lit》, 《Noizy》, 온라인 플랫폼 "s-r-s" 뿐 아니라 소곡출판사의 시씰팀, 유후팀의 활동, 얼마 전 오픈한 웹진 《던전》 등, 이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이들은 주로 20~30대 청년들이며 독립출판 생태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그에 대한 섬세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또한 비평계에서도 제도 내에서 승인된 작가들에 대한 작품론만을 반복하여 생산하기보다는 문학출판계의 구조 중 하나인 독립출판 생태계에 관심을 갖고 이들의 시도가 지속될 수 있는 비평 담론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영경 : 다양한 작가군의 발굴, 작가 권리 확장 등 기존 문단의 문제점을 벗어나고 새로운 대안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장은정 : 저는 2019년 10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였는가?〉포럼(↘링크) 에서 문학출판계에서 여러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그 문제 해결의 주체로서 주로 대형출판사들이 지목되었을 뿐, 공공기관의 역할에 대한 요구는 거의 무관심에 가까웠다는 현상에 주목하여 그 원인을 분석한 바 있습니다.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은 ‘등단제도’의 악용, 예술고에서의 ‘입시제도’, 예술대학에서의 사제관계, 사설 문학창작 수업 내에서의 위계관계에 이르기까지 문학계가 끝없는 경쟁시스템과 그로 비롯된 위계관계로 촘촘히 엮여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공공기관의 문학사업 기금은 이미 출판산업 내에 진입한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한 자원 배분의 역할에 그침으로써 출판 산업 생태계에서 하나의 부품으로 기능하고 있을 뿐이기에 누구도 문학계 문제해결의 주체로 상정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인복지재단, 서울문화재단 등 여러 공공기관이 문학출판계의 구조를 면밀히 살피고 문학이 한국사회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을 바탕으로, 장기적 안목으로 생태계 전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공적자금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영경 : ‘직업으로서 평론가’가 유지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셨나요?

 

장은정 : 현재로서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이영경 : 등단 11년, ‘젊은 평론가’ 시기 이후 평론가로서의 전망은 어떻게 찾고 계시는지요. 그리고 30년 후에 평론가들은 어떤 역할을 하리라 생각하시는지요.

 

장은정 : 비평 전문 잡지를 내세운 《크릿터》의 목차를 보면 ‘리뷰’ 지면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 목차는 ‘작가-비평가’ 시대의 ‘비평’이란 결국 ‘서평’ 기능을 수행하는 장르에 불과함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저는 비평이 서평 역할 이상의 일들을 할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평론가’ 시절의 저는 각각의 문학작품 속에 들어있는 가장 빛나는 것을 꺼내어 독자에게 보여주는 일을 잘해내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이제는 작품 한편을 하나의 톱니바퀴로 여기고 어떤 작품을 세상의 어디에 배치하여 어떻게 다르게 작품을 작동하게 할 것인지를 고민 중입니다. 그런 점에서 2019년 〈더 스크랩〉의 행보는 현재 제가 지향하는 비평적 행위에 가장 가깝습니다. 사진이라는 장르의 특수성을 활용하여 홍콩 시위에 독창적 방식으로 연대하는 일을 목격하면서, 비평적 중심점이 이제는 예술작품의 ‘내용’이 아니라 ‘위치’로 이동해야 하며, 향유자의 향유 방식을 어떻게 다르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비평적 개입이 2020년 현재 예술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비평가들의 고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30년 후의 평론가들은, 지금 비평가들이 무엇을 비평의 역할로 정립하느냐에 따라 딛고 서 있을 수 있는 영역이 달라질 것입니다.

 

(2020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