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 근처에서였다.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다가 우리는 싸웠다. 나는 절박했다. 그는 그 절박함에 목 졸리고 있었다. 내가 한 마디를 더 보탤수록 우리는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보태고 보탰다. 바닥을 보며 듣고 있던 그가 날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할 수만 있다면 가위로 내 입을 오려내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어쩐지 그 증오가 묘하게 평화로워보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몇 마디를 더 보탰다.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다가 뚜벅뚜벅 나를 지나쳤다.


혼자 남겨진 것 치고는 너무 환하고 밝았다. 나는 그의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를까 말까를 계속해서 고민했다. 비참함과 후련함이 뒤섞여서 망설이다보니 너무 멀어져버렸다. 비행기가 지나간 후 하늘에 구름들이 선을 그리듯이, 그가 지나간 긴 자국을 눈으로 오래 더듬었다.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조금 울었다. 한껏 몰입해서 슬퍼하고 싶었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내 울음이 스스로에게 어색해졌다. 

 

긴장이 풀리자 온 몸이 나른해졌다. 적당히 바람이 불어서 눈물이 금방 말랐다. 건성 피부여서 얼굴에 눈물이 흐른 자국이 당겼다. 가방에서 로션을 꺼내 발랐다. 여전히 저수지의 수면은 평온했다. 햇살을 반사하고 있어 반짝거렸고 예뻤다. 날씨는 따뜻했고 약간 졸렸다.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정말이지, 안전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의 따뜻한 온도와 나른한 기분, 그 평온하던 수면과 반짝임. 마침내 어긋나는 순간, 어긋남이 자명해지는 순간의 투명함. 활과 과녁 사이. 날카롭게 공중을 가르며 떠 있는, 포물선을 그리는 화살의 시간. 거절과 외면 후에 잽싸게 따라붙는 시간들이 절망과 괴로움이 아니라 평온함이라니. 이 역설 속에서 나는 어리둥절하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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