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질문함: 시 수업을 듣거나 해설집을 읽어보면 시를 느끼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요? 어떤 방법이 좋을까요? 시집을 펴면 마냥 어렵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듭니다. 문맥도 모르겠고 막 이상한 단어끼리 붙여놓은 것 같고... 예전에 시에 대한 글을 쓰셨던 게 기억나 질문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대답이 조금 길어질 것 같네요. 우선 시 읽기에 앞서서 ‘읽기’와 ‘이해’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매일 뭔가를 읽고 이해하고 그것을 행동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흔한 예시로 지하철 시간표를 들어볼게요. 오늘 지하철 막차 시간이 언제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지하철 시간표를 ‘읽으면’ 됩니다. 알아보고자 하는 요일과 목적지와 출발지 등 필요한 정보를 이 시간표에 대입해서 ‘읽어낸’ 후에 ‘이해’를 하면 되는 것이죠. 

우리는 흔히 ‘읽는다’라고 하면 책을 펼쳐 거기에 쓰여진 글자들을 읽는 것으로 좁게 이해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책 뿐 아니라 표지판, 노선도, 지도, 시계, 달력 모두 기호로 이뤄져 있고 우리는 매일매일 이 기호들을 ‘읽고’ ‘해석’하여 ‘이해’를 통해 일상을 만들어갑니다. 표지판이나 노선도를 이루는 기호들이 지시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광화문역은 광화문역일 뿐이고, 저녁 7시는 저녁 7시입니다. 이것을 만약 각자 다르게 해석하면 저녁 7시에 광화문역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할 수도 지킬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명확한 읽기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읽기가 존재합니다.

익명님이 친해지고 싶은 어떤 사람과 저녁 식사를 했다고 가정해보죠. 그 분에게 익명님과의 저녁식사가 기분 좋은 일이었는지 지루한 일이었는지 알아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표정이나 몸짓, 말투 같은 것을 보고 추측할 수도 있고, 직접 어제 저녁 식사가 어땠는지 물어보고 그 대답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만, 사실 그것은 ‘추측’과 ‘믿음’에 기반하는 해석일 뿐, 그 자체로 진실이라고 확정짓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모든 종류의 인간관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표지판이나 지도를 읽는 것과는 달리 굉장히 넓은 해석의 여지를 가지고 있는 셈이죠. 우리는 매일 일상에서 이러한 종류의 불확실성을 스스로 해석하고 추측하면서 살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종류의 불확실성은 조금 고통스러운 것이죠. 뭐가 뭔지 모르는 삶은 혼란스러우니까요. 이런 불확실성을 조금이라도 더 명료하게 만들어주는 종류의 대표적인 ‘읽기’가 뉴스와 신문입니다.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추려내고 언론은 ‘오늘 세상에선 이런 일이 있었다’고 사람들이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모든 종류의 학문도 우리의 ‘무지’를 조금이라도 유의미한 ‘앎’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좋은 시는 해석의 불확실성을 함부로 쉽게 ‘아는 것’으로 만드는 일을 위험하다고 여깁니다. 저는 오랫동안 시 읽기를 두고 “비밀을 즐기는 장르”라고 말해왔는데요. 해석의 여지가 너무나 다양해서 불확실한 것을, 오로지 단 하나의 정답으로 추출하여 이해하는 것은 사실 폭력이 되기 쉽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떤 사람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확정짓고 결론 내린 후 잊혀지는 일들이 아주 많죠. 좋은 시는 이런 종류의 모든 ‘앎의 폭력’에 저항합니다. 모르는 것을 함부로 간단히 손쉽게 해석하지 않기 위해, 그러나 모르는 것을 가장 섬세하게 귀 기울이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장르라고 말이죠. 

그러니 익명님께서 어떤 시집을 읽고 “문맥도 모르겠고 막 이상한 단어끼리 붙여놓은 것 같고…”라고 느끼셨다면, 사실 이것은 그 자체로 충분히 시를 이미 읽으신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한 편의 신문 칼럼을 읽는 것과 시 한편을 읽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입니다. 전자의 경우 하고자 하는 말을 아주 뚜렷하게 요약할 수 있겠지만, 후자의 경우는 그러한 종류의 요약에 최선을 다해 저항하는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전자처럼 쉽게 요약 가능한 시가 있다면, 그냥 짧은 산문이나 일기, 칼럼을 쓰면 될 것이지 시로 쓸 이유는 없겠지요. 오히려 우리는 너무 쉽게 읽히는 시들, 뚜렷하게 메시지로 환원되는 시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시를 읽는 법은 간단합니다. ‘비밀을 즐길 것’. 우리가 어떤 시를 보고 ‘어렵다’ 혹은 ‘난해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 안에서 뭔가 뚜렷하게 요약 가능한 메시지를 읽어내려고 하는데 그것이 잘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시는 그러한 손쉬운 이해에 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언젠가 저는 어떤 글에서 “시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거는 장르”라고 쓴 적도 있는데요. 지도와 표지판, 시계와 달력은 우리에게 결코 말을 걸지 않습니다. 역시 광화문역은 광화문역일 뿐이고, 저녁 7시는 저녁 7시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는 어떨까요.


남겨진 것 이후에 / 이제니


흰 집 건너 흰 집이 있어 살아가는 냄새를 희미하게 풍기고 있다. 거룩한 말은 이 종이에 어울리지 않아서 나 자신도 읽지 못하도록 흘려서 쓴다. 하늘은 어둡고. 바닥은 무겁고. 나는 다시는 오지 않는 사람을 가지게 되었고. 너는 말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읽히지 않는 문장이 되었다. 낮잠에서 깨어나 문득 울음을 터뜨리는 유년의 얼굴로. 마음과 물질 사이에서 서성이는 눈빛으로. 인간 저 너머의 음역으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돌보는 말과 돌아보는 말 사이에서
밀리는 마음과 밀어내는 마음 사이에서

사랑받은 적 없는 사람이 모르는 사이 하나하나 감정을 잃어버리듯이. 한밤의 고양이와 친해진 것은 어느 결에 사람을 저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사람이라는 말. 그저 사랑이라는 말.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울어라.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네 자신으로 존재하여라. 두드리면 비춰볼 수 있는 물처럼. 물은 단단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남겨진 것 이후를 비추고 있었다.

_이제니,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문학과지성사, 2019.


출간된 지 한달도 채 되지 않은 이제니 시인의 새 시집의 첫 시입니다. 이 시는 우리에게 어떤 요약 가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기보다는, 아주 섬세한 실감들을 감각적으로 매만질 수 있게 해줍니다. “흰 집 건너 흰 집”, 멀리서부터 은은하게 풀려나오는 듯한 “살아가는 냄새”, “다시는 오지 않는 사람”, “낮잠에서 깨어나 문득 울음을 터트리는” 시간, “서성이는 눈빛”, “사랑받은 적 없는 사람이 모르는 사이 하나하나 감정을” 잃어버리게 되는 일들…  또박또박 또렷하게 글자로 받아쓰는 것이 아니라 마치 종이 위에 물감을 흘린 것처럼 종이를 기울이는 방향으로 번져가는 물감의 형태처럼 그야말로 흘려쓴 문장들입니다. 

제목이 ‘남겨진 것 이후에’ 인데요. 무엇으로부터 남겨진 것일까요? 우린 이것을 각자 해석하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했다면 이별 이후 남겨진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거구요. 가까운 사람이 죽음을 맞이한 적이 있다면 죽음 이후 남겨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고, 시에 나오는 사람처럼 애초에 사랑 받은 적도 없고 사랑한 적도 없는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나하나 감정을 잃어”버린 이후 남겨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우리는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 시 제목을 통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은 모두 다를 거에요. 다만 평소에 생각해보기 힘들었던 어떤 감각과 생각들을 떠올리면서 그것에 집중해보면 됩니다. 그건 표지판이나 지도, 시계와 달력을 읽는 것과 다르게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 알지 못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 불안한 것,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어떤 환희나 기쁨,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먹먹해지는 슬픔 등 모든 것들을 다시 경험하게 해줍니다. 

저는 이제니 시 특유의 호흡을 무척 좋아합니다. 떠오르는 언어들을 어떤 형태로 정형화시켜서 길들이지 않고, 물 위에 떨어트린 물감이 퍼져나가는 모습처럼, 부드럽게 풀어져나갈 수 있도록 만드는 특유의 호흡을 가지고 있지요. 이제니의 시는 눈으로 읽는 것보다 소리 내어 읽을 때, 이 호흡이 가진 그 리듬감이 훨씬 더 풍부하게 경험됩니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소리내어 읽고 듣기에 적합한 시들이지요. 시는 우리를 조금 더 부드러운 사람으로 만들어줘요. 서로 적대적인 의견으로 격앙되어 있는 긴장으로 가득 찬 토론장에서, 말의 내용보다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 표정, 호흡, 그 공간의 분위기에 집중한다면 그 공간이 전혀 다르게 경험되는 것처럼요.

시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 모두를 조금 더 ‘경청하는’ 자세로 살아가게 하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경청은 우리 자신과 타인, 세상을 우리가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겸손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다시 한번, “시집을 펴면 마냥 어렵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듭니다. 문맥도 모르겠고 막 이상한 단어끼리 붙여놓은 것” 같다고 느끼신 것은 익명님이 시를 읽을 수 있는 완벽한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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