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자의 아래

장은정



얼마 전에야 우리는 알게 되었다. 사소한 어떤 순간에게서 포착되는 느낌이 얼마나 시적일 수 있는지. 가령 높은 선반 위로 손을 뻗느라 발꿈치를 약간 들어 올리는 것은 모두가 경험해 본 적 있는 사소한 순간이다. 하지만 바닥으로부터 발꿈치 사이, 몇 센티미터의 높이로 팽팽해지는 그런 사이 공간에게서 시적인 유일함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것은 온전히, 김행숙의 시를 통해서였다. 

 

이 시적 효과를 낯설게 누리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시의 영역이 확대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 어떤 이념이나 관념으로도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이 시적 순간에 대한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새로운 시를 읽음으로써 새로운 감각을 우리가 얻을 수 있었다면, 그 감각에 대해 열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물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행숙의 세 번째 시집, 『타인의 의미』는 그 제목부터 이 질문에 대한 암시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관념으로도 남김없이 설명될 수 없는 시적 효과를 통해 낯선 시를 구축했던 김행숙이 ‘의미’라는 단어를 새 시집의 얼굴에 전면적으로 배치한 것은 주목되어야 한다. 「머리카락이란 무엇인가」는 이러한 변화를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시편이다. 총 3연으로 구성된 이 시에서 첫 번째 연은 “머리카락이 자라는 순간”을 제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눈이 가장 밝은 사람도” 본 적 없는 이 순간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가 김행숙의 이전 시들을 통해 경험해 본적 있는 낯선 시적 순간이다. 

 

그런데 이 시는 그 순간을 이전처럼 문득 비어버리는 공간으로 만들지 않는다. “눈이 어두운 우리에게 머리카락은 한 달 후에 자라는 것”임을 지적하면서, 머리카락이 다 자란 후에야 자라는 순간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그래서 두 번째 연은 “나는 머리카락에 대하여 의문을 품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세 번째 연은 “왜 머리카락은 끝없이 자라는가.”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즉 이 시편에서 중요한 것은 낯선 시적 순간의 포착이 아니라, 이 낯설게 비어버리는 순간의 비밀에 스며있는 의혹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머리의 반쪽은 비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 머리카락은 시간처럼 시간처럼 끝없이 자라는가. 왜 머리카락은 정치적인가. 마침내 누가 머리카락을 해석하는가”.

 

이 낯선 순간들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는 것. 그것은 이 낯선 순간에게 현실과의 관계를 묻는 작업이기도 하다. 비교해보자. 『이별의 능력』은 “마치 파혼선언처럼 플래시가 터질 거야/새가 날아가는 풍경화처럼/허공에서 정지한//사진을 둘러보며/분리감을 느끼는거야”(「놀이의 발견」)와 같이 ‘정지’와 ‘분리’를 통해 낯선 시적 자유를 찾아냈다. 그러나 “펜이 바닥에 떨어졌어요. 별 뜻도 없이 딴 뜻도 없이 굴러가는 저것을 어떡해.” 라는 외침에 대해 『타인의 의미』의 의미심장한 대답. “주우세요! 애타게 찾으세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탁자 밑으로 들어가는 일은 간첩의 신분처럼 위험한 것입니다. 엿듣고 싶으세요. 탁자 밑에서 영원히 나오지 마세요. 입도 뻥긋하지 마세요. 침도 삼키지 마세요.”(「탁자의 유령들」).

 

만약 이전의 시들이라면, 별 뜻 없이 굴러가는 펜이 주는 시적인 느낌을 매혹적으로 써냈을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시는 충분히 아름다웠을 것이다. 하지만 김행숙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탁자 밑으로 들어가서 애타게 찾고 영원히 나오지 말라고 단호하게 명령하는 것이다. 낯선 시적 순간을 찾아내고 그 순간에 대한 해석들과 의미들을 애타게 찾으라는 것. “우리에겐 동의해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부정해야 할 것이 똑같이 높은 산”이다. “밤을 새워도 끝나지 않고 밤을 새우지 않아도 끝나지 않”겠지만 이 결론이 나지 않을 행위를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어떤 결론도 나지 않을 것이기에 낯선 시적 순간을 그 자체로 보호할 수 있으면서도 이 시적 순간을 현실로부터 고립시키지 않을 수 있다.

 

비밀로 가득 차 있는 시적 순간이 스스로 해석과 의미의 영역으로 자발적으로 들어선다는 것, 물론 그것은 비평이 시를 마주하고 시도하는 해석의 작업과는 다른 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터. 이번 시집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잠과 꿈에 대한 숱한 진술들과 질문들은 바로 이런 시적인 의미화 작업으로 간주될 수 있다. 어째서 잠과 꿈인가? 잠들어 있는 시간은 우리가 의식의 연속성으로부터 잠시 벗어나는 시간으로 우리가 시적인 것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잠」이라는 제목의 시가 직접적으로 묘사하듯이 “어디에도 닿지 않은 채//그곳에 속하는” 시간인 것이다.

 

자기 완결성을 지니고 있는 이 시간은 현실에선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들이 달콤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일 수도 있고 비명소리와 식은땀으로 가득한 악몽의 공간일 수도 있다. 이 시공간성은 꿈을 통해 획득된다. 그러니 꿈은 잠의 현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잠과 꿈을 시적차원에서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꿈(잠)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사유이기도 하고 시적 순간에 대한 시적 사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시적 순간은 그 자체로 시적 사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 시집에서는 그것을 구분함으로써 해석과 의미의 영역으로 걸어들어 간다.

 


물에 빠진 사람
드디어 총체적이 된다
나는 꿈속에서 열 번 경험했다
내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딱 한번 
나는 행복하였다
떠오르지 않는 꿈처럼
순종적이었다
나머지는 몽땅 악몽이었다
현실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어렸을 때
바닷가에서 보았던 익사체가 기억난다
갑자기!

그녀에게 닥친 현실을 깨닫자 뒷걸음질치는 저 여인
얼마나 멀어졌을까
어디서 무섭게 구역질을 하고 있을까
이제 보이지도 않는데
왜 그녀는 내게 이토록 친밀한가
우리 마을 사람도 아닌데
처음 본 얼굴인데

그것은 나의 현실도 아니었는데
왜 완벽한가
어떤 꿈들은
어떻게 내 것이 돼 버렸는가


―「누군가의 호흡」전문

 


이 시에서 가장 강조되어야 할 것은 리듬감이다. 이것은 글자의 소리가 반복되면서 생겨나지 않고 내용적인 것에서 생겨난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누군가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가 물 위로 떠오르기를 반복하고 있다. 물과 공기라는 두 세계를 교차로 드나들며 호흡은 멈출 듯 간신히 터지고 삼킬 듯 들이마신다. 이 리드미컬한 이미지는 그 자체로 시의 구조를 형성하면서 반복된다. 행복하였다가 몽땅 악몽이 되었다가, 시체에게 마구 키스를 퍼붓다가 무섭게 구역질을 하였다가, 보이지도 않는 그녀가  친밀하게 느껴지고, 나의 현실도 아닌데 이토록 완벽한, 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리듬감. 전혀 이질적인 두 세계를 절박하게 드나드는 어떤 순간들의 느낌은 김행숙의 시에서만 읽을 수 있는 시적인 순간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시에 대해 이렇게 매듭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시에는 풍부한 상징적 암시들이 출렁거리고 있다. 이 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두 가지의 단어, 현실과 꿈은 어떤 관계일까? 그것은 물과 공기처럼 선명하게 나뉘지 않는다. 2연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공기의 세계는 숨을 쉴 수 있는 달콤한 꿈이라는 현실이고 물의 세계는 숨을 쉴 수 없는 악몽의 현실이다. 그러니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누군가는 물과 공기 사이를 오가고 있을 뿐 아니라,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달콤함과 끔찍함 사이를 오가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의 차원에서는 물과 공기는 분리되어 있는데, 관념적인 시어들인 꿈과 현실은 물과 공기라는 이미지에 각각 대응되지 않는다. 이미지는 분리시키고 관념어들은 통합시킨다. 이 기묘한 균열 속에서 흘러나오는 이상한 절망감에 어리둥절해질 때, 물에 빠진 누군가의 숨이 끝내 끊어지고 만 것과 같은 마지막 연. “그것은 나의 현실도 아니었는데/왜 완벽한가/어떤 꿈들은/어떻게 내 것이 돼 버렸는가”. 

 

그 어떤 감각어도 동반하지 않은 관념적 진술들이 날카롭게 구분되어 있는 흑색과 백색처럼 선명한 시적 감정을 동반하는 것은 놀랍다. 구분되어 있으나 분리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으나 구별해야 하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이 시는 진동한다. 이렇게 시적 순간과 시적 사유가 균열되면서 “드디어 총체적이 된다”. 그러니 『타인의 의미』에서 ‘의미’란 결코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이 빈자리를 삭제해선 안 될 것이다. “우리들이 똑같은 모양으로 입술을 벌릴 때/입안에 담은 것과/입술 바깥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모순을 일으킬 때/어느 쪽에도 진실의 발톱은 달려 있”기(「합창단」) 때문이다. 어둠을 가리고 있는 식탁보를 걷고 식탁 밑으로 기어 들어가자. 별 뜻도 딴 뜻도 없이 굴러가는 펜이 앞으로 쓸 글자들을 찾으러. 그 글자들이 존재한 적도, 존재할 리도 없다고 하더라도.

 

_《창비문학블로그》 2010년 11월 발표.

 

 

 

 

 

그늘진 소리들의 세계

장은정

 


시적 언어는 일종의 주문과도 같아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불러들이고 사로잡아서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물리적인 세계에서 시는 종이에 인쇄된 글자들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가 시를 이루는 단어와 문장들을 구체적으로 믿기 시작할 때 이 연약한 글자들은 행과 연을 따라 난 길을 통과하면서 실제보다 더욱 풍부하고 구체적인 상상적 세계를 불러들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시라는 장르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 중 하나라고 생각해 왔다. 한데 시적 언어의 이러한 상상적 가능성에서 시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보다는 시적 언어의 한계까지 스스로를 밀어내면서 경계의 떨림으로 시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시가 있다. 이제니의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에서는 상상적 가능성이 지닌 자유가 도리어 고립으로 간주되고 비극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감지되고 있는 듯하다. 


시집을 여는 첫 시이자 시인의 등단작인 「페루」가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을 살펴보자.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시는 우선 여러 색들을 나열하고 색들의 주체에 대해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는 문장은 모두가 양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양을 가지고 있다는 또 다른 암시를 숨겨두는 방식으로 양의 존재를 감춤으로써 드러낸다. 양은 ‘없을’ 때에만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 시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스스로에게서 한 발자국씩 물러나 있다. 가령,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와 같은 구절은 우리가 이 이미지들의 세계에 몰입하며 완전히 들어서려는 순간, 우리의 발목을 단단히 움켜쥐면서 이 이미지들이 그저 상상으로 지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그러니 연이어 들려오는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는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하는 화자의 상상 속에서 들리는 것이다. 이렇게 이 시는 양갈래의 머리칼들을 교차로 땋아 가는 것처럼 이미지와 이미지의 기원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 자체로 자기 완결성을 지닌 상상력의 세계를 완성할 수도, 상상하는 행위를 중단할 수도 없는 이 틈새 사이에서 진동하는 일이 “반복되는 실패”로, “저주”로 여겨지는 것은. 그러므로 이 시는 “간신히 생각하고 간신히 말한다.”라고 ‘간신히’ 쓴다. “적어도 꽃은 아름답다.”고 쓰는 것으로 멈추지 못하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덧붙이고 마는 것이다. 

 

어째서일까. 무엇이 이 시들을 자꾸만 자기 자신으로부터 물러서게 만드는 것일까. 이 시집에 수록된 많은 시들은 시의 언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요롱이는 말한다」는 바로 그러한 불가능한 영역들을 고스란히 반영함으로써 시적인 효과를 내는 시들 중 하나이다. 제목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듯 이 시의 중심화자는 “요롱이”이다. 한데 이 요롱이가 바라는 것이 의아하다. “나는 정말 요롱이가 되고 싶어요.” 이 바람은 요롱이가 자신이 요롱이로서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이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요롱이’는 오로지 ‘언어로서만’ 존재하고 있으며, 당연하게도 이 언어는 요롱이의 개별적인 존재론적 속성이 남김없이 제거된 벌거벗은 언어다. 그러니 요롱이는 반드시 요롱이일 필요가 없다. 

 

하나의 단어는 다른 단어로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다. “단 한번도 내리지 않은 비처럼 비가 내린다. 눈이 내린다고 써도 무방하다.” 비가 눈으로 바뀐다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 그에 대응하는 변화 또한 발생하진 않는 것이다. 이처럼 벌거벗은 언어에 대한 인식은 많은 시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풍선 풍선 풍선은 이름이 바뀌었는데도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 서운했다.”(「분홍 설탕 코끼리」). “나는 나 자신과도 공통점을 갖지 못한다.” (「편지광 유우」). “어쩌다 우리는 소멸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지상에 집을 짓지 못하고 허공에 매달린 채로 이곳과 저곳 사이에서만 몸을 누이는. 블랭크 블랭크.” (「블랭크 하치」). 이 구절들은 표면적으로 ‘나’라는 자아에 대한 정체성과 관련된 문장들 같지만 그보다는 본질적으로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언어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아프리카』는 오로지 언어로서만 존재하는 슬픔으로, 그럼에도 언어를 벗어던질 수 없는 슬픔으로 글썽거린다. 이 슬픔은 이 시집의 도처에서 발견되는데, 놀라운 것은 이 슬픔이 바로 이제니 시의 언어가 가진 가능성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앞서 언급했던 「요롱이는 말한다」는 굳이 소리 내어 읽지 않고 눈으로만 따라 읽어도 어떤 리듬감을 감지할 수 있다. ‘요롱’이라는 글자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롱이에게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이 벌거벗은 언어를 반복하는 것뿐이다. 그것이 리듬을 만들어낸다.

 

다음의 문장들을 따라 읽어보자. “요롱이는 말한다. 나는 정말 요롱이가 되고 싶어요. 요롱요롱한 어투로 요롱요롱하게.”, “그건 단지 요롱요롱한 세상의 요롱요롱한 틈새를 발견한 요롱요롱한 손가락의 요롱요롱한 피로.”, “가슴속 모음이 가슴에서 눈으로, 눈에서 입으로, 입에서 울음으로 옮겨가는 일을 보는 일은 요롱요롱하다.” 몇 문장만을 옮겨 적었을 뿐인데도 우리는 금방 요롱요롱해진다. 요롱이라는 고유명사가 형용사와 부사로 번져나가면서, ‘요롱이’라는 이름이 종국에는 ‘소리’가 되고 소리는 ‘리듬’이 되는 것이다. 리듬이 환기시키는 요롱요롱한 기분이 무엇인지 콕 짚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귀여운 어감에도 불구하고 그렁그렁한 눈물방울을 연상시키는 리듬이다. 표제시 「아마도 아프리카」는 이 발랄하고도 슬픈 리듬이 가장 시적인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는 시편이다. 

 


코끼리 사자 기린 얼룩말 호랑이
멀리 있는 것들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부를 때
나는 슬픈가 나는 위안이 필요한가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아주 조금
 
호랑이, 그것은 나만의 것
따뜻하고 보드랍고 발톱이 없는 것

살고 있나요 묻는다면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나는 아주 조금 살고 있어요


―「아마도 아프리카」부분

 


물론 시 속에서의 아프리카가 ‘실제’ 아프리카를 지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곳에 살고 있는 “호랑이”는 “따뜻하고 보드랍고 발톱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호명되는 “코끼리 사자 기린 얼룩말 호랑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따뜻한 위로들, 오직 우리를 위한 것이다. 오로지 언어로서만 존재하는 상상적 기표들을 조용히 마음속으로 불러내다가 화자는 금방 알아차린다. “나는 슬픈가 나는 위안이 필요한가”. 조심스레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이어지는 사려 깊은 리듬이 물결처럼 번져나간다.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아주 조금”. 모음 ‘ㅏ’의 소리들이 조용하게 반복되면서 슬픔을, 위안을, 아마도 아주 조금, 아름답게 만든다. 이 시에서 시적 언어들은 ‘의미’보다는 ‘소리’로 존재하면서 세계로부터의 분리가 가져다준 슬픔을 그 자체로 시적인 것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시적 언어의 상상적 가능성에게서 시적 효과를 발견하는 시들은 궁극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것들을 실재하는 것보다 우위에 놓음으로써 시적인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하였다. 하지만 역으로 시적 언어의 한계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하는 이제니의 『아마도 아프리카』는 스스로의 언어를 기어이 실재하는 것 아래에 놓음으로써, 뛰어난 구체성을 획득한 상상적 세계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시적 언어의 슬픔과 외로움을 있는 그대로 감당하고자 한다. 그러니 이 소리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섣불리 환호해서는 안 된다. 이는 세계에 직접적으로 가닿지 못하고 마는 실패의 소리, 고아의 울음소리, 축축하게 그늘진 소리들이기 때문이다. 이 시들에게 소리의 아름다움이란 쉽게 환호하기엔 너무 절박한 존재방식이고 시적 언어가 세계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윤리적 자세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늘의 바깥에서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보다는,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아주 조금, 함께 우는 것. 그것이 이 그늘진 소리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_《창비문학블로그》 2010년 10월호 발표.

 

 

 

자세한 경청

 

장은정

 

 

어떤 시들에게 ‘쓴다’는 것이란 말하는 행위가 아니라 철저히 ‘듣는’ 행위일 수 있음을, 이기인의 두 번째 시집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를 읽으며 알게 되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 흔들리는 눈빛 하나 놓치지 않는 이 섬세한 청각들은 오로지 ‘당신’을 향해 열려 있으니, “혼자서, 납작하게 살아온 당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줄까요”(「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내내 궁리하는 이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함께 ‘당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행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데 이 ‘당신’들은 누구인가? 과일장수, 청소부, 철거민, 외국인 노동자…… 이들을 망설임 없이 사회적 약자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의 통증과 신음소리는 언제나 사회적으로 ‘묵음화’되기에 그들은 과연 “납작하게” 살아온 자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기인의 시들은 “젖은 시집 속으로 부끄러운 몸으로 들어”온 그들을 ‘사회적 약자들’이라고 쿵쿵 소리 나게 못질하며 명명하지 않는다. 소리 없이 “납작하게 살아온” 그들의 진짜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더 작은 발걸음으로, 더 낮게 귀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시집의 조용한 발화들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 한 편의 시가 있다. 

 


먼지를 닦는 청소부의 중얼거림은 두 짝
앞으로 걸어간 걸음은 책상 위에 펼쳐진 의료용 기구를 정리하며 말없이 아프다
뒤쪽으로 돌아간 걸음은 환자들이 떨어뜨린 먼지를 조용히 줍는다
조용히 닳아 없어진 삶의 유혹 때문에 청소부는 매월 삼십 만원을 받으며
책상 위에서 시들어가는 장미의 불안을 본다
매일매일 닦아주는 실내에서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실내화의 슬픔에 발목을 넣는다
청소부는 청진기가 놓인 책상 아래 원장님의 실내화가 정박해 있는 곳으로 떠내려간다
먼지는 그곳으로 와서 매일매일 살림을 차린다
청소부는 나란히 앉아 있는 실내화의 정적이 느릿느릿 다가오는 것이 느릇느릿 무섭다
몸을 숙여서 끌고 가는 실내화의 아픈 발끝으로 그의 새벽 미열이 내려와서 뜨겁다


―「실내화」전문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시가 청소부에 대한 시가 아니라는 점이다. 제목이 잘 일러주고 있듯이 시는 청소부의 실내화에 그 중심을 맞추고 있는데, 특히 실내화의 동선을 그대로 포착하려는 것에 모든 긴장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래서 시의 시점은 언제나 걸음의 위치인 ‘아래’다. 가령 첫 행에서 우리는 “중얼거림”이라는 입술의 위치를 먼저 떠올리지만, 곧이어 그 이미지는 “두 짝”이라는 걸음의 위치로 급하게 하강한다. 그 후부터 시를 주도하는 주어는 “걸음”이기에 “책상 위에 펼쳐진 의료용 기구”에 대해 언급할 때에도 우리는 시의 시점을 따라 책상을 ‘올려다’ 보게 된다. 이 시점은 청소부의 삶이 몸의 위치와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매월 삼십 만원”을 받기 위해 “실내에서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실내화”를 신고 청소부가 가야하는 곳은 바로, “먼지”들이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청소부는 매번 “원장님의 실내화”가 놓여있는 “책상 아래”로 “떠내려”가고, 환자들이 떨어뜨린 “먼지를 조용히 줍”느라 허리를 숙인다. 이 구체적인 시점이 해내는 역할은 사소해보이지만 대단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점을 따라갈 때 우리는 시를 읽으며 ‘청소부’를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청소부가 ‘바라보는 것’을 함께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청소부를 슬픔과 같은 ‘상징’으로 동일시하지 않도록 막아준다. 우리는 시를 따라 스스로 낮게 이동함으로써 “청진기가 놓인 책상”과는 달리 느리고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에도 동참하게 되고, 장미의 아름다움보다는 “시들어가는 장미의 불안”을 느낄 수 있게 되며, 결국은 “실내화의 정적이 느릿느릿 다가오는 것”에 스며있는 두려움까지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시는 이기인의 묘사가 ‘바라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따라 움직이는 것’에 핵심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중얼거림”이라는 목소리가 아니라 바로 “실내화”의 움직임에서 청소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들을 수 있다고 보는 것과 같이 이기인의 많은 시들은 대상 자체보다는 대상과 가장 밀접한 사물에 더 큰 초점을 맞춤으로서 그들을 시적으로 형상화시킨다. 가령 공사장 인부에 대해 쓰기보다는 “공사장 흙먼지 아래로 떨어지는 저 검은 발자국 한 켤레,”에 집중한다거나 철거민들 그 자체보다는 “송곳으로 뚫어서 묶어놓은 명단의 이름”을 바라본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쓰기 보다는 “그 까만 몸이” 손바닥에 낀 “초록색 때수건”에 대해 발화하는 것이다. 역시, 그렇지 않은가. “납작하게 살아온 당신”에 대해 듣기 위해서는 당신을 납작하게 누르고 있는 것부터 써야하는 것이다. 당신을 누르는 힘들은 당신이 사물들의 목적 연관 체계 속에서만 움직이기를 강요하고, 모든 욕망과 발언과 통증들을 억누르면서 스스로를 사물화 시키길 강요한다.  

 

이 시집을 이루는 많은 시편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바로 “싶다”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빈집 앞 아침부터 계속 한자리에 앉아 있던 노인은 의자를 들고 담벼락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공가(空家)」중), “물살 아래로 아래로 퐁당 떨어지고 싶다”(「돌다리」중), “무릎이 다 닳은 빗자루는 그의 육친처럼 벽에 기대고 싶었다/벽에 기대어 마당 쪽으로 툭 쓰러지고 싶었다”(「빗자루 이력서」중), “토란잎 줄기는 휘어져서 땅으로 내려와 쉬고 싶어 죽겠다”(「줄기가 자라는 시간」중) 등등. 이 많은 ‘―싶은’ 마음들은 대부분 ‘휴식’과 연관되어 있고, 그 휴식은 대체로 ‘차라리’ 죽음을 원하는 것에 가까울 만큼 지쳐있다. 

 

한데 이 구절들은 대체로 하나의 시편 안에서 강하게 힘이 실리도록 배치된 것이 아니라, 무심히 놓여있어서 조금만 집중력을 놓치면 스쳐 지나가기 일쑤다. 그것은 이 ‘―싶은’ 마음들이 희미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런 마음마저 억누르는 그 힘이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기인의 시들은 당신을 자꾸만 움켜쥐는 사물들을 쓰면서, 그 사물들의 배후에 억눌린 당신을 듣는다. 이 새로운 시점은 대상을 다르게 보기위해, 새롭게 보기 위해 시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느끼는 그대로 더 자세히 듣기 위해 이동하는 것이 저절로 새로운 시점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한데 놀라운 것은 이 시집 중 가장 아름다운 시들 중 한 편은 상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자신의 몸을 먼저 낮추려는 마음 자체로 이루어진 시라는 점이다. 다음의 시를 전문으로 인용하며 리뷰를 마무리한다.

 

균형을 잃어버린 내가 당신의 어깨를 본다
내일은 소리없이 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나는 초조를 잃어버리고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더 좋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
첫눈이 쌓여서 가는 길이 환하고 넓어질 것 같다
소처럼 미안하게 걸어다니는 일이 이어지지만 끝까지 정든 집으로 몸을 끌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닮아가는 구두짝을 우스꽝스럽게 벗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밤늦게 지붕을 걸어다니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가만히 껴안아줄 수 있을 것 같다
벽에 걸어놓은 옷에서 흘러내리는 주름 같은 말을 알아듣고
벗어놓은 양말에 뭉쳐진 검은 언어를 잘 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매트리스에서 튀어나오지 않은 삐걱삐걱 고백을 오늘밤에는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요구하지 않았지만 당신의 어깨는 초라한 편지를 쓰는 불빛을 걱정하다가
아득한 절벽에 놓인 방의 열쇠를 나에게 주었다
자기중심을 잃어버린 별들이 옥상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본다
뒤척이는 불빛이 나비처럼 긴 밤을 간다


―「어깨 위로 떨어지는 사소한 편지」 전문

슬픔의 질서
 
장은정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 ‘나’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어 합니다. 내가 나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만큼 스스로에게 갇혀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 있을까요. 이영주의 두 번째 시집 『언니에게』를 읽으며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나 자신이 아닐 수 없는 순간들 속에서만 살아가야하는 인간이 감당해야하는 슬픔들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시집은 어느 페이지를 아무렇게나 펼쳐도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간신히 존재하는 것들, 살아간다기보다는 살아남은 것에 가까운 이미지들이 바로 그것인데요.

 

“새의 하나만 남은 발”(「력(曆)의 기원」)이라거나 “숲이 낳은 뭉툭한 아기들의 손발”(「자살법」), “고양이가 먹다 남긴 쥐의 얼굴”(「동거녀」), “단도로 반을 가른 개구리”(「활자들이 길게 타오르며 태양으로 올라간다」) “붕대를 감아도 통증을 감출 수 없는 나무들”(「소녀는 던진다」)에 이르기까지 시집 속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생명력으로 활기차기보다는 온통 절룩거리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미지들이 유독 기묘한 것은 그것이 강렬한 핏빛을 띄면서 역동적으로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노톤의 색감으로 매우 건조하게 죽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날선 비명도 고통스런 몸부림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들은 그러한 담담함이 읽는 사람을 더욱 몰입하게 만듭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뒤를 돌아보지 마. 구멍이 좁다는 걸 알면서도 내내 돌아보던 너의 흰 목에서 피가 흐른다. 노인은 신에게 경배를 드릴 때마다 조금씩 무릎이 부서진다. 너무 쉽게 죽은 사람의 이름을 말하면 안 돼. 한쪽 유방이 도려내진 브래지어를 보고 한 노인이 뒤를 돌아본다. 이것은 전염병일까? 목발을 짚은 사내는 꺼지지 않는 불꽃을 뒷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는다. 신은 뒤를 돌아보는 불경한 것들의 심장을 움켜쥔다. 아름다워지기 전에 뒤를 돌아보면 안 돼. 오르페우스는 어린 딸과 침대가 없는 외계(外界)로 가기 위해 천상의 노래를 부른다. 목소리를 잃고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본다. 제 다리를 뜯어 먹는 늙은 개. 


―「뒤」 전문



‘뒤’에는 “아름답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한쪽 유방이 도려내진 브래지어”나 “제 다리를 뜯어 먹는 늙은 개” 같은 것들 말이에요. 이들이 경고합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들키고 싶지 않으니, 뒤를 돌아보아선 안 된다구요. 이 경고에는 수치가 뒤섞인 간절함이 묻어 있습니다. 그것이 이 시의 도입부를 하데스의 금기가 아니라 절실한 부탁으로 들리도록 만듭니다. 한데 부탁을 받은 자 역시 “목발을 짚은 사내”처럼 마찬가지로 “아름답지 않은” 자입니다. 그는 결심합니다. “아름다워지기 전에 뒤를 돌아보면 안 돼.” 하지만 그는 “흰 목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아름답지 않은 것”들을 “내내” 돌아봅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들이 “전염병”처럼 시 속을 번져가는 것이지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아름답지 않은” 자들은 누군가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시인은 죽음을 풍기는 이러한 ‘아름답지 않은’ 불완전함을 외부의 강제적인 힘에 의한 훼손이 아니라, 본연적으로 이미 주어져 있는 필연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구나 기형은 정상으로부터 벗어난 우연적인 비정상이 아니라, 애초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내포되어 있는 필수적인 존재론적 속성인 것이지요. 어쩌면 ‘정상’이라는 것은 현상계에서는 불가능한 초월적 관념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는 불경한 것들의 심장을 움켜”쥘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신’ 뿐인 것이지요. 그러니 이 시는 아름답지 않은 것들에게 바치는 시, 아름답지 않은 자들이 아름답지 않은 자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내내 바라보게 되는 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시가 가장 슬픈 지점은 불완전한 아름다움을 “내내” 돌아보면서도, 궁극적으로 걸음의 방향은 바꿀 수 없다는 것.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간주되는 ‘앞’이라는 방향 자체는 바꿀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뒤에 남겨진 자든, 내내 돌아보는 자든, 모두가 ‘앞’을 향해 있다는 것이 이 시가 불러일으키는 슬픔의 본질입니다. 만약 ‘앞’이 없다면 ‘뒤’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불구의 이미지들에게 있어서 불완전함이 만들어 낸 빈자리는 바로 이 완전한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으로 출렁이고 있습니다. 그 열망이 수치를 만들어내고,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만들어냅니다.

 

놀라운 것은 이 불우한 존재론이 아주 오래된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이 존재론을 단순히 개별적 감정의 차원으로, 근대를 맞이한 현대인들의 어느 특정 시대의 산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린 저무는 사람들”, “태어나면서부터 우린 비린내를 풍기는 물건들.”(「저무는 사람」)과 같은 구절들이 잘 보여주듯이 생명의 불완전함이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새겨져있는 보편적인 구조입니다. 그러니 그 슬픔과 수치의 이력 또한 매우 오래 되었음을 예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장마」는 현재의 슬픔과 몇 세기 전의 슬픔의 밀접함을 ‘장마’를 통해 응축하여 보여주는 탁월한 시편입니다. 화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욱신거리는 등”에서 “몇 세기 전의 울음”을 감지해 냅니다. 이 시가 어느 극점이 다다르는 것은 다음의 구절인데요. “위로받지 못하는 건 점점 휘어가는 내 등만이 아니다. 어떤 종족은 사라지고 싶어서 비명을 안으로 삼킨다.” 내부로 날카롭게 향해있는 혐오가 개인적인 슬픔이 아니라 종족의 보편적 슬픔과 결합하고 있습니다. 어떤 슬픔이 이토록 깊기에 개인적 감정에 그치지 않고 후대에까지 이어지는 것일까요.

 

「해바라기」에서도 비슷한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부활하지 않으려고 귀에 독을 넣어주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완전함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요. “나를 만진다/모든 혐오감은 접촉에 대한 것”(「월식」)이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가늘게 어깨를 떨고 있습니다. 이 불우한 존재론의 슬픔이 점차 확대되어 우주적 질서로, 형이상학적 원리에까지 가닿는 것은 이 시집의 중요한 성취 중 하나입니다. 시집에 수록된 시들 중에 「미래안(未來眼)」은 감히 제가 판단하기에 이영주 시인만이 쓸 수 있는 아름다움에 닿아있다고 생각합니다.

 


크레타 섬에는 대리석과 염소와 죽은 왕들. 푸른 이마를 문지르며 노인이 옆 노인을 끌어안는 장면. 에게 해 절벽에서 우주 원자론이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 밤이면 얼굴을 깎아 비석을 세우는 여러 개의 니코스 카잔차키스 술집. 잘린 토끼 머리가 정육점 유리창에 매달려 귀를 길게 세운다. 죽는다는 건 홀로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는 것. 노인이 옆 노인의 목을 끌어안고 염소처럼 운다. 따뜻한 언덕에서 지친 노년이 다른 노년을 배웅하는 것. 저녁이면 흔들리는 에게 해 물빛. 수학 시간 옆자리에서 동맥 끊기 놀이를 하던 내 첫사랑 소녀의 까맣고 푸른 동공 같은. 절벽에는 죽은 왕들의 비밀 문자. 어린 왕은 진공 없이 텅 빈 바다를 봤다고 썼지만 홀로 남은 시간에는 우주에 꽉 찬 숫자를 보고 운다. 크레타 섬 정육점 유리창에 붙어 토끼 이마에 툭 불거진 뼈 하나를 보는 저녁. 노인이 천천히 쓰러지는 옆 노인처럼 푸르고 푸르게 물이 드는.


― 「미래안(未來眼)」

 


이국적인 소재들도 매혹적이고, 조용히 걷다가 문득 멈추는 듯한 문장의 종결방식도 매혹적이지만, 이 시가 가장 매혹적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죽음을 앞둔 노인들에 관한 시라는 점입니다. 시는 “죽는다는 건 홀로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홀로 있는 자신을 곧 마주해야하는 노인들이 “목을 끌어안고 염소처럼” 함께 울고 있습니다. “따뜻한 언덕에서 지친 노인이 다른 노년을 배웅하는 것.”이지요. 노년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듯한 ‘지친’이라는 수식어가 마음을 칩니다. 노인의 울음은 가장 외면하고 싶은 추한 인간적 진실들까지도 긍정하고 마주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존재의 불완전함은 노인의 울음에 이르러 가장 완성된 형태에 도달합니다. 

 

“어린 왕은 진공 없이 텅 빈 바다를 봤다고 썼지만 홀로 남은 시간에는 우주에 꽉 찬 숫자를 보고 운다.”라는 구절은 노인의 울음이 두려움으로 번들거리는 아이의 울음으로 되돌아가면서 총체적인 형이상학적 질서를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때 노인이 천천히 쓰러집니다. 옆 노인은 푸르고 푸르게 물이 들구요. 이 번져가는 푸른빛에는 불완전함에 대한 어떤 혐오의 흔적도 없지만, 불완전함이 그 자체로 진정한 완전함임을 깨달았다는 식의 어떤 이념적 진실에 치우치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에게 해의 흔들리는 저녁 물빛처럼 한 노인의 울음이 다른 노인에게 옮겨가는 것 뿐 입니다.

 

저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나 자신이 아닐 수 없는 순간들 속에서만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슬픔들을 시집을 읽으며 느꼈다고 썼습니다. 어쩌면 그 슬픔들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진부하지만 거대한 결론을 맺어야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사라진 그런 투명한 슬픔들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아직 저 노인들처럼 지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다만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투명한 슬픔은 스스로에게만 차오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푸르게 물들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구요. 

 

 

 

이렇게 확장되는 자유

장은정

그녀가 돌아왔다.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라는 제목으로. 그런데 말이다. 두번째 시집의 제목에서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니? 이는 첫 시집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무엇인가가 처음, 생겨났음을 암시하고 있다. 2005년의 첫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는 금방이라도 시집 밖으로 흘러넘칠  듯 기괴한 이미지들로 출렁이고 있었다. 비아냥거림이 섞인 비어와 욕설, 구어, 말놀이들은 외부의 폭력과 억압들을 조롱하거나 자기혐오의 형태로 절제 없이 들끓었다. 이는 ‘예술가의 자의식’이라는 의식적 ‘절제’마저 거부하는 것으로 읽혔기에 급진적인 동시에 위태롭게 보이는 지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첫 시집과 다르게 이번 시집에서 “처음” 생겨난 것은 무엇일까? 시인의 뒤표지 글을 보자. 예식장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데 한 여자가 계단 위에서 발목과 발목 사이에 팬티를 걸치고 우뚝 서 있다. 이 당혹스러운 상황을 마주한 화자의 자문. “나라면 추켜올렸을까,/아니면 벗어버렸을까.” 이어지는 자답. “더러운 팬티를 수치스러워하기보다/낡은 팬티를 구차해하기보다/고무줄의 약해진 탄성을 걱정하는 데서부터/시라는 것을//나는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공적인 영역에서 여자는 언제나 ‘보여지는’ 존재로 간주됨으로서 ‘느끼는 주체’이기를 억압당한다. 이 폭력적 억압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첫시집은 함께 욕하고 함께 찢고 잘랐다. 하지만 이번 시집에서는 다르다. 낡은 팬티에서 수치와 구차함을 느끼길 강요하는 외부의 시선에는 아랑곳없이, 가만히 서서 “고무줄의 약해진 탄성”에 대해 몰입(걱정)하는 것이 바로 시라는 것을, 그녀는 처음,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몰입은 사적 영역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식장” 앞이라는 공적인 영역에서 ‘대놓고’ 이루어진다.

 

언제 어디서건 누가 뭐라든지 자신의 느낌을 스스로 지켜내고 솔직하게 발화하는 것, 이것이 김민정의 시적인 오르가슴인 것이다. 이것은 분명 시론이다. 시적 자의식의 배제라는 특성이 첫 시집을 도발적으로 느끼게 만들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시적 자의식을 뒤표지 글에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이번 시집의 사태는 완전히 정반대인 것이다. 그러니 이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곧 찔러버릴 듯 벼르고 있던 가시들로 무장한 고슴도치 아가씨는 이제 맨몸으로 홀홀히 걸어나온 것이다. 가시들 속에서 홀로 북적이던 자기자신을 벗어던지고,

더 많은 사람들 사이로. 수학선생님, 신현정 시인, 학이엄마, 할머니, 김근 의사, 스페인에서 만난 흑인 남자와 백인 소녀 커플, 야한 스님, 천안역 노숙자에 이르기까지…… 이 북적이는 사람들이야말로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의 또다른 새로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등장인물들은 환상적 이미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첫시집부터 이어져온 발화방식인 일상어들(비어와 욕설, 성적언어, 구어, 말놀이)은 이전의 환상적 요소를 거의 제거하고 고유명사나 구체적인 시적 정황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들의 편수가 늘어난 것이다. 그러니 김민정의 일관적인 발화방식인 일상어들이 수행하는 기능은 전혀 달라졌다.

 

첫 시집의 일상어들이 환상적 이미지와 결합하여 비아냥거리고 조롱하는 저항의 언어였다면, 두번째 시집에서 일상어들은 고유명사나 구체적인 시적 정황과 결합하면서 시적인 것의 영역을 일상 속으로 넓히는 개척의 언어다. 이제 그녀에게 시적인 것이란, 일상과 동떨어진 고상하고 우아한 무엇이 아니다. “순간 다급하게 펜을 찾는 손이 있어/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릴 때,(「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손끝에 닿는 것은 펜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건네려 했다가 돌려받은 커피캔의 온기인 것이다. 마치 홍상수의 영화처럼 ‘시적인 것’들은 일상에 널려 있고, 그녀는 그 일상들을 과장하지 않고 끌어모은다. 

 

물론 모든 일상사가 있는 그대로 시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가 일상 속에서 시적인 섬광을 발견하는 순간은 이번 시집에 새롭게 등장한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다. 가령,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같은 시. 응급실에 갔더니 담당의사 이름이 ‘김근’이다. 김근 시인의 이름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함께 느낄 반가움과 놀라움을 담아 화자는 “어머, 뿌리 근을 쓰시나요?/성함이 제가 아는 분이랑 같아서요” 하고 반색하는데, 바느질로 바쁜 의사는 아무 말이 없다. 이 어색한 침묵 속에 공존하는 미묘한 불일치 때문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반색했던 화자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 대답 없는 김근 의사 모두 “비호감”이 되는 것을 포착하는 것.

 

그것이 “고무줄의 약해진 탄성”에 대해 몰입하는 순간이다. 물론 이 순간의 핵심은 시적인 것이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며 고발하고 끌어내리는 아방가르드적인 ‘공격성’에 있지 않다. 오히려 “‘앙서점’이나 ‘님짜장’처럼 글자 하나 툭 떨어진 의외의 간판”처럼(「어느 날 가리노래방을 지날 때」) 사소하고 하찮은 순간을 ‘시적인 것’으로 격상시키는 ‘복원성’에 그 방점이 찍힌다. 이 때문에 그녀가 포착하는 일상성은 ‘시적인 것’의 영역을 제한하지 않고 더욱 넓혀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시를 읽고 있으면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들이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혹은 더 정의로워지기 위해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시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 김민정의 시가 가장 시적인 지점에 도달할 때에는 너무나 익숙해서 비루해 보이는 일상까지 깊숙하게 침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위로는 어딘가 

여전히 도발적이다. 물론 이 도발성은 빈번히 출현하는 성적 언어들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성적 언어를 사용할 때의 핵심은 최고조에 이른 섹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섹스를 나눈 뒤/등을 맞대고 잠든 우리/(…)/거기 침대 위에 큼지막하게 던져진//두 짝의 가슴이,/두 쪽의 불알이,” “어머 착”하다는 것을(「젖이라는 이름의 좆」) 발견하는 순간에 있다. 김민정의 시적 오르가슴은 관능과는 거리가 멀다. ‘관능’이란 여전히 보는 자가 보여지는 자에게 은밀히 강요하는 덕목이 아니겠는가. 강조해야할 것은 그녀가 발견해내는 일상들이란 화자가 순수한 관찰자로 존재하는 ‘풍경’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령, 앞에서 인용한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화자는 누구인가? 이 시를 쓴 시인 김민정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녀의 시에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지난 16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1인치씩 얼굴이 자랐다는 조막의 달인 대두 김민정 선생님……”「나미가 나비를 부를 때」) 시를 쓰고 있는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시적 사건의 풍경을 찢으면서 자꾸만 시 속으로 불쑥불쑥 얼굴을 내미는 이 시인은 누구인가. 그녀가 다루는 일상의 대담함이란 바로 시와 시인이, 시와 현실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는 데 있다. 물론 실제 시인과 시 속에서 드러나는 시인이 과연 동일한 인물인가를 묻거나, 마치 현실처럼 보이는 시적 사건이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방점은 시인과 현실세계를 시 속에서 동시에 발견하게 만드는 시적 구조에 찍혀야 한다. 저자의 죽음이 당연시되는 지금 여기에서, 시와 시인, 현실이라는 이질적인 세 영역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순간을 체험하는 것, 그것이 김민정 시의 위로가 지닌 도발성이다. 혹자에게 김민정의 시는 지나치게 사소하고 가볍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가벼움이란 자명한 경계들을 단숨에 임의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자유의 이면이라는 것을, 나는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_《창비문학블로그》 2010년 3월 발표.  

 

 

 

조용하고 정확한 발끝


장은정

이근화의 두 번째 시집 『우리들의 진화』의 출발점은 단순하고 자발적인 감정이다. 그것은 물처럼 흐르고, 공기처럼 이동하며, 불처럼 번져나간다. 내면에 갇혀 있지 않고 언제나 자신의 ‘바깥’을 향해 열리는 이 감정은 시의 전개와 구조를 생성하는 근본적인 에너지다. 「소울 메이트」의 경우, “이 세계가 좋아서”라는 단순한 감정이 이 시를 움직인다. 시 속에서 “우리는” “젖을 줄 알면서”도 “옷을 다 챙겨 입고”, 비 오는 “골목에 서서 비를 맞는다”. “비의 감정”이라는 자신의 감정 ‘바깥’을 만나기 위해서다. 

 

모든 감각을 활짝 열어젖힌 채, 낯선 누군가에게 흠뻑 젖어보는 것. 그리하여 그 누군가가 잃어버린 기억에까지 도달하고자 하는 순수한 몰입. 이 행위는 오로지 ‘듣고자’하는 열린 방향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때 빗줄기는 골목 뿐 아니라 우리의 감정 안으로도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단지 “이 세계가 좋아서” 벌어진 일들이라는 것. 여기에 이근화의 감정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의 ‘역동성’이 존재한다. 

 

낯선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이처럼 ‘듣고자’하는 ‘열림’의 행위로써만 가능하다. ‘듣고자’ 한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군가를 산산이 부쉈다가 자의적으로 다시 맞추는 이해와 판단의 단계로는 발전해나가지 않고 흠뻑 젖기만 하는 행위를 뜻한다. 이는 비 오는 골목에 서 있는 것처럼 가만히 ‘멈추어’ 있는 일이지만 가장 적극적인 자발성으로 이루어진 ‘역동적 정지’이다. 우리 안에는 말 열 마리로도 끌어낼 수 없는 거인이 숨어있어서 스스로 움직이려 하기 전에는 결코 움직여지지 않는다. 이근화의 시는 그 거인이 바로 감정들임을, 그의 어깨에 올라탈 때 세계 역시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헌데 이러한 감정의 자율성의 뒷면에는 어떤 절박함이 있다. 이 시집의 첫 시에 해당하는「엔진」의 일부를 보자.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피를 흘리고/ 귀여워지려고 해/ 최대한 귀엽고/ 무능력해지려고 해// (…)//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울어보려 해/ 우리는 젖은 얼굴을/ 찰싹 때리며/ 강해지려고 해”. 귀여워지려는 것과 무능력해지려는 것이 “피를 흘리”는 것과 동일한 지위를 가질 뿐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문제로 제시되고 있다.

 

이근화의 시에서 감정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것이며, 지켜낸다는 것은 곧 강해지려는 일인 것이다. 그러니 「소울 메이트」는 마지막 연까지 남김없이 읽혀져야 한다. “외투를 입고 구두끈을 고쳐 맨다/ 우리는 우리가 좋을 세계에서/ 흠뻑 젖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골목에 서서 비의 냄새를 훔친다”. 감정은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자발성/자율성인 것이다. “우리가 좋을 세계”를 감정으로 지을 수 있고, 그 속에서 “흠뻑 젖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마로니에」에는 “살아남기 위한” 감정이 어떤 시적 태도와 효과를 보여주는지 잘 드러난다. 시 속에서 화자는 “귀의 모양을 바꾸”기 위해 “귀청이 떨어질 듯 크게 음악을 틀어 놓”거나, “오래된 습관들”에게서 떠나기 위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 보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모든 노력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가고 화자에게 남은 것은 “나무들은 꺾이지 않고/ 도로 위의 아침은 도로 위의 밤을 벗어”난다는 사실 뿐이다. 이 시가 빛나는 지점은 다음에 이르러서다. “가로등에 부닥치는 나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읽기에 좋은 간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안간힘을 써도 꿈쩍도 않는 사실들에 대해 시는 그 어떤 부정적 판단이나 평가, 비난도 하지 않는다.

 

단지 강압적 사실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만 머물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명하게 발언할 뿐이다. 이 직접성은 시와 독자 사이의 거리를, 내쉬는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좁혀놓으면서 시적 효과를 획득한다. 이는 그동안 다른 많은 시들이 감정을 절제하는 묘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정서를 전달하던 작법과는 대조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감정의 직접성이 ‘과잉’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녀의 시가 이해/판단/평가로 발전되려는 지점에서 감정을 정지시키기 때문이다. 이 ‘역동적 정지’는 자신을 지켜내려는 노력인 동시에 타자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그녀의 시가 가장 매력적인 지점, 즉 천진난만하고 엉뚱한 상상력은 바로 이러한 태도가 기저에 깔려있기에 가능하다. 「금자씨의 권총」에서 화자는 자꾸만 화가 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3층 베란다 창문으로 담배꽁초가 들어”온다거나 “21층 사시는 아줌마 한 분”의 지독한 향수 냄새, 혹은 “왕족발이 가죽 수선이 차량 수리가 왔다고/ 친절에 꽂혀 마이크를 가져다 귓가에 들이대는” 상황들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상황에 대처하는 시적 태도는 엉뚱하고 기발하다. 그저 “권총이나 하나 쥐고 있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권총으로 누군가를 쏘아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총알 없이 폼 나게/ 들고 아파트 주변 산책이나 하”겠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감정인 분노를 표현하면서도 어느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 그녀가 시에서 일관되게 보여주는 태도들과 일치한다. 

 

그녀의 엉뚱하고 다정한 상상력은 “배 한 척을 집어삼킨 대왕 오징어의 마음”을(「우리의 우정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중) 걱정하는가 하면, “살인자가 주머니에서 잃어버린 손가락을 꺼내 흔드”는 것을 보고 “그건 나의 것인데 하며 울다가/어느새 좋은 생각에 빠져버리”기도 하며(「大원수 무찌르자 포장마차」중) 자신의 손가락을 장난감처럼 대할 만큼 천진하다. 이 알록달록한 상상력과 투명한 감정들로 가득찬 시에는 원한이나 증오를 위한 자리가 없다. 세계가 병들었을 때, 시는 건강해지려 함으로써 함께 병들지 않는다. 그것은 병든 세계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이지만 동시에 세계를 치유하는 힘이기도 하다. 

 

상상해보자. 키가 닿지 않는 선반 위에 놓인 캔디 박스를. 그리고 아이가 집에 혼자 남은 날, 선반 아래 놓일 의자를. 아마 설렘으로 팽팽한 발끝은 의자를 조용하지만 정확하게 딛고 올라설 것이다. 아이는 “섭취한 대부분의 영양을 발로 소비한다”(「우리들의 진화」중).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두 발을 사랑”하는 일이다. 우리 자신의 두 발을 믿고, “길을 똑바로 걸어/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되돌아”올 것.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상자는 다시 닫히고, 의자는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지만, 세계는 어딘가 비밀스러워져 있다. 

_《문학동네》 2009년 겨울호 발표.

 

 

 

빛으로 만들어진 방, 그림자의 신전

장은정

벽과 바닥, 천장이 빛으로 만들어진 방이 하나 있다. 방에 나 있는 창으로는 미끄럼틀을 타듯 그림자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바닥으로 미끄러진 그림자들은 젖어있고 이윽고 방 속을 물처럼 흐르기 시작한다. 그 “그림자 속에서 새가 날고”, “강이 흐르고”, “바람이 불”면서(「세상에서 가장 긴 나무의 오후」중) 지평선이 생기고 나무들이 길게 자라난다. 이 낯선 세계 속, 그림자들의 살아있는 형태들을 넋을 잃고 지켜보노라면 건축가 루이스 칸의 말들이 떠오른다.

 

“방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 즉 방에 속한 빛은 대단한 것이다. 태양은 방이 만들어 지기까지는 그 빛이 얼마나 멋진가를 깨닫지 못한다.”(존 로벨, 김경준 역, 『침묵과 빛 ― 루이스 칸의 언어』, 스페이스타임, 2005. 104면.) 신영배의 이번 시집을 읽으며 이 문장들을 이렇게 바꿔 읽었다. ‘신영배의 시들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그림자라는 존재가 얼마나 멋진가를 깨닫지 못한다.’ 하나의 방은 자아의 확장일 뿐 아니라 사건의 체험이라 생각하는 루이스 칸의 말들에 이어 기댄다면, 신영배의 방은 우리의 자아를 확장시키고 새로운 사건을 체험하게 한다. 

 

 

오후 두 시 방향으로
나는 상자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얇게 접어둔 다리

의자는 새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앉아 있던 잠이 툭 떨어져 내린다
의자가 쓰러지고
새가 아름답게 나는 방

…중략…

커튼은 물고기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젖히자 출렁이는 강물 속
내 다리가 아름답게 흐르는 방


―「아름다운 방」부분

 


시 속에서 상자의 그림자는 흘러가며 의자의 그림자가 되고, 의자의 그림자는 흘러가며 새의 그림자, 물병의 그림자가 된다. 끊임없이 흐르며 다른 형태가 되는 이 그림자들은 대체 무엇인가. 귀속되어 있어야 할 대상과 무관하게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실체가 되는 이 그림자들. 그것을 부재의 현존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신영배의 그림자들은 어떤 특정한 의미나 상징의 대체물이 아니라 ‘물질’에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이 그림자들에게 어떤 이념적 진리를 요구한다면, 그러나 그림자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모든 물질들이 가진 침묵을, 이 그림자 역시 가지고 있다. 이 “다리가 아름답게 흐르는” 움직임은 오로지 이러한 물질적 침묵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림자의 움직임에 따라 수많은 대상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헌데 우리는 시 속에서 상자, 의자, 새, 물병, 물고기로 변하는 그림자의 수많은 대상들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자와 의자의 사이, 의자와 새의 사이까지 바라본다. 그 ‘사이’의 공간은 행과 연 사이의 간격들이다. 행갈이와 연갈이에 의한 호흡의 배치와 구조에 의해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 많은 대상들의 모습들을 한번에 이어서 연속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혀 다른 대상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움직임들의 동선은 마치 무용수의 동작들처럼 우아하고 매혹적이다. 물론 이 동선은 오로지 ‘비어 있음’의 간격에서만 읽어낼 수 있는 가상의 선(線)이다. 

 

상상력의 물질인 이 가상의 선은 볼 수만 있을 뿐, 만질 수는 없다. 바로 그것이 이 움직임이 주는 매혹의 핵심이다. 칸은 우리의 모든 감각 중 가장 첫 번째 감각은 촉각이며, 촉각은 단순히 만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만지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또한 이 열망은 보고자 하는 열망으로 발전되어 나간다. 즉 시각만이 허락되는 이 가상의 물질은 만지고자 하는 열망을 가장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는 이 순수한 동선들의 긴장에 헌신하는 시들로 붐비고 있다. 

 


소녀는 새를 기다린다
새는 물을 뚝뚝 흘린다

줄 위에 새가 앉아 있다

새가 마르면
새는 날아간다 

나는 소녀를 기다린다
소녀는 물을 뚝뚝 흘린다

줄 위에 소녀가 앉아 있다

소녀가 마르면
소녀는 날아간다

바다가 밀려온다
줄 위에서 떨어지는
소녀를 본다

목이 부러진 새를 날리던 물가


― 「소녀의 점」전문

 


이 시는 시적 구조와 이미지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로 결합했다가 분산되는 운동을 통해 시적 효과를 획득한다. 시의 구조를 살펴보자. 새와 소녀가 등장한다. 소녀는 새를 기다리고 있고, 새는 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새라는 상승의 이미지와 물이 떨어지는 하강의 이미지가 동시에 응축된 이 이미지는 돌연 말라버리고 날아가 버린다. 새가 마른다는 구절에서 물과 동일시된 새의 존재도 기묘하지만, 소녀를 기다리는 ‘나’가 등장하자 소녀가 돌연 새의 구조를 그대로 반복하는 장면은 더욱 낯설고 기묘하다. “소녀는 물을 뚝뚝 흘린다”는 “새는 물을 뚝뚝 흘린다”의 반복이며, “줄 위에 소녀가 앉아 있다”는 “줄 위에 새가 앉아 있다”의 반복인 것이다. 소녀와 새의 관계에서 새가 사라지자, 소녀는 새가 되고, 소녀의 역할은 ‘나’가 맡게 된다. 삼각형을 그려가는 선들의 반복적인 운동 속에서 동선들이 생겨난다. 

 

돌연 등장하는 “바다가 밀려온다”의 구절은 이 삼각형을 그리는 선들과 충돌하며 시적 효과를 획득한다. 필시 “줄”의 수평적 선의 연속에서 등장했을 바다의 수평적 이미지는 “밀려온다”는 서서히 펼쳐지는 면과 충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면은 “줄 위에서 떨어지는 소녀의 점을 본다”는 구절의 점들과 충돌한다. 다양한 형태들의 불규칙한 운동 속에서 펼쳐지는 긴장들은 마지막 구절 “목이 부러진 새를 날리던 물가”라는 구체적 이미지를 통해 극대화되어 완성된다. 이 짧고 간결한 행들이 펼치는 명료한 동선들의 긴장들은 단연 신영배의 시적 공간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사건이라 할 만하다. 

 

어째서 이 추상적인 선들이 감정을 동반하여 구체적 시적 효과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일까. 스위스의 미술사가인 뵐플린은 건축 형태가 어떻게 분위기와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우리 모두는 몸을 가지고 있고, 그 몸을 통해 공감의 원칙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라 대답한다. “우리의 신체 조직이 하나의 형태이고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모든 구체적인 것을 이해한다.”(에이드리언 포티, 역 이종인, 「형태」,『건축을 말한다』, 미메시스, 2009. 235면.) 건축적 형태에 대한 뵐플린의 설명을 빌려올 수 있다면, 신영배의 시들은 우리 몸의 형태들을 통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헌데 이 움직임들이 그려내는 동선들은 하나의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검은 바람결이 목을 감는다 손아귀들이 연체동물처럼 스멀스멀 저녁의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그림자들이 죄다 머리가 잡혀 저녁의 점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얼어붙어 집으로부터 떨어진 점이 된다 둥근 나무들의 여백 사이로 발없는 여자가 달린다 베란다에서 자라는 검은 식물 속으로 모공의 꿈속으로 침대와 엘리베이터와 테이블과 보도블록과 물빛이 함께 있는 거울 속으로, 달린다, 점이 될 때까지


―「저녁의 점」부분

창밖에서 사람들은 그림자를 사고팔았다 // 정오의 사무실 // 벽에 점이 있다  // 그녀는 / 점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 벽이 눕는다 // 바닥이 일어선다 // 그녀가 쓰러진다 // 바닥에 점이 있다 / 점이 있다 // 그녀는 일어나 / 점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 다시 벽이 눕는다 // 다시 바닥이 일어선다 // 그녀가 쓰러진다 // 벽이 도로 벽이 된다 // 연속하는 점 // 그녀는 일어나 / 점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 벽이 눕는다 // 바닥이 일어선다 // 쓰러진다 // 그녀는 일어나 / 점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 깊은 곳에서 말을 버렸다

 

―「정오에는 말을 버린다」전문

 


위의 인용된 시들에게서 쉽게 알 수 있듯이 모든 반복되는 운동성들은 한없이 점으로 수렴되고자 한다. 「저녁의 점」에서 그림자들과 발 없는 여자는 “점이 될 때까지” 달린다. 이 ‘점’은 “저녁의 구멍”이라거나 “거울”과 같은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있다. 구멍처럼 뚫려 있으나, 거울처럼 막혀있는 이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 ‘점’의 의미는 「정오에는 말을 버린다」에서 더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이 시에서 정오의 사무실은 벽이 눕고 바닥은 일어서는 회전을 거듭한다. 그 회전을 주도하는 ‘그녀’는 마치 쳇바퀴를 도는 것처럼 절박하다. 그녀가 달려드는 곳은 앞의 시와 마찬가지로 “점”이다. 하지만 점은 계속해서 그녀를 튕겨내고 그녀는 다시 정오의 사무실을 굴리고 점으로 달려들기를 멈추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그녀는 이토록 절박하게 달리고 뛰어드는 것일까. 

 

마지막 구절이 그 질문에 대한 결정적 힌트가 되어줄 수 있을 듯하다. “깊은 곳에서 말을 버렸다”. 어쩌면 신영배가 이 모든 운동을 반복하는 것은 ‘말을 버린 깊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 즉 언어 이전의 언어, 언어 없는 언어에 도달하기 위해서일지 모른다. 「점의 동물」에서 ‘점’은 수정란의 상태로 형상화된다. 이 시에서 점이란 ‘동물’이기도 한 것인데, 그것은 “입이 귀였을 때/무릎이 혀였을 때/머리통이 발바닥이었을 때/…중략…/두 다리가 가슴이었을 때/요도가 식도였을 때”처럼 모든 것이 합쳐져 있는 근원적이고 합일적인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는 시간적 의미에서 존재의 최초이기도 하고, 이 모든 운동성이 정지되어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그것은 「기하학적 다리에 대한 독백」에서 점은 그림자(운동성)가 생겨난 근원을 지시하기도 한다. “두 개의 다리를 외출시키고 나는 네 개의 점으로 주방에 몰려있어요” 

 

사실 신영배는 첫 시집 『기억이동장치』에서 “쓰다가 내가 사라지는 시/쓰다가 시만 남고 내가 사라지는 시”(「시인의 말」중)를 쓰고 싶다고 쓴 적이 있다. 이미 그녀는 첫 시집에서부터 사라지는 자유를 꿈꿔왔던 것이다. 이제 두 번째 시집에서 사라지고 싶은 것은 시인 뿐 아니라 시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시들은 증발을 향해 거슬러 흐르고 있다. “꽃이 있는 곳에서 꽃이 없는 곳으로”, “혀가 있는 곳에서 혀가 없는 곳으로”, “바람이 있는 곳에서 바람이 없는 곳으로”(「얼굴은 안개로 돌아간다」중). “얼굴들은 액체에서 기체로”(「4월의 나프탈렌」중). 엄밀한 제한성과 규칙성들이 부여된 이 움직임들에게는 사라지기 위한 순수한 ‘동선’들만이 남아있다. 빛으로 만들어진 방, 살아 있는 형태들이 무한히 흐르고 있는 곳. 그 곳은 그림자의 신전이다. 

 

_《현대시》, 2009년 10월호 발표.

 

 

 

 

 

씩씩한 반작용과 무중력의 영역

 

장은정

오은 시인의 첫 시집인 『호텔 타셀의 돼지들』(민음사 2009)은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경쾌한 ‘말놀이’들로 가득하다. 이 놀이는 좀처럼 지칠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까르르 까르르 숨넘어갈 듯 웃으며 ‘또 하자’고 어른들을 조른다. 먼저 녹초가 되는 쪽은 언제나 어른들이다. 수록된 대부분의 시가 말놀이를 거친다는 점에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은 명백히 아이들의 세계다. 아이들에게 언어란 존재의 집과 같이 엄숙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음과 모음으로 따로 떼어내 가지고 놀 수 있는 알록달록한 블록이다.  

 

「0.5」에서 0.5라는 숫자는 단위의 종류에 따라 시력, 샤프심, 강설량, 구 버전 소프트웨어, 커플링의 무게 등으로 쉴새없이 다르게 규정된다. 이 ‘단위의 이데올로기’는 무표정하게 0.5라는 숫자를 자신의 의도와 필요에 의해 ‘사용’한다. 사용이 끝나고 나면 여지없이 “잊어버리”거나 “휙 던져”버리고, “분해”해버린다. 이처럼 0.5를 함부로 다루는 일방적인 태도는 이해와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이러한 일방적인 폭력에 분노하는 데 궁극적인 목적을 두지 않는다. 독자가 가장 먼저 누리게 되는 것은 다양한 종류의 0.5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이다. 이 즐거움이 먼저 온 후에 다른 정서들이 뒤따라 붙는 것이다.

 

「어떤 날들이 있는 시절 3」 또한 마찬가지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마다 새우 등이 터졌지만, 등잔 밑이 어두워서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거나 “쥐구멍에는 볕 대신 병이 들었고 고생 끝에 찾아온 건 낙이 아니라 막”이라는 구절들을 보자. 이 구절들은 우리 주변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절망스럽고 부조리한 어떤 구체적인 사건들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이 묘사들은 마냥 비장해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선 속담을 비틀거나 이어붙여 만든 이 절묘한 말놀이들에 ‘감탄’하면서 잠시나마 이 상황들에 대해 시치미를 떼고 웃을 수 있다.

 

사실 말놀이가 이처럼 ‘본격적인’ 요소였던 적은 없다. 황병승의 말놀이는 세계의 폭력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부조리와 모순을 드러내고 동시에 자기연민을 경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이는 황병승의 시에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 전면적인 특성이라 규정하기 힘들다. 김경주의 말놀이는 간혹 위트와 유머를 동반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노리는 것은 정서의 효과적인 전달이다. 이 말놀이 역시 김경주의 시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꼽기는 힘들다. 이에 비하면 오은의 말놀이는 분량적인 면에서나, 그 의의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말놀이들은 지칠 줄 모르는 활기로 가득하다. 세계의 폭력으로 인해 앓거나 미치거나 분노하던 그간의 많은 시들과는 달리, 보란 듯이 ‘활짝’ 웃으며 더욱 신나게 “텀블링, 텀블링”(「스프링」) 튀어 오른다. 

 

이 도약은 정점에서 세계를 일시적이나마 ‘내려다볼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하여 함께 웃을 수 있게 한다. 잠시 떠오른 그 순간의 정점에는 끔찍한 세계에 대한 긍정과 분노가 공존하고 있다. 세계가 아무리 폭력과 억압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이를 완전히 외면하지 않고 끈질기게 바라본다는 점에서 긍정이며, 그 세계를 웃음거리로 만든다는 점에서 분노인 것이다. 즉 말놀이는 맞은편에서 날아오는 공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면서 힘차게 맞받아친다. 이것이 오은 시인이『호텔 타셀의 돼지들』에서 보여주는 ‘씩씩한 반작용’의 자의식이다. 이 세계의 ‘끔찍함’에서 더 큰 반동을 끌어내 ‘말놀이’와 ‘애드리브’로 즐겁게 도약하는 이런 태도는 분명 특별하고 새로워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 시집의 더 큰 가능성은 「한스」나 「존재하려는 경향」을 비롯한 몇편의 예외적인 시들에게서 발견된다. 이 시들은 ‘씩씩한 반작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작용―반작용의 무한한 반복의 궤도를 약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한스」에서 ‘한스’는 하룻밤 사이에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 “꿈을 품기보다는 그것을 실현하는 문제에” 부딪힌다. 하룻밤 사이에 바뀐 기준들로 혼란스러워진 한스에게서 ‘질문’들이 쏟아진다. “하루 만에 성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질문에 대한 질문도 이어진다. “내게 질문할 권리가 있긴 한 걸까요?” 「21세기 어린이」역시 문득 찾아온 질문들이 시의 마지막을 차지하고 있다. “나의 이름은 과연 몇개나 될까요? (…) 얼마나 더 성장해야 할까요? (…) 대체 누구 말을 믿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질문들에서 아이가 세계의 폭력에 ‘대응’하는 것을 넘어서서 스스로를 ‘들여다보려’ 하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세계를 내려다보던 수직적인 시선이 점차 그 방향을 반대로 되돌려 자기 자신을 향한 수평적 시선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수평적 시선이 궁극적으로 닿는 곳은 바로 ‘어리둥절한 무중력의 영역’이다.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는 이 영역은 혼란스럽다. 

 

「존재하려는 경향」은 이 영역의 모호함이 시적인 순간으로 잘 포착되어 있다. 이 시에는 이차 방정식 예제를 샤프심 한번 부러뜨리지 않고 푸는 선생님과, 그런 선생님에게 관심을 받지 못해 속상해하는 소년이 등장한다. 이 시가 묘한 느낌을 주는 것은 전화기를 들고 “문득 막막”해 하는 1층의 엄마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인과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 시는 기계마냥 메말랐을 것 같았을 “선생님이 흠뻑 젖은 몸으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면서 매혹적인 어리둥절함을 전달한다. 

 

씩씩한 반작용의 시들은 작용과 반작용의 영역이 명료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중력의 영역’에서는 그 상반되는 흑백의 명료함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이 모호함과 불확실함은 이데올로기의 감시와 억압이 완전히 포섭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이다. 이 예외적인 몇편의 시들은 세계의 억압과 감시망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는 몇편에 한정된 미약한 가능성이다. 허나 이 미약한 가능성이 없다면 이 시집이 주력하고 있는 ‘씩씩한 반작용’은 단지 ‘새로움’에 그쳐버렸을 것이다. 시가 가닿을 수 있는 최고의 지점은 기존의 세계에 단지 ‘새롭게 대응’할 때가 아니라, 그 대응마저 넘어서는 순간 만들어지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첫’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갖춘 그 ‘씩씩함’을 그대로 껴안고, 이 젊은 시인이 무중력의 영역 속으로 더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기를. “씩씩하게, 씩씩하게 / (…) / 묻고 또 묻고 / 묻는다는 것에 대해 또 물을 것.”(「스타일」)

 

_《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 발표 (본문 보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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