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질서
 
장은정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 ‘나’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어 합니다. 내가 나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만큼 스스로에게 갇혀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 있을까요. 이영주의 두 번째 시집 『언니에게』를 읽으며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나 자신이 아닐 수 없는 순간들 속에서만 살아가야하는 인간이 감당해야하는 슬픔들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시집은 어느 페이지를 아무렇게나 펼쳐도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간신히 존재하는 것들, 살아간다기보다는 살아남은 것에 가까운 이미지들이 바로 그것인데요.

 

“새의 하나만 남은 발”(「력(曆)의 기원」)이라거나 “숲이 낳은 뭉툭한 아기들의 손발”(「자살법」), “고양이가 먹다 남긴 쥐의 얼굴”(「동거녀」), “단도로 반을 가른 개구리”(「활자들이 길게 타오르며 태양으로 올라간다」) “붕대를 감아도 통증을 감출 수 없는 나무들”(「소녀는 던진다」)에 이르기까지 시집 속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생명력으로 활기차기보다는 온통 절룩거리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미지들이 유독 기묘한 것은 그것이 강렬한 핏빛을 띄면서 역동적으로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노톤의 색감으로 매우 건조하게 죽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날선 비명도 고통스런 몸부림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들은 그러한 담담함이 읽는 사람을 더욱 몰입하게 만듭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뒤를 돌아보지 마. 구멍이 좁다는 걸 알면서도 내내 돌아보던 너의 흰 목에서 피가 흐른다. 노인은 신에게 경배를 드릴 때마다 조금씩 무릎이 부서진다. 너무 쉽게 죽은 사람의 이름을 말하면 안 돼. 한쪽 유방이 도려내진 브래지어를 보고 한 노인이 뒤를 돌아본다. 이것은 전염병일까? 목발을 짚은 사내는 꺼지지 않는 불꽃을 뒷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는다. 신은 뒤를 돌아보는 불경한 것들의 심장을 움켜쥔다. 아름다워지기 전에 뒤를 돌아보면 안 돼. 오르페우스는 어린 딸과 침대가 없는 외계(外界)로 가기 위해 천상의 노래를 부른다. 목소리를 잃고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본다. 제 다리를 뜯어 먹는 늙은 개. 


―「뒤」 전문



‘뒤’에는 “아름답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한쪽 유방이 도려내진 브래지어”나 “제 다리를 뜯어 먹는 늙은 개” 같은 것들 말이에요. 이들이 경고합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들키고 싶지 않으니, 뒤를 돌아보아선 안 된다구요. 이 경고에는 수치가 뒤섞인 간절함이 묻어 있습니다. 그것이 이 시의 도입부를 하데스의 금기가 아니라 절실한 부탁으로 들리도록 만듭니다. 한데 부탁을 받은 자 역시 “목발을 짚은 사내”처럼 마찬가지로 “아름답지 않은” 자입니다. 그는 결심합니다. “아름다워지기 전에 뒤를 돌아보면 안 돼.” 하지만 그는 “흰 목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아름답지 않은 것”들을 “내내” 돌아봅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들이 “전염병”처럼 시 속을 번져가는 것이지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아름답지 않은” 자들은 누군가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시인은 죽음을 풍기는 이러한 ‘아름답지 않은’ 불완전함을 외부의 강제적인 힘에 의한 훼손이 아니라, 본연적으로 이미 주어져 있는 필연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구나 기형은 정상으로부터 벗어난 우연적인 비정상이 아니라, 애초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내포되어 있는 필수적인 존재론적 속성인 것이지요. 어쩌면 ‘정상’이라는 것은 현상계에서는 불가능한 초월적 관념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는 불경한 것들의 심장을 움켜”쥘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신’ 뿐인 것이지요. 그러니 이 시는 아름답지 않은 것들에게 바치는 시, 아름답지 않은 자들이 아름답지 않은 자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내내 바라보게 되는 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시가 가장 슬픈 지점은 불완전한 아름다움을 “내내” 돌아보면서도, 궁극적으로 걸음의 방향은 바꿀 수 없다는 것.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간주되는 ‘앞’이라는 방향 자체는 바꿀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뒤에 남겨진 자든, 내내 돌아보는 자든, 모두가 ‘앞’을 향해 있다는 것이 이 시가 불러일으키는 슬픔의 본질입니다. 만약 ‘앞’이 없다면 ‘뒤’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불구의 이미지들에게 있어서 불완전함이 만들어 낸 빈자리는 바로 이 완전한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으로 출렁이고 있습니다. 그 열망이 수치를 만들어내고,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만들어냅니다.

 

놀라운 것은 이 불우한 존재론이 아주 오래된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이 존재론을 단순히 개별적 감정의 차원으로, 근대를 맞이한 현대인들의 어느 특정 시대의 산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린 저무는 사람들”, “태어나면서부터 우린 비린내를 풍기는 물건들.”(「저무는 사람」)과 같은 구절들이 잘 보여주듯이 생명의 불완전함이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새겨져있는 보편적인 구조입니다. 그러니 그 슬픔과 수치의 이력 또한 매우 오래 되었음을 예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장마」는 현재의 슬픔과 몇 세기 전의 슬픔의 밀접함을 ‘장마’를 통해 응축하여 보여주는 탁월한 시편입니다. 화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욱신거리는 등”에서 “몇 세기 전의 울음”을 감지해 냅니다. 이 시가 어느 극점이 다다르는 것은 다음의 구절인데요. “위로받지 못하는 건 점점 휘어가는 내 등만이 아니다. 어떤 종족은 사라지고 싶어서 비명을 안으로 삼킨다.” 내부로 날카롭게 향해있는 혐오가 개인적인 슬픔이 아니라 종족의 보편적 슬픔과 결합하고 있습니다. 어떤 슬픔이 이토록 깊기에 개인적 감정에 그치지 않고 후대에까지 이어지는 것일까요.

 

「해바라기」에서도 비슷한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부활하지 않으려고 귀에 독을 넣어주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완전함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요. “나를 만진다/모든 혐오감은 접촉에 대한 것”(「월식」)이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가늘게 어깨를 떨고 있습니다. 이 불우한 존재론의 슬픔이 점차 확대되어 우주적 질서로, 형이상학적 원리에까지 가닿는 것은 이 시집의 중요한 성취 중 하나입니다. 시집에 수록된 시들 중에 「미래안(未來眼)」은 감히 제가 판단하기에 이영주 시인만이 쓸 수 있는 아름다움에 닿아있다고 생각합니다.

 


크레타 섬에는 대리석과 염소와 죽은 왕들. 푸른 이마를 문지르며 노인이 옆 노인을 끌어안는 장면. 에게 해 절벽에서 우주 원자론이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 밤이면 얼굴을 깎아 비석을 세우는 여러 개의 니코스 카잔차키스 술집. 잘린 토끼 머리가 정육점 유리창에 매달려 귀를 길게 세운다. 죽는다는 건 홀로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는 것. 노인이 옆 노인의 목을 끌어안고 염소처럼 운다. 따뜻한 언덕에서 지친 노년이 다른 노년을 배웅하는 것. 저녁이면 흔들리는 에게 해 물빛. 수학 시간 옆자리에서 동맥 끊기 놀이를 하던 내 첫사랑 소녀의 까맣고 푸른 동공 같은. 절벽에는 죽은 왕들의 비밀 문자. 어린 왕은 진공 없이 텅 빈 바다를 봤다고 썼지만 홀로 남은 시간에는 우주에 꽉 찬 숫자를 보고 운다. 크레타 섬 정육점 유리창에 붙어 토끼 이마에 툭 불거진 뼈 하나를 보는 저녁. 노인이 천천히 쓰러지는 옆 노인처럼 푸르고 푸르게 물이 드는.


― 「미래안(未來眼)」

 


이국적인 소재들도 매혹적이고, 조용히 걷다가 문득 멈추는 듯한 문장의 종결방식도 매혹적이지만, 이 시가 가장 매혹적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죽음을 앞둔 노인들에 관한 시라는 점입니다. 시는 “죽는다는 건 홀로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홀로 있는 자신을 곧 마주해야하는 노인들이 “목을 끌어안고 염소처럼” 함께 울고 있습니다. “따뜻한 언덕에서 지친 노인이 다른 노년을 배웅하는 것.”이지요. 노년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듯한 ‘지친’이라는 수식어가 마음을 칩니다. 노인의 울음은 가장 외면하고 싶은 추한 인간적 진실들까지도 긍정하고 마주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존재의 불완전함은 노인의 울음에 이르러 가장 완성된 형태에 도달합니다. 

 

“어린 왕은 진공 없이 텅 빈 바다를 봤다고 썼지만 홀로 남은 시간에는 우주에 꽉 찬 숫자를 보고 운다.”라는 구절은 노인의 울음이 두려움으로 번들거리는 아이의 울음으로 되돌아가면서 총체적인 형이상학적 질서를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때 노인이 천천히 쓰러집니다. 옆 노인은 푸르고 푸르게 물이 들구요. 이 번져가는 푸른빛에는 불완전함에 대한 어떤 혐오의 흔적도 없지만, 불완전함이 그 자체로 진정한 완전함임을 깨달았다는 식의 어떤 이념적 진실에 치우치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에게 해의 흔들리는 저녁 물빛처럼 한 노인의 울음이 다른 노인에게 옮겨가는 것 뿐 입니다.

 

저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나 자신이 아닐 수 없는 순간들 속에서만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슬픔들을 시집을 읽으며 느꼈다고 썼습니다. 어쩌면 그 슬픔들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진부하지만 거대한 결론을 맺어야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사라진 그런 투명한 슬픔들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아직 저 노인들처럼 지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다만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투명한 슬픔은 스스로에게만 차오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푸르게 물들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