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확장되는 자유

장은정

그녀가 돌아왔다.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라는 제목으로. 그런데 말이다. 두번째 시집의 제목에서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니? 이는 첫 시집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무엇인가가 처음, 생겨났음을 암시하고 있다. 2005년의 첫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는 금방이라도 시집 밖으로 흘러넘칠  듯 기괴한 이미지들로 출렁이고 있었다. 비아냥거림이 섞인 비어와 욕설, 구어, 말놀이들은 외부의 폭력과 억압들을 조롱하거나 자기혐오의 형태로 절제 없이 들끓었다. 이는 ‘예술가의 자의식’이라는 의식적 ‘절제’마저 거부하는 것으로 읽혔기에 급진적인 동시에 위태롭게 보이는 지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첫 시집과 다르게 이번 시집에서 “처음” 생겨난 것은 무엇일까? 시인의 뒤표지 글을 보자. 예식장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데 한 여자가 계단 위에서 발목과 발목 사이에 팬티를 걸치고 우뚝 서 있다. 이 당혹스러운 상황을 마주한 화자의 자문. “나라면 추켜올렸을까,/아니면 벗어버렸을까.” 이어지는 자답. “더러운 팬티를 수치스러워하기보다/낡은 팬티를 구차해하기보다/고무줄의 약해진 탄성을 걱정하는 데서부터/시라는 것을//나는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공적인 영역에서 여자는 언제나 ‘보여지는’ 존재로 간주됨으로서 ‘느끼는 주체’이기를 억압당한다. 이 폭력적 억압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첫시집은 함께 욕하고 함께 찢고 잘랐다. 하지만 이번 시집에서는 다르다. 낡은 팬티에서 수치와 구차함을 느끼길 강요하는 외부의 시선에는 아랑곳없이, 가만히 서서 “고무줄의 약해진 탄성”에 대해 몰입(걱정)하는 것이 바로 시라는 것을, 그녀는 처음,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몰입은 사적 영역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식장” 앞이라는 공적인 영역에서 ‘대놓고’ 이루어진다.

 

언제 어디서건 누가 뭐라든지 자신의 느낌을 스스로 지켜내고 솔직하게 발화하는 것, 이것이 김민정의 시적인 오르가슴인 것이다. 이것은 분명 시론이다. 시적 자의식의 배제라는 특성이 첫 시집을 도발적으로 느끼게 만들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시적 자의식을 뒤표지 글에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이번 시집의 사태는 완전히 정반대인 것이다. 그러니 이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곧 찔러버릴 듯 벼르고 있던 가시들로 무장한 고슴도치 아가씨는 이제 맨몸으로 홀홀히 걸어나온 것이다. 가시들 속에서 홀로 북적이던 자기자신을 벗어던지고,

더 많은 사람들 사이로. 수학선생님, 신현정 시인, 학이엄마, 할머니, 김근 의사, 스페인에서 만난 흑인 남자와 백인 소녀 커플, 야한 스님, 천안역 노숙자에 이르기까지…… 이 북적이는 사람들이야말로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의 또다른 새로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등장인물들은 환상적 이미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첫시집부터 이어져온 발화방식인 일상어들(비어와 욕설, 성적언어, 구어, 말놀이)은 이전의 환상적 요소를 거의 제거하고 고유명사나 구체적인 시적 정황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들의 편수가 늘어난 것이다. 그러니 김민정의 일관적인 발화방식인 일상어들이 수행하는 기능은 전혀 달라졌다.

 

첫 시집의 일상어들이 환상적 이미지와 결합하여 비아냥거리고 조롱하는 저항의 언어였다면, 두번째 시집에서 일상어들은 고유명사나 구체적인 시적 정황과 결합하면서 시적인 것의 영역을 일상 속으로 넓히는 개척의 언어다. 이제 그녀에게 시적인 것이란, 일상과 동떨어진 고상하고 우아한 무엇이 아니다. “순간 다급하게 펜을 찾는 손이 있어/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릴 때,(「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손끝에 닿는 것은 펜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건네려 했다가 돌려받은 커피캔의 온기인 것이다. 마치 홍상수의 영화처럼 ‘시적인 것’들은 일상에 널려 있고, 그녀는 그 일상들을 과장하지 않고 끌어모은다. 

 

물론 모든 일상사가 있는 그대로 시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가 일상 속에서 시적인 섬광을 발견하는 순간은 이번 시집에 새롭게 등장한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다. 가령,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같은 시. 응급실에 갔더니 담당의사 이름이 ‘김근’이다. 김근 시인의 이름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함께 느낄 반가움과 놀라움을 담아 화자는 “어머, 뿌리 근을 쓰시나요?/성함이 제가 아는 분이랑 같아서요” 하고 반색하는데, 바느질로 바쁜 의사는 아무 말이 없다. 이 어색한 침묵 속에 공존하는 미묘한 불일치 때문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반색했던 화자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 대답 없는 김근 의사 모두 “비호감”이 되는 것을 포착하는 것.

 

그것이 “고무줄의 약해진 탄성”에 대해 몰입하는 순간이다. 물론 이 순간의 핵심은 시적인 것이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며 고발하고 끌어내리는 아방가르드적인 ‘공격성’에 있지 않다. 오히려 “‘앙서점’이나 ‘님짜장’처럼 글자 하나 툭 떨어진 의외의 간판”처럼(「어느 날 가리노래방을 지날 때」) 사소하고 하찮은 순간을 ‘시적인 것’으로 격상시키는 ‘복원성’에 그 방점이 찍힌다. 이 때문에 그녀가 포착하는 일상성은 ‘시적인 것’의 영역을 제한하지 않고 더욱 넓혀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시를 읽고 있으면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들이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혹은 더 정의로워지기 위해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시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 김민정의 시가 가장 시적인 지점에 도달할 때에는 너무나 익숙해서 비루해 보이는 일상까지 깊숙하게 침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위로는 어딘가 

여전히 도발적이다. 물론 이 도발성은 빈번히 출현하는 성적 언어들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성적 언어를 사용할 때의 핵심은 최고조에 이른 섹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섹스를 나눈 뒤/등을 맞대고 잠든 우리/(…)/거기 침대 위에 큼지막하게 던져진//두 짝의 가슴이,/두 쪽의 불알이,” “어머 착”하다는 것을(「젖이라는 이름의 좆」) 발견하는 순간에 있다. 김민정의 시적 오르가슴은 관능과는 거리가 멀다. ‘관능’이란 여전히 보는 자가 보여지는 자에게 은밀히 강요하는 덕목이 아니겠는가. 강조해야할 것은 그녀가 발견해내는 일상들이란 화자가 순수한 관찰자로 존재하는 ‘풍경’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령, 앞에서 인용한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화자는 누구인가? 이 시를 쓴 시인 김민정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녀의 시에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지난 16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1인치씩 얼굴이 자랐다는 조막의 달인 대두 김민정 선생님……”「나미가 나비를 부를 때」) 시를 쓰고 있는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시적 사건의 풍경을 찢으면서 자꾸만 시 속으로 불쑥불쑥 얼굴을 내미는 이 시인은 누구인가. 그녀가 다루는 일상의 대담함이란 바로 시와 시인이, 시와 현실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는 데 있다. 물론 실제 시인과 시 속에서 드러나는 시인이 과연 동일한 인물인가를 묻거나, 마치 현실처럼 보이는 시적 사건이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방점은 시인과 현실세계를 시 속에서 동시에 발견하게 만드는 시적 구조에 찍혀야 한다. 저자의 죽음이 당연시되는 지금 여기에서, 시와 시인, 현실이라는 이질적인 세 영역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순간을 체험하는 것, 그것이 김민정 시의 위로가 지닌 도발성이다. 혹자에게 김민정의 시는 지나치게 사소하고 가볍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가벼움이란 자명한 경계들을 단숨에 임의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자유의 이면이라는 것을, 나는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_《창비문학블로그》 2010년 3월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