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정확한 발끝


장은정

이근화의 두 번째 시집 『우리들의 진화』의 출발점은 단순하고 자발적인 감정이다. 그것은 물처럼 흐르고, 공기처럼 이동하며, 불처럼 번져나간다. 내면에 갇혀 있지 않고 언제나 자신의 ‘바깥’을 향해 열리는 이 감정은 시의 전개와 구조를 생성하는 근본적인 에너지다. 「소울 메이트」의 경우, “이 세계가 좋아서”라는 단순한 감정이 이 시를 움직인다. 시 속에서 “우리는” “젖을 줄 알면서”도 “옷을 다 챙겨 입고”, 비 오는 “골목에 서서 비를 맞는다”. “비의 감정”이라는 자신의 감정 ‘바깥’을 만나기 위해서다. 

 

모든 감각을 활짝 열어젖힌 채, 낯선 누군가에게 흠뻑 젖어보는 것. 그리하여 그 누군가가 잃어버린 기억에까지 도달하고자 하는 순수한 몰입. 이 행위는 오로지 ‘듣고자’하는 열린 방향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때 빗줄기는 골목 뿐 아니라 우리의 감정 안으로도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단지 “이 세계가 좋아서” 벌어진 일들이라는 것. 여기에 이근화의 감정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의 ‘역동성’이 존재한다. 

 

낯선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이처럼 ‘듣고자’하는 ‘열림’의 행위로써만 가능하다. ‘듣고자’ 한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군가를 산산이 부쉈다가 자의적으로 다시 맞추는 이해와 판단의 단계로는 발전해나가지 않고 흠뻑 젖기만 하는 행위를 뜻한다. 이는 비 오는 골목에 서 있는 것처럼 가만히 ‘멈추어’ 있는 일이지만 가장 적극적인 자발성으로 이루어진 ‘역동적 정지’이다. 우리 안에는 말 열 마리로도 끌어낼 수 없는 거인이 숨어있어서 스스로 움직이려 하기 전에는 결코 움직여지지 않는다. 이근화의 시는 그 거인이 바로 감정들임을, 그의 어깨에 올라탈 때 세계 역시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헌데 이러한 감정의 자율성의 뒷면에는 어떤 절박함이 있다. 이 시집의 첫 시에 해당하는「엔진」의 일부를 보자.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피를 흘리고/ 귀여워지려고 해/ 최대한 귀엽고/ 무능력해지려고 해// (…)//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울어보려 해/ 우리는 젖은 얼굴을/ 찰싹 때리며/ 강해지려고 해”. 귀여워지려는 것과 무능력해지려는 것이 “피를 흘리”는 것과 동일한 지위를 가질 뿐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문제로 제시되고 있다.

 

이근화의 시에서 감정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것이며, 지켜낸다는 것은 곧 강해지려는 일인 것이다. 그러니 「소울 메이트」는 마지막 연까지 남김없이 읽혀져야 한다. “외투를 입고 구두끈을 고쳐 맨다/ 우리는 우리가 좋을 세계에서/ 흠뻑 젖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골목에 서서 비의 냄새를 훔친다”. 감정은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자발성/자율성인 것이다. “우리가 좋을 세계”를 감정으로 지을 수 있고, 그 속에서 “흠뻑 젖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마로니에」에는 “살아남기 위한” 감정이 어떤 시적 태도와 효과를 보여주는지 잘 드러난다. 시 속에서 화자는 “귀의 모양을 바꾸”기 위해 “귀청이 떨어질 듯 크게 음악을 틀어 놓”거나, “오래된 습관들”에게서 떠나기 위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 보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모든 노력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가고 화자에게 남은 것은 “나무들은 꺾이지 않고/ 도로 위의 아침은 도로 위의 밤을 벗어”난다는 사실 뿐이다. 이 시가 빛나는 지점은 다음에 이르러서다. “가로등에 부닥치는 나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읽기에 좋은 간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안간힘을 써도 꿈쩍도 않는 사실들에 대해 시는 그 어떤 부정적 판단이나 평가, 비난도 하지 않는다.

 

단지 강압적 사실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만 머물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명하게 발언할 뿐이다. 이 직접성은 시와 독자 사이의 거리를, 내쉬는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좁혀놓으면서 시적 효과를 획득한다. 이는 그동안 다른 많은 시들이 감정을 절제하는 묘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정서를 전달하던 작법과는 대조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감정의 직접성이 ‘과잉’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녀의 시가 이해/판단/평가로 발전되려는 지점에서 감정을 정지시키기 때문이다. 이 ‘역동적 정지’는 자신을 지켜내려는 노력인 동시에 타자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그녀의 시가 가장 매력적인 지점, 즉 천진난만하고 엉뚱한 상상력은 바로 이러한 태도가 기저에 깔려있기에 가능하다. 「금자씨의 권총」에서 화자는 자꾸만 화가 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3층 베란다 창문으로 담배꽁초가 들어”온다거나 “21층 사시는 아줌마 한 분”의 지독한 향수 냄새, 혹은 “왕족발이 가죽 수선이 차량 수리가 왔다고/ 친절에 꽂혀 마이크를 가져다 귓가에 들이대는” 상황들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상황에 대처하는 시적 태도는 엉뚱하고 기발하다. 그저 “권총이나 하나 쥐고 있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권총으로 누군가를 쏘아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총알 없이 폼 나게/ 들고 아파트 주변 산책이나 하”겠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감정인 분노를 표현하면서도 어느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 그녀가 시에서 일관되게 보여주는 태도들과 일치한다. 

 

그녀의 엉뚱하고 다정한 상상력은 “배 한 척을 집어삼킨 대왕 오징어의 마음”을(「우리의 우정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중) 걱정하는가 하면, “살인자가 주머니에서 잃어버린 손가락을 꺼내 흔드”는 것을 보고 “그건 나의 것인데 하며 울다가/어느새 좋은 생각에 빠져버리”기도 하며(「大원수 무찌르자 포장마차」중) 자신의 손가락을 장난감처럼 대할 만큼 천진하다. 이 알록달록한 상상력과 투명한 감정들로 가득찬 시에는 원한이나 증오를 위한 자리가 없다. 세계가 병들었을 때, 시는 건강해지려 함으로써 함께 병들지 않는다. 그것은 병든 세계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이지만 동시에 세계를 치유하는 힘이기도 하다. 

 

상상해보자. 키가 닿지 않는 선반 위에 놓인 캔디 박스를. 그리고 아이가 집에 혼자 남은 날, 선반 아래 놓일 의자를. 아마 설렘으로 팽팽한 발끝은 의자를 조용하지만 정확하게 딛고 올라설 것이다. 아이는 “섭취한 대부분의 영양을 발로 소비한다”(「우리들의 진화」중).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두 발을 사랑”하는 일이다. 우리 자신의 두 발을 믿고, “길을 똑바로 걸어/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되돌아”올 것.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상자는 다시 닫히고, 의자는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지만, 세계는 어딘가 비밀스러워져 있다. 

_《문학동네》 2009년 겨울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