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한 경청

 

장은정

 

 

어떤 시들에게 ‘쓴다’는 것이란 말하는 행위가 아니라 철저히 ‘듣는’ 행위일 수 있음을, 이기인의 두 번째 시집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를 읽으며 알게 되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 흔들리는 눈빛 하나 놓치지 않는 이 섬세한 청각들은 오로지 ‘당신’을 향해 열려 있으니, “혼자서, 납작하게 살아온 당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줄까요”(「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내내 궁리하는 이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함께 ‘당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행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데 이 ‘당신’들은 누구인가? 과일장수, 청소부, 철거민, 외국인 노동자…… 이들을 망설임 없이 사회적 약자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의 통증과 신음소리는 언제나 사회적으로 ‘묵음화’되기에 그들은 과연 “납작하게” 살아온 자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기인의 시들은 “젖은 시집 속으로 부끄러운 몸으로 들어”온 그들을 ‘사회적 약자들’이라고 쿵쿵 소리 나게 못질하며 명명하지 않는다. 소리 없이 “납작하게 살아온” 그들의 진짜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더 작은 발걸음으로, 더 낮게 귀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시집의 조용한 발화들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 한 편의 시가 있다. 

 


먼지를 닦는 청소부의 중얼거림은 두 짝
앞으로 걸어간 걸음은 책상 위에 펼쳐진 의료용 기구를 정리하며 말없이 아프다
뒤쪽으로 돌아간 걸음은 환자들이 떨어뜨린 먼지를 조용히 줍는다
조용히 닳아 없어진 삶의 유혹 때문에 청소부는 매월 삼십 만원을 받으며
책상 위에서 시들어가는 장미의 불안을 본다
매일매일 닦아주는 실내에서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실내화의 슬픔에 발목을 넣는다
청소부는 청진기가 놓인 책상 아래 원장님의 실내화가 정박해 있는 곳으로 떠내려간다
먼지는 그곳으로 와서 매일매일 살림을 차린다
청소부는 나란히 앉아 있는 실내화의 정적이 느릿느릿 다가오는 것이 느릇느릿 무섭다
몸을 숙여서 끌고 가는 실내화의 아픈 발끝으로 그의 새벽 미열이 내려와서 뜨겁다


―「실내화」전문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시가 청소부에 대한 시가 아니라는 점이다. 제목이 잘 일러주고 있듯이 시는 청소부의 실내화에 그 중심을 맞추고 있는데, 특히 실내화의 동선을 그대로 포착하려는 것에 모든 긴장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래서 시의 시점은 언제나 걸음의 위치인 ‘아래’다. 가령 첫 행에서 우리는 “중얼거림”이라는 입술의 위치를 먼저 떠올리지만, 곧이어 그 이미지는 “두 짝”이라는 걸음의 위치로 급하게 하강한다. 그 후부터 시를 주도하는 주어는 “걸음”이기에 “책상 위에 펼쳐진 의료용 기구”에 대해 언급할 때에도 우리는 시의 시점을 따라 책상을 ‘올려다’ 보게 된다. 이 시점은 청소부의 삶이 몸의 위치와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매월 삼십 만원”을 받기 위해 “실내에서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실내화”를 신고 청소부가 가야하는 곳은 바로, “먼지”들이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청소부는 매번 “원장님의 실내화”가 놓여있는 “책상 아래”로 “떠내려”가고, 환자들이 떨어뜨린 “먼지를 조용히 줍”느라 허리를 숙인다. 이 구체적인 시점이 해내는 역할은 사소해보이지만 대단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점을 따라갈 때 우리는 시를 읽으며 ‘청소부’를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청소부가 ‘바라보는 것’을 함께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청소부를 슬픔과 같은 ‘상징’으로 동일시하지 않도록 막아준다. 우리는 시를 따라 스스로 낮게 이동함으로써 “청진기가 놓인 책상”과는 달리 느리고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에도 동참하게 되고, 장미의 아름다움보다는 “시들어가는 장미의 불안”을 느낄 수 있게 되며, 결국은 “실내화의 정적이 느릿느릿 다가오는 것”에 스며있는 두려움까지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시는 이기인의 묘사가 ‘바라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따라 움직이는 것’에 핵심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중얼거림”이라는 목소리가 아니라 바로 “실내화”의 움직임에서 청소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들을 수 있다고 보는 것과 같이 이기인의 많은 시들은 대상 자체보다는 대상과 가장 밀접한 사물에 더 큰 초점을 맞춤으로서 그들을 시적으로 형상화시킨다. 가령 공사장 인부에 대해 쓰기보다는 “공사장 흙먼지 아래로 떨어지는 저 검은 발자국 한 켤레,”에 집중한다거나 철거민들 그 자체보다는 “송곳으로 뚫어서 묶어놓은 명단의 이름”을 바라본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쓰기 보다는 “그 까만 몸이” 손바닥에 낀 “초록색 때수건”에 대해 발화하는 것이다. 역시, 그렇지 않은가. “납작하게 살아온 당신”에 대해 듣기 위해서는 당신을 납작하게 누르고 있는 것부터 써야하는 것이다. 당신을 누르는 힘들은 당신이 사물들의 목적 연관 체계 속에서만 움직이기를 강요하고, 모든 욕망과 발언과 통증들을 억누르면서 스스로를 사물화 시키길 강요한다.  

 

이 시집을 이루는 많은 시편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바로 “싶다”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빈집 앞 아침부터 계속 한자리에 앉아 있던 노인은 의자를 들고 담벼락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공가(空家)」중), “물살 아래로 아래로 퐁당 떨어지고 싶다”(「돌다리」중), “무릎이 다 닳은 빗자루는 그의 육친처럼 벽에 기대고 싶었다/벽에 기대어 마당 쪽으로 툭 쓰러지고 싶었다”(「빗자루 이력서」중), “토란잎 줄기는 휘어져서 땅으로 내려와 쉬고 싶어 죽겠다”(「줄기가 자라는 시간」중) 등등. 이 많은 ‘―싶은’ 마음들은 대부분 ‘휴식’과 연관되어 있고, 그 휴식은 대체로 ‘차라리’ 죽음을 원하는 것에 가까울 만큼 지쳐있다. 

 

한데 이 구절들은 대체로 하나의 시편 안에서 강하게 힘이 실리도록 배치된 것이 아니라, 무심히 놓여있어서 조금만 집중력을 놓치면 스쳐 지나가기 일쑤다. 그것은 이 ‘―싶은’ 마음들이 희미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런 마음마저 억누르는 그 힘이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기인의 시들은 당신을 자꾸만 움켜쥐는 사물들을 쓰면서, 그 사물들의 배후에 억눌린 당신을 듣는다. 이 새로운 시점은 대상을 다르게 보기위해, 새롭게 보기 위해 시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느끼는 그대로 더 자세히 듣기 위해 이동하는 것이 저절로 새로운 시점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한데 놀라운 것은 이 시집 중 가장 아름다운 시들 중 한 편은 상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자신의 몸을 먼저 낮추려는 마음 자체로 이루어진 시라는 점이다. 다음의 시를 전문으로 인용하며 리뷰를 마무리한다.

 

균형을 잃어버린 내가 당신의 어깨를 본다
내일은 소리없이 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나는 초조를 잃어버리고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더 좋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
첫눈이 쌓여서 가는 길이 환하고 넓어질 것 같다
소처럼 미안하게 걸어다니는 일이 이어지지만 끝까지 정든 집으로 몸을 끌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닮아가는 구두짝을 우스꽝스럽게 벗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밤늦게 지붕을 걸어다니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가만히 껴안아줄 수 있을 것 같다
벽에 걸어놓은 옷에서 흘러내리는 주름 같은 말을 알아듣고
벗어놓은 양말에 뭉쳐진 검은 언어를 잘 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매트리스에서 튀어나오지 않은 삐걱삐걱 고백을 오늘밤에는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요구하지 않았지만 당신의 어깨는 초라한 편지를 쓰는 불빛을 걱정하다가
아득한 절벽에 놓인 방의 열쇠를 나에게 주었다
자기중심을 잃어버린 별들이 옥상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본다
뒤척이는 불빛이 나비처럼 긴 밤을 간다


―「어깨 위로 떨어지는 사소한 편지」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