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한 반작용과 무중력의 영역

 

장은정

오은 시인의 첫 시집인 『호텔 타셀의 돼지들』(민음사 2009)은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경쾌한 ‘말놀이’들로 가득하다. 이 놀이는 좀처럼 지칠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까르르 까르르 숨넘어갈 듯 웃으며 ‘또 하자’고 어른들을 조른다. 먼저 녹초가 되는 쪽은 언제나 어른들이다. 수록된 대부분의 시가 말놀이를 거친다는 점에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은 명백히 아이들의 세계다. 아이들에게 언어란 존재의 집과 같이 엄숙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음과 모음으로 따로 떼어내 가지고 놀 수 있는 알록달록한 블록이다.  

 

「0.5」에서 0.5라는 숫자는 단위의 종류에 따라 시력, 샤프심, 강설량, 구 버전 소프트웨어, 커플링의 무게 등으로 쉴새없이 다르게 규정된다. 이 ‘단위의 이데올로기’는 무표정하게 0.5라는 숫자를 자신의 의도와 필요에 의해 ‘사용’한다. 사용이 끝나고 나면 여지없이 “잊어버리”거나 “휙 던져”버리고, “분해”해버린다. 이처럼 0.5를 함부로 다루는 일방적인 태도는 이해와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이러한 일방적인 폭력에 분노하는 데 궁극적인 목적을 두지 않는다. 독자가 가장 먼저 누리게 되는 것은 다양한 종류의 0.5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이다. 이 즐거움이 먼저 온 후에 다른 정서들이 뒤따라 붙는 것이다.

 

「어떤 날들이 있는 시절 3」 또한 마찬가지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마다 새우 등이 터졌지만, 등잔 밑이 어두워서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거나 “쥐구멍에는 볕 대신 병이 들었고 고생 끝에 찾아온 건 낙이 아니라 막”이라는 구절들을 보자. 이 구절들은 우리 주변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절망스럽고 부조리한 어떤 구체적인 사건들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이 묘사들은 마냥 비장해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선 속담을 비틀거나 이어붙여 만든 이 절묘한 말놀이들에 ‘감탄’하면서 잠시나마 이 상황들에 대해 시치미를 떼고 웃을 수 있다.

 

사실 말놀이가 이처럼 ‘본격적인’ 요소였던 적은 없다. 황병승의 말놀이는 세계의 폭력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부조리와 모순을 드러내고 동시에 자기연민을 경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이는 황병승의 시에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 전면적인 특성이라 규정하기 힘들다. 김경주의 말놀이는 간혹 위트와 유머를 동반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노리는 것은 정서의 효과적인 전달이다. 이 말놀이 역시 김경주의 시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꼽기는 힘들다. 이에 비하면 오은의 말놀이는 분량적인 면에서나, 그 의의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말놀이들은 지칠 줄 모르는 활기로 가득하다. 세계의 폭력으로 인해 앓거나 미치거나 분노하던 그간의 많은 시들과는 달리, 보란 듯이 ‘활짝’ 웃으며 더욱 신나게 “텀블링, 텀블링”(「스프링」) 튀어 오른다. 

 

이 도약은 정점에서 세계를 일시적이나마 ‘내려다볼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하여 함께 웃을 수 있게 한다. 잠시 떠오른 그 순간의 정점에는 끔찍한 세계에 대한 긍정과 분노가 공존하고 있다. 세계가 아무리 폭력과 억압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이를 완전히 외면하지 않고 끈질기게 바라본다는 점에서 긍정이며, 그 세계를 웃음거리로 만든다는 점에서 분노인 것이다. 즉 말놀이는 맞은편에서 날아오는 공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면서 힘차게 맞받아친다. 이것이 오은 시인이『호텔 타셀의 돼지들』에서 보여주는 ‘씩씩한 반작용’의 자의식이다. 이 세계의 ‘끔찍함’에서 더 큰 반동을 끌어내 ‘말놀이’와 ‘애드리브’로 즐겁게 도약하는 이런 태도는 분명 특별하고 새로워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 시집의 더 큰 가능성은 「한스」나 「존재하려는 경향」을 비롯한 몇편의 예외적인 시들에게서 발견된다. 이 시들은 ‘씩씩한 반작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작용―반작용의 무한한 반복의 궤도를 약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한스」에서 ‘한스’는 하룻밤 사이에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 “꿈을 품기보다는 그것을 실현하는 문제에” 부딪힌다. 하룻밤 사이에 바뀐 기준들로 혼란스러워진 한스에게서 ‘질문’들이 쏟아진다. “하루 만에 성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질문에 대한 질문도 이어진다. “내게 질문할 권리가 있긴 한 걸까요?” 「21세기 어린이」역시 문득 찾아온 질문들이 시의 마지막을 차지하고 있다. “나의 이름은 과연 몇개나 될까요? (…) 얼마나 더 성장해야 할까요? (…) 대체 누구 말을 믿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질문들에서 아이가 세계의 폭력에 ‘대응’하는 것을 넘어서서 스스로를 ‘들여다보려’ 하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세계를 내려다보던 수직적인 시선이 점차 그 방향을 반대로 되돌려 자기 자신을 향한 수평적 시선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수평적 시선이 궁극적으로 닿는 곳은 바로 ‘어리둥절한 무중력의 영역’이다.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는 이 영역은 혼란스럽다. 

 

「존재하려는 경향」은 이 영역의 모호함이 시적인 순간으로 잘 포착되어 있다. 이 시에는 이차 방정식 예제를 샤프심 한번 부러뜨리지 않고 푸는 선생님과, 그런 선생님에게 관심을 받지 못해 속상해하는 소년이 등장한다. 이 시가 묘한 느낌을 주는 것은 전화기를 들고 “문득 막막”해 하는 1층의 엄마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인과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 시는 기계마냥 메말랐을 것 같았을 “선생님이 흠뻑 젖은 몸으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면서 매혹적인 어리둥절함을 전달한다. 

 

씩씩한 반작용의 시들은 작용과 반작용의 영역이 명료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중력의 영역’에서는 그 상반되는 흑백의 명료함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이 모호함과 불확실함은 이데올로기의 감시와 억압이 완전히 포섭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이다. 이 예외적인 몇편의 시들은 세계의 억압과 감시망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는 몇편에 한정된 미약한 가능성이다. 허나 이 미약한 가능성이 없다면 이 시집이 주력하고 있는 ‘씩씩한 반작용’은 단지 ‘새로움’에 그쳐버렸을 것이다. 시가 가닿을 수 있는 최고의 지점은 기존의 세계에 단지 ‘새롭게 대응’할 때가 아니라, 그 대응마저 넘어서는 순간 만들어지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첫’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갖춘 그 ‘씩씩함’을 그대로 껴안고, 이 젊은 시인이 무중력의 영역 속으로 더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기를. “씩씩하게, 씩씩하게 / (…) / 묻고 또 묻고 / 묻는다는 것에 대해 또 물을 것.”(「스타일」)

 

_《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 발표 (본문 보기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