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진 소리들의 세계

장은정

 


시적 언어는 일종의 주문과도 같아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불러들이고 사로잡아서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물리적인 세계에서 시는 종이에 인쇄된 글자들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가 시를 이루는 단어와 문장들을 구체적으로 믿기 시작할 때 이 연약한 글자들은 행과 연을 따라 난 길을 통과하면서 실제보다 더욱 풍부하고 구체적인 상상적 세계를 불러들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시라는 장르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 중 하나라고 생각해 왔다. 한데 시적 언어의 이러한 상상적 가능성에서 시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보다는 시적 언어의 한계까지 스스로를 밀어내면서 경계의 떨림으로 시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시가 있다. 이제니의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에서는 상상적 가능성이 지닌 자유가 도리어 고립으로 간주되고 비극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감지되고 있는 듯하다. 


시집을 여는 첫 시이자 시인의 등단작인 「페루」가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을 살펴보자.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시는 우선 여러 색들을 나열하고 색들의 주체에 대해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는 문장은 모두가 양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양을 가지고 있다는 또 다른 암시를 숨겨두는 방식으로 양의 존재를 감춤으로써 드러낸다. 양은 ‘없을’ 때에만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 시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스스로에게서 한 발자국씩 물러나 있다. 가령,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와 같은 구절은 우리가 이 이미지들의 세계에 몰입하며 완전히 들어서려는 순간, 우리의 발목을 단단히 움켜쥐면서 이 이미지들이 그저 상상으로 지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그러니 연이어 들려오는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는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하는 화자의 상상 속에서 들리는 것이다. 이렇게 이 시는 양갈래의 머리칼들을 교차로 땋아 가는 것처럼 이미지와 이미지의 기원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 자체로 자기 완결성을 지닌 상상력의 세계를 완성할 수도, 상상하는 행위를 중단할 수도 없는 이 틈새 사이에서 진동하는 일이 “반복되는 실패”로, “저주”로 여겨지는 것은. 그러므로 이 시는 “간신히 생각하고 간신히 말한다.”라고 ‘간신히’ 쓴다. “적어도 꽃은 아름답다.”고 쓰는 것으로 멈추지 못하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덧붙이고 마는 것이다. 

 

어째서일까. 무엇이 이 시들을 자꾸만 자기 자신으로부터 물러서게 만드는 것일까. 이 시집에 수록된 많은 시들은 시의 언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요롱이는 말한다」는 바로 그러한 불가능한 영역들을 고스란히 반영함으로써 시적인 효과를 내는 시들 중 하나이다. 제목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듯 이 시의 중심화자는 “요롱이”이다. 한데 이 요롱이가 바라는 것이 의아하다. “나는 정말 요롱이가 되고 싶어요.” 이 바람은 요롱이가 자신이 요롱이로서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이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요롱이’는 오로지 ‘언어로서만’ 존재하고 있으며, 당연하게도 이 언어는 요롱이의 개별적인 존재론적 속성이 남김없이 제거된 벌거벗은 언어다. 그러니 요롱이는 반드시 요롱이일 필요가 없다. 

 

하나의 단어는 다른 단어로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다. “단 한번도 내리지 않은 비처럼 비가 내린다. 눈이 내린다고 써도 무방하다.” 비가 눈으로 바뀐다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 그에 대응하는 변화 또한 발생하진 않는 것이다. 이처럼 벌거벗은 언어에 대한 인식은 많은 시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풍선 풍선 풍선은 이름이 바뀌었는데도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 서운했다.”(「분홍 설탕 코끼리」). “나는 나 자신과도 공통점을 갖지 못한다.” (「편지광 유우」). “어쩌다 우리는 소멸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지상에 집을 짓지 못하고 허공에 매달린 채로 이곳과 저곳 사이에서만 몸을 누이는. 블랭크 블랭크.” (「블랭크 하치」). 이 구절들은 표면적으로 ‘나’라는 자아에 대한 정체성과 관련된 문장들 같지만 그보다는 본질적으로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언어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아프리카』는 오로지 언어로서만 존재하는 슬픔으로, 그럼에도 언어를 벗어던질 수 없는 슬픔으로 글썽거린다. 이 슬픔은 이 시집의 도처에서 발견되는데, 놀라운 것은 이 슬픔이 바로 이제니 시의 언어가 가진 가능성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앞서 언급했던 「요롱이는 말한다」는 굳이 소리 내어 읽지 않고 눈으로만 따라 읽어도 어떤 리듬감을 감지할 수 있다. ‘요롱’이라는 글자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롱이에게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이 벌거벗은 언어를 반복하는 것뿐이다. 그것이 리듬을 만들어낸다.

 

다음의 문장들을 따라 읽어보자. “요롱이는 말한다. 나는 정말 요롱이가 되고 싶어요. 요롱요롱한 어투로 요롱요롱하게.”, “그건 단지 요롱요롱한 세상의 요롱요롱한 틈새를 발견한 요롱요롱한 손가락의 요롱요롱한 피로.”, “가슴속 모음이 가슴에서 눈으로, 눈에서 입으로, 입에서 울음으로 옮겨가는 일을 보는 일은 요롱요롱하다.” 몇 문장만을 옮겨 적었을 뿐인데도 우리는 금방 요롱요롱해진다. 요롱이라는 고유명사가 형용사와 부사로 번져나가면서, ‘요롱이’라는 이름이 종국에는 ‘소리’가 되고 소리는 ‘리듬’이 되는 것이다. 리듬이 환기시키는 요롱요롱한 기분이 무엇인지 콕 짚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귀여운 어감에도 불구하고 그렁그렁한 눈물방울을 연상시키는 리듬이다. 표제시 「아마도 아프리카」는 이 발랄하고도 슬픈 리듬이 가장 시적인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는 시편이다. 

 


코끼리 사자 기린 얼룩말 호랑이
멀리 있는 것들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부를 때
나는 슬픈가 나는 위안이 필요한가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아주 조금
 
호랑이, 그것은 나만의 것
따뜻하고 보드랍고 발톱이 없는 것

살고 있나요 묻는다면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나는 아주 조금 살고 있어요


―「아마도 아프리카」부분

 


물론 시 속에서의 아프리카가 ‘실제’ 아프리카를 지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곳에 살고 있는 “호랑이”는 “따뜻하고 보드랍고 발톱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호명되는 “코끼리 사자 기린 얼룩말 호랑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따뜻한 위로들, 오직 우리를 위한 것이다. 오로지 언어로서만 존재하는 상상적 기표들을 조용히 마음속으로 불러내다가 화자는 금방 알아차린다. “나는 슬픈가 나는 위안이 필요한가”. 조심스레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이어지는 사려 깊은 리듬이 물결처럼 번져나간다.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아주 조금”. 모음 ‘ㅏ’의 소리들이 조용하게 반복되면서 슬픔을, 위안을, 아마도 아주 조금, 아름답게 만든다. 이 시에서 시적 언어들은 ‘의미’보다는 ‘소리’로 존재하면서 세계로부터의 분리가 가져다준 슬픔을 그 자체로 시적인 것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시적 언어의 상상적 가능성에게서 시적 효과를 발견하는 시들은 궁극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것들을 실재하는 것보다 우위에 놓음으로써 시적인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하였다. 하지만 역으로 시적 언어의 한계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하는 이제니의 『아마도 아프리카』는 스스로의 언어를 기어이 실재하는 것 아래에 놓음으로써, 뛰어난 구체성을 획득한 상상적 세계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시적 언어의 슬픔과 외로움을 있는 그대로 감당하고자 한다. 그러니 이 소리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섣불리 환호해서는 안 된다. 이는 세계에 직접적으로 가닿지 못하고 마는 실패의 소리, 고아의 울음소리, 축축하게 그늘진 소리들이기 때문이다. 이 시들에게 소리의 아름다움이란 쉽게 환호하기엔 너무 절박한 존재방식이고 시적 언어가 세계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윤리적 자세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늘의 바깥에서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보다는,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아주 조금, 함께 우는 것. 그것이 이 그늘진 소리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_《창비문학블로그》 2010년 10월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