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것
장은정
어떤 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묻는다. 그것도 아주 직접적으로. 그때 시는 ‘삶’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당연하게도 삶은 나 자신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아서 김이듬의 『말할 수 없는 애인』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전화를 걸어와선 “눈이 와, 여긴 함박눈이야”(「함박눈」)라고 말하는 ‘너’에서부터 “인도 아프리카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사람들”,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인 학생들”(「말할 수 없는 애인」)도 있고, “미끄러운 언덕” 위에 있는 “오두막집의 삐걱거리는 문”을 열어야 만날 수 있는 “여태껏 보아왔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늙고 커다랗고 비만한 남자”도(「호수의 백일몽」) 있다. 처음으로 한국에서 첫눈을 맞아본 “쿠바에서 온 소녀”(「기적」)와 “7, 8년 만”에 동행한 “백발의 신사”도(「백발의 신사」) 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 시들은 그들에 ‘대해’ 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화자와 함께 있다. 함께 대화하고 함께 눈을 맞고 함께 통화한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시가 아니라 그들‘과의’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일어나는 일들로 가득해서, 어쩐지 김이듬의 시는 ‘텍스트’라고 말하기가 망설여진다. 화자와 시인을 혼동하게 하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김이듬의 시를 읽고 있으면 어쩐지 그녀의 ‘생활’에 동참하게 된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때로 그 생활은 예전에 좋아했던 남자와 그의 딸을 만나는 일이어서 함께 새로운 감회를 경험하기도 하고(「겨울 휴관」), 반년 넘게 비어있던 앞집에 누군가가 새로 이사 온다는 사실을 알고 먼저 도착한 이삿짐 속의 책 제목을 흘깃거리는 일처럼(「파도」) 두근거리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일상에 내재해있는, 우리도 한번쯤은 경험해봤음직한 감정들은 김이듬의 시에선 고스란히 ‘시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일화들이 있다. 가령 화자에게 “한국말을 배우던 베트남 여자가 도망”친 일 같은 것들, 결국 “나의 베트남 친구”가 “추방”되는 것을 지켜보는 일(「자살」). 이런 일화들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순히 ‘사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일화에서 더욱 치열한 자기인식의 문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음악도 독서도 나를 방해하지 않고/철거반도 폭격도 내 식사를 망치지 않는다”(「나는 세상을 믿는다」)는 그러한 자기인식에 의해 가능한 문장이다. 여기에는 ‘나는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음악과 독서는 언제나 ‘즐기는’ 것으로 기능하고 결코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 철거반에 대한 기사를 보며 분노할 수도,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쏟아지는 폭격에 비장해지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내 식사를 망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은 내가 지금 “평범한 기쁨”과 “엄청난 사태로부터도” “떠나 있는 것”임을(「함박눈」) 알게 해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멍청이 정신병자로 분류되지 않으려면/의심 속에서 처참한 현장을 목격해야 한다” “휴전 지대에서의 생존은 몇 편의 어이없는 영화를 더 보는 것”이기 때문에 “자살을 지연하는 용기와 인내심을” 가져야한다.(「자살」)
이러한 자기인식에 기반한 가치관은 김이듬의 시적 가치관과 직결되어 있다. 그에겐 일반적인 ‘시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에 대한 의심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문학적인 선언문」의 “나는 내가 시적이지 않은 시를 쓰며/시인답지 못하게 살다/문학적이지 않은 죽음을 맞게 되길 빈다”는 구절이나 「죽지 않는 시인들의 사회」의 “연애는 없고 사랑만 있다/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조용히 그리고 매우 빠르게/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했다”는 구절이 그러하다. 예술적 자율성을 파괴하고 삶으로 뛰어들 것! 이것은 아방가르드의 오래된 태도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저 구절들을 맥락 그대로 해석하는 일은 위험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이듬의 시들은 충분히 시적이기 때문에. 그러니 가장 중요한 마지막 질문을 던지자. 김이듬에게 ‘시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축하해
잘해봐
이 소리가 비난으로 들리지 않을 때
누군가 꽃다발을 묶을 때
천천히 풀 때
아무도 비명을 지르거나 울지 않을 때
그랬다 해도 내가 듣지 못할 때
나는 길을 걸었다
철저히 보호되는 구역이었고 짐승들 다니라고 조성해놓은 길이었다
―「꽃다발」 전문
좋은 일이 생긴 모양이다. 축하한다는 말과 잘해보라는 말들을 듣는다. 그 말이 어쩐 일인지 비난으로 들리지 않아서 그 좋은 일에 흠뻑 젖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천천히 꽃다발을 묶고 천천히 푸는 것과 같이 차분해서, 그 시간만큼은 “아무도 비명을 지르거나 울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듣지 못한다. 조용한 곳, 조용한 시간. 그런데 흔치않은 이 시간은 지나치게 너무 조용하다. 여기는 어디일까. 사실 그곳은 “철저히 보호되는 구역이었고 짐승들 다니라고 조성해놓은 길이었다”. 이 시를 다 읽으면 어김없이 몰려드는 이 이상한 기분의 정체는 이것이다. 「꽃다발」은 아주 기쁜 순간, 그 기쁨의 조용한 순간을 시적으로 구축한다. 하지만 마지막 연은 바로 그 시간이 어떤 극도의 배제를 통해 만들어진 것임을 서늘하게 일러주고 있다. 그래서일 것이다. 시를 다 읽고 나면 어딘가 갇혀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이 시는 김이듬의 이번 시집 『말할 수 없는 애인』에서 김이듬의 ‘시적인 것’을 가장 응축하여 뛰어나게 보여준다. 아름다운 것을 충분히 감응하게 한 후 그 아름다운 것의 잔인함을 드러낼 것.
다시 한번 강조해야 할 것은 이러한 시적인 것을 만드는 원동력이 시에 대한 불신에서 온다는 점이다. 가령 이런 구절은 어떠한가. “절박하다는 건 뭔가 나는 시를 안 썼어도 목매달지 않았을 것이다 난 나를 저주하지 않으며 내 시는 볼펜으로 그린 내 손목시계처럼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나는 속없이 다정하고 인생은 덥다”(「오빠가 왔다」). 뒤표지 글도 일관적이다. “2, 3년 쓰다 말려고 했는데 이래저래 세 번째 시집을 묶는다. 이렇게 된 데는 시를 향한 열렬한 사랑이나 의지 같은 거보다는 그것들을 상실하고 상실해가려는 내 육신이 있었을 뿐.” 우리는 시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려줄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김이듬의 시는 자신을 부정하는 힘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사실 삶을 긍정하고 존중하는 힘이다. 그래서 김이듬은 이렇게 쓴다.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끝내 내가 말하지 못할 때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끝내 쓰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아들은 후에 그것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는 일이다. 가령 「여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같은 시는 그저 읽을 수 있을 뿐, 그에 대해 따로 말을 덧붙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_ 《애지》 2011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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