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자의 아래
장은정
얼마 전에야 우리는 알게 되었다. 사소한 어떤 순간에게서 포착되는 느낌이 얼마나 시적일 수 있는지. 가령 높은 선반 위로 손을 뻗느라 발꿈치를 약간 들어 올리는 것은 모두가 경험해 본 적 있는 사소한 순간이다. 하지만 바닥으로부터 발꿈치 사이, 몇 센티미터의 높이로 팽팽해지는 그런 사이 공간에게서 시적인 유일함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것은 온전히, 김행숙의 시를 통해서였다.
이 시적 효과를 낯설게 누리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시의 영역이 확대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 어떤 이념이나 관념으로도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이 시적 순간에 대한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새로운 시를 읽음으로써 새로운 감각을 우리가 얻을 수 있었다면, 그 감각에 대해 열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물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행숙의 세 번째 시집, 『타인의 의미』는 그 제목부터 이 질문에 대한 암시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관념으로도 남김없이 설명될 수 없는 시적 효과를 통해 낯선 시를 구축했던 김행숙이 ‘의미’라는 단어를 새 시집의 얼굴에 전면적으로 배치한 것은 주목되어야 한다. 「머리카락이란 무엇인가」는 이러한 변화를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시편이다. 총 3연으로 구성된 이 시에서 첫 번째 연은 “머리카락이 자라는 순간”을 제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눈이 가장 밝은 사람도” 본 적 없는 이 순간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가 김행숙의 이전 시들을 통해 경험해 본적 있는 낯선 시적 순간이다.
그런데 이 시는 그 순간을 이전처럼 문득 비어버리는 공간으로 만들지 않는다. “눈이 어두운 우리에게 머리카락은 한 달 후에 자라는 것”임을 지적하면서, 머리카락이 다 자란 후에야 자라는 순간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그래서 두 번째 연은 “나는 머리카락에 대하여 의문을 품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세 번째 연은 “왜 머리카락은 끝없이 자라는가.”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즉 이 시편에서 중요한 것은 낯선 시적 순간의 포착이 아니라, 이 낯설게 비어버리는 순간의 비밀에 스며있는 의혹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머리의 반쪽은 비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 머리카락은 시간처럼 시간처럼 끝없이 자라는가. 왜 머리카락은 정치적인가. 마침내 누가 머리카락을 해석하는가”.
이 낯선 순간들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는 것. 그것은 이 낯선 순간에게 현실과의 관계를 묻는 작업이기도 하다. 비교해보자. 『이별의 능력』은 “마치 파혼선언처럼 플래시가 터질 거야/새가 날아가는 풍경화처럼/허공에서 정지한//사진을 둘러보며/분리감을 느끼는거야”(「놀이의 발견」)와 같이 ‘정지’와 ‘분리’를 통해 낯선 시적 자유를 찾아냈다. 그러나 “펜이 바닥에 떨어졌어요. 별 뜻도 없이 딴 뜻도 없이 굴러가는 저것을 어떡해.” 라는 외침에 대해 『타인의 의미』의 의미심장한 대답. “주우세요! 애타게 찾으세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탁자 밑으로 들어가는 일은 간첩의 신분처럼 위험한 것입니다. 엿듣고 싶으세요. 탁자 밑에서 영원히 나오지 마세요. 입도 뻥긋하지 마세요. 침도 삼키지 마세요.”(「탁자의 유령들」).
만약 이전의 시들이라면, 별 뜻 없이 굴러가는 펜이 주는 시적인 느낌을 매혹적으로 써냈을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시는 충분히 아름다웠을 것이다. 하지만 김행숙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탁자 밑으로 들어가서 애타게 찾고 영원히 나오지 말라고 단호하게 명령하는 것이다. 낯선 시적 순간을 찾아내고 그 순간에 대한 해석들과 의미들을 애타게 찾으라는 것. “우리에겐 동의해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부정해야 할 것이 똑같이 높은 산”이다. “밤을 새워도 끝나지 않고 밤을 새우지 않아도 끝나지 않”겠지만 이 결론이 나지 않을 행위를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어떤 결론도 나지 않을 것이기에 낯선 시적 순간을 그 자체로 보호할 수 있으면서도 이 시적 순간을 현실로부터 고립시키지 않을 수 있다.
비밀로 가득 차 있는 시적 순간이 스스로 해석과 의미의 영역으로 자발적으로 들어선다는 것, 물론 그것은 비평이 시를 마주하고 시도하는 해석의 작업과는 다른 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터. 이번 시집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잠과 꿈에 대한 숱한 진술들과 질문들은 바로 이런 시적인 의미화 작업으로 간주될 수 있다. 어째서 잠과 꿈인가? 잠들어 있는 시간은 우리가 의식의 연속성으로부터 잠시 벗어나는 시간으로 우리가 시적인 것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잠」이라는 제목의 시가 직접적으로 묘사하듯이 “어디에도 닿지 않은 채//그곳에 속하는” 시간인 것이다.
자기 완결성을 지니고 있는 이 시간은 현실에선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들이 달콤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일 수도 있고 비명소리와 식은땀으로 가득한 악몽의 공간일 수도 있다. 이 시공간성은 꿈을 통해 획득된다. 그러니 꿈은 잠의 현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잠과 꿈을 시적차원에서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꿈(잠)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사유이기도 하고 시적 순간에 대한 시적 사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시적 순간은 그 자체로 시적 사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 시집에서는 그것을 구분함으로써 해석과 의미의 영역으로 걸어들어 간다.
물에 빠진 사람
드디어 총체적이 된다
나는 꿈속에서 열 번 경험했다
내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딱 한번
나는 행복하였다
떠오르지 않는 꿈처럼
순종적이었다
나머지는 몽땅 악몽이었다
현실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어렸을 때
바닷가에서 보았던 익사체가 기억난다
갑자기!
그녀에게 닥친 현실을 깨닫자 뒷걸음질치는 저 여인
얼마나 멀어졌을까
어디서 무섭게 구역질을 하고 있을까
이제 보이지도 않는데
왜 그녀는 내게 이토록 친밀한가
우리 마을 사람도 아닌데
처음 본 얼굴인데
그것은 나의 현실도 아니었는데
왜 완벽한가
어떤 꿈들은
어떻게 내 것이 돼 버렸는가
―「누군가의 호흡」전문
이 시에서 가장 강조되어야 할 것은 리듬감이다. 이것은 글자의 소리가 반복되면서 생겨나지 않고 내용적인 것에서 생겨난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누군가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가 물 위로 떠오르기를 반복하고 있다. 물과 공기라는 두 세계를 교차로 드나들며 호흡은 멈출 듯 간신히 터지고 삼킬 듯 들이마신다. 이 리드미컬한 이미지는 그 자체로 시의 구조를 형성하면서 반복된다. 행복하였다가 몽땅 악몽이 되었다가, 시체에게 마구 키스를 퍼붓다가 무섭게 구역질을 하였다가, 보이지도 않는 그녀가 친밀하게 느껴지고, 나의 현실도 아닌데 이토록 완벽한, 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리듬감. 전혀 이질적인 두 세계를 절박하게 드나드는 어떤 순간들의 느낌은 김행숙의 시에서만 읽을 수 있는 시적인 순간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시에 대해 이렇게 매듭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시에는 풍부한 상징적 암시들이 출렁거리고 있다. 이 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두 가지의 단어, 현실과 꿈은 어떤 관계일까? 그것은 물과 공기처럼 선명하게 나뉘지 않는다. 2연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공기의 세계는 숨을 쉴 수 있는 달콤한 꿈이라는 현실이고 물의 세계는 숨을 쉴 수 없는 악몽의 현실이다. 그러니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누군가는 물과 공기 사이를 오가고 있을 뿐 아니라,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달콤함과 끔찍함 사이를 오가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의 차원에서는 물과 공기는 분리되어 있는데, 관념적인 시어들인 꿈과 현실은 물과 공기라는 이미지에 각각 대응되지 않는다. 이미지는 분리시키고 관념어들은 통합시킨다. 이 기묘한 균열 속에서 흘러나오는 이상한 절망감에 어리둥절해질 때, 물에 빠진 누군가의 숨이 끝내 끊어지고 만 것과 같은 마지막 연. “그것은 나의 현실도 아니었는데/왜 완벽한가/어떤 꿈들은/어떻게 내 것이 돼 버렸는가”.
그 어떤 감각어도 동반하지 않은 관념적 진술들이 날카롭게 구분되어 있는 흑색과 백색처럼 선명한 시적 감정을 동반하는 것은 놀랍다. 구분되어 있으나 분리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으나 구별해야 하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이 시는 진동한다. 이렇게 시적 순간과 시적 사유가 균열되면서 “드디어 총체적이 된다”. 그러니 『타인의 의미』에서 ‘의미’란 결코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이 빈자리를 삭제해선 안 될 것이다. “우리들이 똑같은 모양으로 입술을 벌릴 때/입안에 담은 것과/입술 바깥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모순을 일으킬 때/어느 쪽에도 진실의 발톱은 달려 있”기(「합창단」) 때문이다. 어둠을 가리고 있는 식탁보를 걷고 식탁 밑으로 기어 들어가자. 별 뜻도 딴 뜻도 없이 굴러가는 펜이 앞으로 쓸 글자들을 찾으러. 그 글자들이 존재한 적도, 존재할 리도 없다고 하더라도.
_《창비문학블로그》 2010년 11월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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