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읽기'는 행동일까, 아닐까? 책상 앞에 앉아 한 권의 책을 읽으며 하루를 통째로 보낸 한 사람을 상상해본다. 그 사람이 책을 읽는 동안 세계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만일 그 사람이 책을 읽는 대신 집을 짓는 것에 하루를 할애했다면, 저곳에 있던 몇 개의 벽돌들이 이곳으로 가지런하게 옮겨지고, 여러 나무 판자들이 일정한 모양으로 잘리고 배치되고 연결되는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이때 그 사람이 한 행동이 세계에 일으킨 변화는 명확해보인다. 어떤 사건이 명백히 발생했고 그것은 미세하게나마 세계를 다르게 변형시킨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벽돌과 나무판자들을 어떤 목적에 맞춰 변형시키는 대신, 책을 읽었다. 그렇다면 이 세계엔 하루동안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그건 어떤 건축물을 쌓아올리는 일과는 분명 다른 종류의 일이다.

하루에 시집을 다섯 권씩 읽던 시기가 있었다. 대학을 다니던 시절이었고, 당시 집이 학교에서 멀어서 학교에 가려면 한 시간 반 정도를 이동해야 했다. 왕복으로 대략 세 시간은 걸리는 그 시간은 언제나 시집을 읽는 시간이 되었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수업과 수업 사이의 공강 시간, 학생으로서 의무적으로 해내야 하는 과제와 같은 일들이 끝난 이후의 남는 시간은 모두 시집을 읽는 시간이었다. 그건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고, 그걸로 무언가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기'에는 시를 이루는 단어, 문장, 심지어 조사 하나, 문장 부호까지도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와닿았다. 

 

늘 어려운 수수께끼처럼 느껴지던 시들이 갑자기 무슨 뜻인지 명료하게 독해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시를 어려운 장르로만 여기던 시절에도 시는 모호했고, 하루에 다섯권씩 읽어치우던 '그 시기'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그 모호함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에서 불편함이나 거부감보다는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비밀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읽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는 문장으로 글을 처음 열었지만, 여러 종류의 글 중에서도 시를 읽는 것이 특히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지식을 전달하거나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명료함들에 저항하는 모호함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시라는 장르의 특수성 때문이다. 지식의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읽기 행위는 '배움'이라고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하루종일 시를 읽은 자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배움'이 없던 무언가가 새로이 생겨나는, 즉 더해지는 사건이라면 시 읽기는 오히려 반대의 일, 덜어내는 사건에 가까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쉽게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모호함 앞에서 읽는 자는 무언가 배우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한 질문을 듣게 된다. 가령 이런 시는 어떤가.    

 

우리 둘이는 서로 손을 맞잡고

어디서나 마음속 깊이 서로를 믿는다

 

아늑한 나무 아래 어두운 하늘 아래

모든 지붕 아래 난롯가에서

태양이 내리쬐는 빈 거리에서

민중의 망막한 눈동자 속에서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들 곁에서라도

어린아이들이나 어른들 틈에서라도

사랑은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우리들은 그것의 확실한 증거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음속 깊이 서로를 믿는다.


_폴 엘뤼아르, 「우리 둘이는」 전문

 


두 사람이 있다. 그 중 한 사람의 목소리로, 시는 우리 두 사람이 “어디서나” 서로를 믿고 있다고 말해준다. 이때의 '어디서나'라고 하는 것은 “아늑한 나무 아래 어두운 하늘 아래"가 되기도 하고, "모든 지붕 아래 난롯가"이거나 "태양이 내리쬐는 빈 거리"이기도 하다. 이때 나열된 것들은 구체적인 '장소'들이지만 "민중의 망막한 눈동자 속"이나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들 곁” 혹은 “어린아이들이나 어른들 틈"처럼 상대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이 시는 일견 추상적인 것으로 이해되기 쉬운 '사랑'이라는 가치가 서로를 깊이 믿는 두 사람을 통해 그 관념성을 벗어던지고 실재하는 것으로 명확하게 존재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증언한다. 

그렇다면 이 시에 모호성이란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이 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믿으며, 그 믿음이야말로 사랑이라는 것. 이렇게 요약하고 보면 참으로 명료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서로를 믿게 된 것일까? 그 믿음이란 그토록 '어디서나’ 존재할 수 있을 만큼 견고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 무엇보다 믿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시는 이처럼 시가 다루고 있는 대상인 '믿음'의 기원과 경로, 의미에 대해 그 무엇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 시의 모호성은 바로 여기서 비롯하며 동시에 이 시의 강렬함 역시 그 과정을 대담하게 건너뛰고, 그럼에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증언함으로서 발생하는 것이다.

어떤 시들은 읽는 자의 마음을 완전히 부서버린다. 자고 일어났더니 친구가 핸드폰으로 이 시를 보내놓았다. 잠결이라 아무런 대비없이 이 시를 읽고서는 나는 내 마음이 완전히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믿음과 사랑, 그리고 그러한 믿음과 사랑을 통해 살아가는 두 사람에 대한 이 시는 정말 아름다운데, 어째서 내 마음을 산산조각 내버렸을까? 아마 그건 내가 그토록 강인하고 완벽한 믿음과 사랑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을 절절히 깨닫게 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시 속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끝내 누군가를 믿지 못했던, 그리하여 끝내 도달하지 못했던, 불완전한 나의 사랑과 나의 한계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잊어야만 했던, 고통스러웠던 기억들 모두가 이 시를 통해 생생하게 이끌려 나왔다. 덕분에 이 시를 읽었던 하루종일 나는 슬픔에 잠긴 채로 무겁게 가라앉은 채로 하루를 보냈다. 그날 나에게는, 그리고 세계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2017년 8월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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