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만들어진 방, 그림자의 신전

장은정

벽과 바닥, 천장이 빛으로 만들어진 방이 하나 있다. 방에 나 있는 창으로는 미끄럼틀을 타듯 그림자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바닥으로 미끄러진 그림자들은 젖어있고 이윽고 방 속을 물처럼 흐르기 시작한다. 그 “그림자 속에서 새가 날고”, “강이 흐르고”, “바람이 불”면서(「세상에서 가장 긴 나무의 오후」중) 지평선이 생기고 나무들이 길게 자라난다. 이 낯선 세계 속, 그림자들의 살아있는 형태들을 넋을 잃고 지켜보노라면 건축가 루이스 칸의 말들이 떠오른다.

 

“방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 즉 방에 속한 빛은 대단한 것이다. 태양은 방이 만들어 지기까지는 그 빛이 얼마나 멋진가를 깨닫지 못한다.”(존 로벨, 김경준 역, 『침묵과 빛 ― 루이스 칸의 언어』, 스페이스타임, 2005. 104면.) 신영배의 이번 시집을 읽으며 이 문장들을 이렇게 바꿔 읽었다. ‘신영배의 시들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그림자라는 존재가 얼마나 멋진가를 깨닫지 못한다.’ 하나의 방은 자아의 확장일 뿐 아니라 사건의 체험이라 생각하는 루이스 칸의 말들에 이어 기댄다면, 신영배의 방은 우리의 자아를 확장시키고 새로운 사건을 체험하게 한다. 

 

 

오후 두 시 방향으로
나는 상자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얇게 접어둔 다리

의자는 새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앉아 있던 잠이 툭 떨어져 내린다
의자가 쓰러지고
새가 아름답게 나는 방

…중략…

커튼은 물고기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젖히자 출렁이는 강물 속
내 다리가 아름답게 흐르는 방


―「아름다운 방」부분

 


시 속에서 상자의 그림자는 흘러가며 의자의 그림자가 되고, 의자의 그림자는 흘러가며 새의 그림자, 물병의 그림자가 된다. 끊임없이 흐르며 다른 형태가 되는 이 그림자들은 대체 무엇인가. 귀속되어 있어야 할 대상과 무관하게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실체가 되는 이 그림자들. 그것을 부재의 현존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신영배의 그림자들은 어떤 특정한 의미나 상징의 대체물이 아니라 ‘물질’에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이 그림자들에게 어떤 이념적 진리를 요구한다면, 그러나 그림자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모든 물질들이 가진 침묵을, 이 그림자 역시 가지고 있다. 이 “다리가 아름답게 흐르는” 움직임은 오로지 이러한 물질적 침묵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림자의 움직임에 따라 수많은 대상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헌데 우리는 시 속에서 상자, 의자, 새, 물병, 물고기로 변하는 그림자의 수많은 대상들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자와 의자의 사이, 의자와 새의 사이까지 바라본다. 그 ‘사이’의 공간은 행과 연 사이의 간격들이다. 행갈이와 연갈이에 의한 호흡의 배치와 구조에 의해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 많은 대상들의 모습들을 한번에 이어서 연속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혀 다른 대상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움직임들의 동선은 마치 무용수의 동작들처럼 우아하고 매혹적이다. 물론 이 동선은 오로지 ‘비어 있음’의 간격에서만 읽어낼 수 있는 가상의 선(線)이다. 

 

상상력의 물질인 이 가상의 선은 볼 수만 있을 뿐, 만질 수는 없다. 바로 그것이 이 움직임이 주는 매혹의 핵심이다. 칸은 우리의 모든 감각 중 가장 첫 번째 감각은 촉각이며, 촉각은 단순히 만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만지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또한 이 열망은 보고자 하는 열망으로 발전되어 나간다. 즉 시각만이 허락되는 이 가상의 물질은 만지고자 하는 열망을 가장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는 이 순수한 동선들의 긴장에 헌신하는 시들로 붐비고 있다. 

 


소녀는 새를 기다린다
새는 물을 뚝뚝 흘린다

줄 위에 새가 앉아 있다

새가 마르면
새는 날아간다 

나는 소녀를 기다린다
소녀는 물을 뚝뚝 흘린다

줄 위에 소녀가 앉아 있다

소녀가 마르면
소녀는 날아간다

바다가 밀려온다
줄 위에서 떨어지는
소녀를 본다

목이 부러진 새를 날리던 물가


― 「소녀의 점」전문

 


이 시는 시적 구조와 이미지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로 결합했다가 분산되는 운동을 통해 시적 효과를 획득한다. 시의 구조를 살펴보자. 새와 소녀가 등장한다. 소녀는 새를 기다리고 있고, 새는 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새라는 상승의 이미지와 물이 떨어지는 하강의 이미지가 동시에 응축된 이 이미지는 돌연 말라버리고 날아가 버린다. 새가 마른다는 구절에서 물과 동일시된 새의 존재도 기묘하지만, 소녀를 기다리는 ‘나’가 등장하자 소녀가 돌연 새의 구조를 그대로 반복하는 장면은 더욱 낯설고 기묘하다. “소녀는 물을 뚝뚝 흘린다”는 “새는 물을 뚝뚝 흘린다”의 반복이며, “줄 위에 소녀가 앉아 있다”는 “줄 위에 새가 앉아 있다”의 반복인 것이다. 소녀와 새의 관계에서 새가 사라지자, 소녀는 새가 되고, 소녀의 역할은 ‘나’가 맡게 된다. 삼각형을 그려가는 선들의 반복적인 운동 속에서 동선들이 생겨난다. 

 

돌연 등장하는 “바다가 밀려온다”의 구절은 이 삼각형을 그리는 선들과 충돌하며 시적 효과를 획득한다. 필시 “줄”의 수평적 선의 연속에서 등장했을 바다의 수평적 이미지는 “밀려온다”는 서서히 펼쳐지는 면과 충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면은 “줄 위에서 떨어지는 소녀의 점을 본다”는 구절의 점들과 충돌한다. 다양한 형태들의 불규칙한 운동 속에서 펼쳐지는 긴장들은 마지막 구절 “목이 부러진 새를 날리던 물가”라는 구체적 이미지를 통해 극대화되어 완성된다. 이 짧고 간결한 행들이 펼치는 명료한 동선들의 긴장들은 단연 신영배의 시적 공간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사건이라 할 만하다. 

 

어째서 이 추상적인 선들이 감정을 동반하여 구체적 시적 효과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일까. 스위스의 미술사가인 뵐플린은 건축 형태가 어떻게 분위기와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우리 모두는 몸을 가지고 있고, 그 몸을 통해 공감의 원칙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라 대답한다. “우리의 신체 조직이 하나의 형태이고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모든 구체적인 것을 이해한다.”(에이드리언 포티, 역 이종인, 「형태」,『건축을 말한다』, 미메시스, 2009. 235면.) 건축적 형태에 대한 뵐플린의 설명을 빌려올 수 있다면, 신영배의 시들은 우리 몸의 형태들을 통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헌데 이 움직임들이 그려내는 동선들은 하나의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검은 바람결이 목을 감는다 손아귀들이 연체동물처럼 스멀스멀 저녁의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그림자들이 죄다 머리가 잡혀 저녁의 점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얼어붙어 집으로부터 떨어진 점이 된다 둥근 나무들의 여백 사이로 발없는 여자가 달린다 베란다에서 자라는 검은 식물 속으로 모공의 꿈속으로 침대와 엘리베이터와 테이블과 보도블록과 물빛이 함께 있는 거울 속으로, 달린다, 점이 될 때까지


―「저녁의 점」부분

창밖에서 사람들은 그림자를 사고팔았다 // 정오의 사무실 // 벽에 점이 있다  // 그녀는 / 점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 벽이 눕는다 // 바닥이 일어선다 // 그녀가 쓰러진다 // 바닥에 점이 있다 / 점이 있다 // 그녀는 일어나 / 점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 다시 벽이 눕는다 // 다시 바닥이 일어선다 // 그녀가 쓰러진다 // 벽이 도로 벽이 된다 // 연속하는 점 // 그녀는 일어나 / 점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 벽이 눕는다 // 바닥이 일어선다 // 쓰러진다 // 그녀는 일어나 / 점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 깊은 곳에서 말을 버렸다

 

―「정오에는 말을 버린다」전문

 


위의 인용된 시들에게서 쉽게 알 수 있듯이 모든 반복되는 운동성들은 한없이 점으로 수렴되고자 한다. 「저녁의 점」에서 그림자들과 발 없는 여자는 “점이 될 때까지” 달린다. 이 ‘점’은 “저녁의 구멍”이라거나 “거울”과 같은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있다. 구멍처럼 뚫려 있으나, 거울처럼 막혀있는 이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 ‘점’의 의미는 「정오에는 말을 버린다」에서 더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이 시에서 정오의 사무실은 벽이 눕고 바닥은 일어서는 회전을 거듭한다. 그 회전을 주도하는 ‘그녀’는 마치 쳇바퀴를 도는 것처럼 절박하다. 그녀가 달려드는 곳은 앞의 시와 마찬가지로 “점”이다. 하지만 점은 계속해서 그녀를 튕겨내고 그녀는 다시 정오의 사무실을 굴리고 점으로 달려들기를 멈추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그녀는 이토록 절박하게 달리고 뛰어드는 것일까. 

 

마지막 구절이 그 질문에 대한 결정적 힌트가 되어줄 수 있을 듯하다. “깊은 곳에서 말을 버렸다”. 어쩌면 신영배가 이 모든 운동을 반복하는 것은 ‘말을 버린 깊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 즉 언어 이전의 언어, 언어 없는 언어에 도달하기 위해서일지 모른다. 「점의 동물」에서 ‘점’은 수정란의 상태로 형상화된다. 이 시에서 점이란 ‘동물’이기도 한 것인데, 그것은 “입이 귀였을 때/무릎이 혀였을 때/머리통이 발바닥이었을 때/…중략…/두 다리가 가슴이었을 때/요도가 식도였을 때”처럼 모든 것이 합쳐져 있는 근원적이고 합일적인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는 시간적 의미에서 존재의 최초이기도 하고, 이 모든 운동성이 정지되어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그것은 「기하학적 다리에 대한 독백」에서 점은 그림자(운동성)가 생겨난 근원을 지시하기도 한다. “두 개의 다리를 외출시키고 나는 네 개의 점으로 주방에 몰려있어요” 

 

사실 신영배는 첫 시집 『기억이동장치』에서 “쓰다가 내가 사라지는 시/쓰다가 시만 남고 내가 사라지는 시”(「시인의 말」중)를 쓰고 싶다고 쓴 적이 있다. 이미 그녀는 첫 시집에서부터 사라지는 자유를 꿈꿔왔던 것이다. 이제 두 번째 시집에서 사라지고 싶은 것은 시인 뿐 아니라 시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시들은 증발을 향해 거슬러 흐르고 있다. “꽃이 있는 곳에서 꽃이 없는 곳으로”, “혀가 있는 곳에서 혀가 없는 곳으로”, “바람이 있는 곳에서 바람이 없는 곳으로”(「얼굴은 안개로 돌아간다」중). “얼굴들은 액체에서 기체로”(「4월의 나프탈렌」중). 엄밀한 제한성과 규칙성들이 부여된 이 움직임들에게는 사라지기 위한 순수한 ‘동선’들만이 남아있다. 빛으로 만들어진 방, 살아 있는 형태들이 무한히 흐르고 있는 곳. 그 곳은 그림자의 신전이다. 

 

_《현대시》, 2009년 10월호 발표.